난 할 수 있어 257화
그 다음으로 연단에 오른 대찬은 도진석 전무와는 판이한 목소리를 냈다.
그의 목소리는 요란하지 않고 차분했다.
“도진석 전무님께서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덕목을 강조하셨지만 전무님은 그 덕목을 통해 조합원의 단합과 조합원의 뜻을 힘 있게 대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정말 중요한 건 단합과 이익의 대변입니다.”
대찬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구 월드몰 출신 직원 여러분과 필래 출신 직원 여러분이 첨예한 갈등을 벌일 때. 누가 우리의 단합을 이끌었습니까.”
도진석 전무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정면만 바라보는 대찬이 그 불편한 기색을 인식할 수는 없었다.
“필래유통에서 신음하는 택배사업부 노동자분들의 이익을 누가 대변했습니까.”
도진석 전무는 이제 아예 고개를 돌려 대찬을 외면했다.
시선을 외면한다고 소리가 안 들리는 건 아니었다.
대찬은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여러분은 아마도 같은 이름을 떠올리시리라 생각합니다. 그 이름에 투표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대찬의 말이 끝나자 대의원들은 도진석 상무 때보다는 조금 큰 박수소리로 호응해주었다.
그 박수소리의 차이만큼 표 차이가 났다.
“…이것으로 조대찬 후보가 필래 비바체 우리사주조합의 조합장으로 선출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사회자의 선언이 있자,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진석 전무에게 악수를 건넸다.
도진석 전무는 활짝 웃으면서 그의 손을 맞잡았다.
하지만 그건 사람 좋아 보이려는 광고용 웃음이었다.
그는 대찬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며 말했다.
“인생이 참 쉽게 느껴지지?”
“그럴 리가요. 지금도 간신히 이겼잖아요.”
도진석 전무의 안면근육이 경직되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면 산소가 모자란 법이야. 조심해.”
“그러게요. 전무님께는 다행이네요. 질식사하실 뻔.”
대찬의 냉랭한 응수에 도진석 전무가 걸친 가짜 웃음이 일순 일그러졌다.
“너, 이 새끼……!”
“웃으세요. 이미지라도 건져 가셔야지.”
대찬은 흔들던 도진석 전무의 손을 탁, 뿌리치고는 연단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대의원들은 박수로 환영해주었다.
대찬은 대의원들을 모아놓은 앞에서 짧게 당선소감을 발표했다.
“모자라고 어린 사람을 조합장으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합원 분들의 이익이 최대한 구현되도록, 또 우리 회사의 이익이 최대한 구현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조합원들은 빠른 박자의 박수갈채로 대찬의 당선을 축하해주었다.
대찬은 먹구름이 잔뜩 낀 도진석 전무의 얼굴을 흘끗 보고는 말했다.
“저와 선의의 경쟁을 펼쳐주신 도진석 전무님께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전무님.”
박수소리를 등에 업은 대찬의 인사치레에, 도진석 전무는 속이 마구 뒤집히면서도 가까스로 웃어 보였다.
그는 뻣뻣한 웃음을 지으며 대찬을 향해 목례했다.
대찬은 대의원들에게 말했다.
“전무님께서는 저에게 조합장 자리를 양보하셨지만, 당신께서 말씀하셨듯 연륜과 카리스마가 넘치시는 뛰어난 재목이십니다.”
대찬은 도진석 전무를 띄워주었다.
“마냥 이대로 빈손으로 되돌려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즉석으로 제안합니다.”
대찬은 도진석 전무 쪽으로 몸을 틀면서 말했다.
“저는 도 전무님께서 우리사주조합의 이사로 우리 조합에 공헌해주셨으면 하는데, 대의원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의원 여러분은 별 생각이 없었지만, 막 선출된 조합장의 뜻이니 박수로 성의를 보였다.
그 자리에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했던 송희근 과장이, 마찬가지로 그와 나란히 앉은 한태윤 과장에게 물었다.
“뭐야? 기껏 살을 발라놓고 이사 자리를 주겠대?”
“멕이는 거죠.”
“…멕여?”
한태윤 과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진석 전무가 저 제안을 날름 받아서 조 차장님 밑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없어 보입니까? 저건 확인사살일 뿐입니다.”
“아, 상사 믹서기 더러운 성질머리 어디 안 가는구만.”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도진석 전무에게 말했다.
“저와 대의원 여러분의 뜻을 받아주시죠, 전무님.”
그 말에 도진석 전무는 입술을 꽉 깨물고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연단으로 걸어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마이크를 잡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말했다.
“우리 조대찬 조합장님과 대의원 여러분의 뜻은 기쁘게 받겠습니다. 그러나 모자란 제가 이사로서 기여할 바는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 현명한 이사를 선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도진석 전무는 그렇게 말하고 물러났다.
대찬이 다시 말했다.
“전무님께서 겸손으로 사양하시니, 더 권할 수 없겠습니다. 전무님의 말씀대로, ‘더 현명한’ 이사를 선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진석 전무가 꽉 깨문 입술에서는 이제 피가 터져 나왔다.
이것으로 대찬은 필래 비바체의 첫 번째 우리사주조합장으로 선출되었다.
대찬은 이제 서원웅과의 인연으로 얻은 사내 영향력을 제하고도, 독립적인 자격만으로 0.25퍼센트만큼의 영향력을 확보했다.
0.25퍼센트의 지분은 어떻게 보면 한 줌에 불과했다.
그러나 낡은 창도 조자룡의 손에 들어가면 백만 대군을 헤치고 아두를 구하는 법.
0.25퍼센트 한 줌 영향력이 대찬의 손에서 어떻게 튀겨질지 알 수 없었다.
대찬의 조합장으로서의 첫 행보는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0.25퍼센트는 주주제안 행사요건에 필요한 지분을 턱걸이로 통과한 수치였다.
대찬은 주주총회에 참석하여, 우리사주조합장으로서의 존재감을 발했다.
“저는 우리 회사의 우리사주조합장으로서, 성낙재 사외이사의 연임을 건의합니다.”
대찬이 그렇게 말하자, 사회를 맡은 서원웅이 대답했다.
“성낙재 사외이사 연임의 건을 주주총회 안건으로 상정합니다. 반대의견 있으신 분은 거수해주십시오.”
사외이사 선임에 시시콜콜 따지고 드는 사람은 없었다.
서원웅은 물 흐르듯 진행했다.
“반대의견이 없다면, 박수로 의결하겠습니다.”
주주들은 가벼운 박수로 사외이사의 연임을 의결했다.
이건 쎄쎄쎄만큼 단순한 연극이었다.
하지만 보는 관점에 따라 평가는 달라졌다.
최재한은 이 일상적인 일화를 사건으로 둔갑시켜 보도했다.
-‘우리사주조합’의 힘으로 사외이사 연임…서원웅發 ‘상생경영’ 실험 첫 선
주주총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월요일.
대찬의 팀원들은 쌍수를 들고 그의 당선을 축하했다.
“축하드립니다, 조합장님!”
“감사합니다, 다들. 어깨가 무겁네요.”
“저희가 무거운 어깨 좀 가볍게 해드려요?”
“어떻게요?”
“오늘 소고기를 쏘시면 됩니다.”
“어떻게 된 게 우리 팀원들 결론은 항상 기승전 소입니까?”
“그래서 안 쏘시겠다는 겁니까?”
“…쏴야죠.”
“벽제관?”
송희근 과장이 실실 웃으며 선을 넘자 대찬이 쏘아봤다.
“미국산이라도 한번 쏘시고 벽제관 얘기를 하세요.”
“아, 하하…….”
대찬은 송희근 과장의 곤란한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참에 여태 얻어 드시기만 한 우리 송 과장님 어깨도 가볍게 해드릴까요?”
“어, 어어?”
“송 과장님이 저랑 더치페이 하면 벽제관으로 갑니다.”
그러자 눈치 빠른 팀원들이 얼른 송희근 과장을 찬양하고 나섰다.
송희근 과장의 동공이 마구 흔들렸다.
결국 대찬과 송희근 과장의 지갑에만 구멍이 뚫리고, 팀원들만 실컷 배를 불렸다.
여윳돈이 많은 대찬이야 관계없었다.
하지만 송희근 과장은 달랐다.
아내에게 바가지가 긁힐 걸 생각하니 앞길이 막막해졌다.
혁신경영팀의 회식은 1차로 빠르게 끝났다.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문화는 아니었다.
그저 맛있는 거나 배불리 먹고 간단히 반주 정도 즐기면 대체로 혁신경영팀의 회식은 마무리되었다.
간혹 술이 미치도록 당기는 사람 몇몇만 따로 무리지어 2차를 갔다.
보통 2차는 송희근 과장이 주도적으로 선동하기 마련이었는데, 그는 이날 술맛이 똑 떨어져 있었다.
대찬이 그의 사정을 감안해 삼분의 일만 내라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그에게는 피눈물 나는 지출이었다.
이쯤 되니 대찬이 다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죄송해요, 과장님…….”
“아, 아니, 뭐… 죄송할 거 뭐 있습니까…….”
“다음부터는 과장님한테 이거 사라 저거 사라 안 할게요.”
“…….”
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송희근 과장의 상태가 이러니 2차는 흐지부지되었다.
그렇게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민승기였다.
대찬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선배.”
“회사냐?”
“아뇨, 회식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인데요.”
그 말에 민승기가 장난조로 힐난했다.
“선배는 눈이 빠져라 일하고 이제 퇴근하는데 공동대표라는 분은 하하호호 회식이나 하고 있었단 말이야?”
“아이고, 고생하셨습니다.”
대찬은 그렇게 말하곤 손목시계를 흘끗 봤다.
오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대찬은 살짝 놀라며 민승기에게 물었다.
“지금 10신데 여태 회사에 계셨어요?”
“응, 요새 갑자기 일이 더 많아져서.”
“요즘 같은 불황에 일 많은 게 복이라지만…….”
“너, 한강 넘었냐?”
“이제 넘으려고 하는데요.”
“돌려. 나랑 맥주나 한잔 하자.”
“조금만 일찍 말씀해주시지.”
“지금까지 일했다고 했냐, 안 했냐.”
말이 궁해진 대찬은 민승기의 말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요. 사무실 근처로 갈게요. 대신 오늘 선배 집에서 자고 갑니다.”
“왜? 멀쩡한 윤이영 씨 집 놔두고. 우리집이나 그분 집이나 거리가 거기서 거긴데?”
대찬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런 헛소문은 어디서 들으셨어요?”
“조대찬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는 거 보니까 헛소문은 아닌 거 같은데?”
“암튼 근처 가서 전화 드릴게요. 끊어요.”
대찬은 택시를 다시 강남 쪽으로 돌렸다.
둘은 자리도 없이 피자에 맥주를 파는 주점에서 만났다.
앉지도 못하고 서서 먹어야 되는 곳임에도 손님들이 바글바글했다.
대찬은 그곳에 도착해 얼굴을 찡그렸다.
“왜 이런 불편한 곳으로 부르셨어요?”
“좋잖아? 시끌벅적하고 미국 온 것 같고.”
“그래도 다리 아픈데요.”
민승기는 탁자에 몸을 지탱하며 웃었다.
“우리처럼 사업하는 사람들은 트렌드를 잘 알아야 돼. 계속 이런 거 귀찮아하면 나중에 동떨어진다고.”
“동떨어지고 말지. 계속 이렇게 서있으면 관절 떨어지겠어요.”
“누가 들으면 환갑은 된 줄 알겠다.”
그 말을 듣고 대찬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삶하고 지금을 더하면 얼추 쉰은 되는구나.’
곧 피자가 나왔다.
한 조각씩을 주문했는데, 조각이 워낙 커서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었다.
서 있는 게 불편하다고 툴툴거리던 대찬도 치즈가 길게 늘어나는 피자를 우물거리더니 불평이 사라졌다.
짭짤하고 약간 매콤한 맛이 도는 페퍼로니와 고소하게 퍼지는 치즈의 풍미가 좋았다.
거기에 입 안 가득 퍼진 느끼한 기운을 시원하게 씻겨주는 맥주를 곁들이니 금상첨화였다.
대찬은 윗입술에 묻은 맥주거품을 슥 닦으며 웃었다.
“맛집이네요. 선배가 잘 고르셨네요.”
“맥주도 맛있지?”
“네, 잘 왔어요.”
“그래, 이 정도 불편은 감수할 만하다니까.”
민승기는 흡족하게 웃었다.
“근데 선배 요즘 너무 몸을 혹사하시는 거 아니에요? 매일 10시 넘어서까지 일하시면 몸이 안 남아나실 텐데.”
“그게 어쩔 수 없어. 이번에 인도네시아 쪽에서도 원두 왕창 들여오기로 했거든.”
“잘됐네요.”
민승기는 피자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잘되기야 했는데, 너무 잘돼서 문제야. 인력이 감당이 안 된다니까.”
“이거 참, 제가 사표라도 내야 하나 싶네요.”
“그건 안 되지. 그럼 괘씸하다고 필래 쪽에서 채널 다 날려버릴 텐데.”
대찬은 꿀꺽꿀꺽 맥주를 마시고 말했다.
“제가 뭐 도와드릴 거라도 없어요? 평일은 어렵지만 주말에는 최대한 시간 내볼게요.”
“무리할 거 없는데.”
“선배도 무리하고 계신데 저라고 무리 안 할 순 없죠. 대표랍시고 통장에 월급 꼬박꼬박 박히잖아요.”
한 번의 사양에도 대찬이 재차 괜찮다고 하자, 민승기는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