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55화
오후 5시쯤이 되자, 잠잠하던 현관문이 열렸다.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뜻밖의 손님에 당황한 눈치였다.
대찬이 급히 해명했다.
“도둑이나 강도는 아니니까 안심해요, 학생.”
“누구세요.”
그렇게 묻는 말에는 호의도 적의도 없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할머님께서 시장 오셨다가 길을 잃으셔서, 제가 모셔다드렸어요.”
“아, 그럼 사례 받으시러…….”
대찬은 곰팡이가 잔뜩 슨 벽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무슨 일로 여태 저희 집에 계셨어요?”
학생의 말은 똑 부러졌다.
대찬의 대답은 간단했다.
“식사나 같이 할래요? 내가 친구가 없어서 밥을 혼자 먹어야 되거든.”
“아저씨가 사주시는 거예요?”
“내가 벌써 아저씨 소리 듣는 나이가 됐네. 그래요. 내가 살게요. 할머님 뭐 좋아해요?”
“대게요.”
“대게…….”
“치아가 안 좋으셔서 고기 같은 건 잘 못 드시거든요.”
“그래요. 갑시다, 대게 먹으러.”
학생은 예의상이라도 이런 제의를 거절하지 않는 성격인 듯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 저녁 먹으러 나가자. 오늘 외식이야.”
“수혁아! 버터코코넛 먹어!”
노인은 수혁이라고 불린 손자를 뒤늦게 확인하고 눈을 번쩍 뜨며 외쳤다.
수혁은 으레 있는 일인 듯 덤덤하게 과자를 받았다.
“고마워요.”
“많이 먹어. 할머니가 또 사다줄게, 응?”
“사다주는 거 아니면서.”
“사다줄게, 사다줄게.”
“알았으니까 일단 밥 먹으러 가요.”
수혁은 조심히 할머니를 부축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대찬을 돌아보며 덤덤히 물었다.
“안 가세요? 대게 사달라니까 갑자기 저랑 밥 먹기 싫어지셨어요?”
“아, 아니. 가자.”
웬만해서 주눅 드는 법이 없는 대찬이 어쩐지 저 로봇 같은 남학생 앞에서는 말까지 더듬었다.
노인은 먹성이 좋았다.
수혁이 살을 발라주는 족족 아기 새처럼 받아먹었다.
벌써 씨알 굵은 대게 세 마리가 완전히 해부되어 껍데기만 남았다.
한창 때의 사춘기 남자애야 말할 것도 없었다.
하필 대게 시세가 천정부지로 치솟은 때였다.
메뉴판의 ‘싯가’라는 글씨가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대찬은 대게 다리를 깨작이며 무표정하게 대게를 학살하는 수혁에게 물었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
수혁은 대찬을 흘끗 보고 속사포처럼 말했다.
“어른들이 저한테 물어보는 질문들은 지극히 한정적이라서요. 시간낭비 안 하게 제가 먼저 다 답을 드릴게요.”
“어? 그, 그래.”
“이름은 고수혁이에요. 부모님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할머니 밑에서 컸어요. 공부 잘해요. 반에서 1등이고 전교 5등이에요. 장래희망은 뭐든 돈 잘 버는 직업이고요. 여자 친구는 대학 가서 사귈 거고요. 교우관계 원만하고 게임중독 아니에요.”
“…그렇구나.”
“취미는 독서고요, 만화책은 잘 안 보고 철학부터 생물학까지 독서편식 안 하려고 노력해요. 대학은 고대나 연대 가고 싶고요. 서울대가 등록금이 싸서 원래 죽을힘을 다해서 가려고 했는데, 국가장학금 생겨서 고대나 연대 가도 등록금 걱정은 없을 거 같아요.”
“…그래.”
“더 물어보실 거 있으세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하고 싶은 질문에는 하나도 해당 안 되는데요?”
“뜻밖이네요. 물어보세요.”
“버터코코넛. 할머님이 애지중지하시던데.”
“그걸 빼먹었네요. 치매 걸리시기 전에 할머니 기억에 깊이 박혀 있는 제품이거든요, 저게.”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고수혁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어렸을 때 일인데요.”
‘지금도 어린데…….’
대찬은 불필요한 생각은 말로 뱉지 않았다.
고수혁은 말을 이었다.
“제가 저 과자가 너무 먹고 싶어서 훔쳤거든요. 슈퍼 주인한테 걸려서 도망쳤어요. 근데 끝까지 쫓아오데요. 결국 잡혔어요.”
“음.”
“할머니 앞에서 흠씬 혼났어요. 부모가 없으니 애가 이 모양이다, 할망구라도 똑바로 교육시켜라, 애한테 도둑질시키면서 못 사는 티 내지 마라.”
대찬은 안쓰러운 웃음도 짓지 못했다.
“그분이 너무 과하셨네.”
“틀린 말은 아니죠.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도둑질 안 했으면 그런 말 들을 일도 없었으니까.”
“…….”
고수혁은 할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술 옆에 묻은 음식을 닦아주고 말을 이었다.
“그때 너무 충격이 크셨나 봐요. 다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세요. 부모 없는 애한테 부모구실을 제대로 못해서 이런 사달이 났다고.”
“…….”
“치매로 다른 기억은 다 잊으셨는데 제가 손자라는 사실, 그리고 저 과자는 잊지 않으셨어요.”
“그랬군요.”
고수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찬에게 처음으로 보이는 표정이었다.
“할머니가 돈도 없으시면서 어떻게 과자 갖고 오시는지 잘 알아요. 도둑질해서 그렇게 된 건데, 할머니가 오히려 지금 도둑질하고 계시죠.”
“아니, 꼭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죠. 적어도 오늘은 제가 사드린 거니까.”
“고맙습니다. 저렇게 과자 갖고 오시는 날에는 제가 다시 가서 꼭 값 치르고 와요.”
고수혁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다가, 빈 접시를 보고 다시 게의 다리살을 발라주었다.
대찬은 그 모습을 감정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기특하네요.”
“그 기억은 저한테도 아픈 경험이니까요. 아무리 배고파도 도둑질은 절대 안 해요.”
고수혁은 그렇게 말하고 대찬을 바라봤다.
“대답이 됐죠?”
“네, 그럼 하나만 더 물어볼까요.”
“그러세요.”
대찬은 홍은주에게 귀띔했던 것을 고수혁에게 일러주었다.
고수혁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딱히 실효성은 없는 거 같은데 괜찮네요. 실적이 없어도 광고는 될 테니까요. 필래는 항상 치매환자와 실종아동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하하……. 꽤 냉철하시네요.”
“더 물어보실 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그래야 대게 값을 조금이라도 갚죠.”
“아니, 꼭 갚는다고 생각할 건 없고요. 그럼 수혁 군에게 필요한 사회공헌사업은 뭐가 있을까요?”
고수혁은 이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했다.
“저한테는 끼니 해결하는 게 가장 큰일이에요. 수급비가 나오지만 할머니 약값만으로도 버거우니까.”
“그렇겠죠.”
“급식카드라고 해서 끼니 먹으라고 나라에서 돈을 줘요. 고마운 일이죠. 근데 취급하는 곳이라고 해봤자 편의점뿐이고, 금액도 적어요.”
“그렇군요.”
“뭐,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지만 굳이 저한테 무슨 사업이 좋냐고 물으시니까 대답하는 거예요. 끼니 걱정, 그게 제일 커요.”
대찬은 잠깐 고심하다가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요? 그 금액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도시락.”
“저야 반갑죠. 하지만 편의점 도시락을 금액에 맞춰서 출시하는 전략이라면 별로 추천은 안 드려요.”
대찬은 이 어린 소년에게 도리어 과외를 받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죠?”
“우리 같은 애들, 밥 굶는 주제에 또 자존심이 있거든요. 급식카드라고 떡하니 적힌 카드 내미는 게 쉽지만은 않아요. 나 거지새끼요, 광고하는 거 같거든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마세요. 으레 그러잖아요.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빠르게 달리는 기차는 작은 돌멩이 하나만 튀어도 치명적이잖아요. 막 나가는데 쉽게 상처받는 시기예요, 이 나이가.”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나쁘게 안 봐요. 그럼, 배달을 해주면 어떨까. 사전에 신청을 받아서.”
“그럼 그게 수익성이 있겠어요? 광고효과보다 돈이 더 들 거 같은데.”
“꼭 그런 것만 따지고 하는 사업이 아니거든요, 이거는.”
“그래요? 다들 속물인 줄 알았는데 가끔 아닌 분들도 계시나 봐요.”
거침없는 고수혁의 말에 대찬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혹시 장학금 받을 생각 없어요?”
“주면 받죠. 주시게요?”
“학생 정도의 친구면 충분히 자격이 되는 것 같아서.”
고수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운이 좋네요. 아저씨 같은 분을 만나서 대게도 먹고, 장학금 얘기도 듣고.”
“단순히 운만 좋은 게 아니죠. 기회가 온다고 누구나 잡는 게 아니잖아요. 낚시를 할 때 아무리 큰 고기가 지나가도 큰 고기를 위한 낚싯대가 준비되지 않으면 못 낚는 법이거든.”
“그렇군요.”
“수혁 군이면 우리 회사 장학재단에서 딱 원하는 인재상이에요. 연락 넣어둘게요.”
“고맙습니다.”
대찬은 할머니와 손자의 배를 양껏 불려주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는 헤어지기 전에 고수혁과 연락처를 교환했다.
“종종 연락해도 돼요?”
“원조교제, 뭐 이런 거 아니죠?”
엉뚱한 소리에 대찬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쪽이 여학생도 아니고.”
“성적지향은 다양한 거니까요.”
“절대 아니니까 걱정 말고요. 수혁 군이 똑 부러지니까 종종 의견 좀 구하려고.”
“저한테 끝까지 반말 안 한 어른은 아저씨가 처음이에요. 저도 예의바른 어른 좋아합니다.”
대찬은 하하 웃으며 고수혁과 헤어졌다.
할머니에게도 손을 한참 잡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끝까지 대찬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대찬은 돌아가는 길에 필래 인 마켓 흥읍시장점에 들렀다.
세 번째 대찬을 맞이하는 직원은 이제 별로 긴장하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세요, 차장님?”
“배달주문 좀 하려고.”
“네?”
“버터코코넛 세 박스만 이 주소로 배달해줘요.”
“아…….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사비로 버터코코넛 세 박스를 구입해서 고수혁의 집으로 보내주었다.
고수혁은 과자를 받자마자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고맙습니다.
그 다섯 글자에서 고수혁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대찬은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대찬은 회사로 돌아와 자신이 고안한 치매환자·실종아동을 임시로 보호하는 ‘우리동네 등대’ 사업과 고수혁의 자문을 받은 결식아동·청소년을 위한 ‘찾아가는 끼니’ 사업을 동시에 추진했다.
‘우리동네 등대’ 사업은 별다른 비용이 들어가지 않아 바로 관철되었다.
필래 비바체는 경찰청과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서로 연계하기로 했다.
‘찾아가는 끼니’ 사업은 필래 비바체의 투자를 받아 로튼 프룻츠에서 주관하기로 했다.
로튼 프룻츠는 웜샤인 시절 구축된 인프라를 통해 이 사업을 추진해나갔다.
필래 비바체는 우리동네 등대 사업과 찾아가는 끼니 사업을 보도자료를 배포하여 홍보했다.
목표한 만큼의 성과는 있었다.
필래 비바체는 ‘착한 기업’으로서의 이미지를 유지했다.
서원웅 역시 개인의 브랜드 색깔을 더 선명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로튼 프룻츠는 사업을 대행하는 대가로 적정한 이윤을 얻었다.
필래기획 산하의 따빛은 부랴부랴 이를 벤치마킹해서 이런저런 사업들을 벌였다.
광고로 먹고 사는 필래기획이니 구색은 제법 훌륭하게 갖췄다.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한 웜샤인에 비해 따빛의 초짜들이 만들어낸 작품은 영 어설펐다.
결국 로튼 프룻츠를 흉내 내려던 따빛의 처녀작은 흐지부지되었다.
로튼 프룻츠 사회공헌사업부문 직원들은 웜샤인의 폐업으로 한동안 강제적인 휴식을 취해왔다.
그런 그들이 오랜만에 뼈 빠지게 일했다.
민승기와 대찬이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건 만족스러운 야근수당과 인력충원의 약속이었다.
그렇게 사회공헌사업들을 그들에게 당부한 대찬은 필래 비바체의 업무에 열중했다.
그가 필래 인 마켓을 점검하러 갔던 건, 전국 재래시장에 포진한 필래 인 마켓을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새벽배송의 디딤돌로 삼기 위해서였다.
필래 인 마켓에는 신선식품이 확보돼있지 않았으므로, 재래시장에서 신선식품을 취급하는 점포와 일일이 계약을 체결하여 애로사항을 해소하고자 했다.
서원웅은 대찬을 불러 말했다.
“택배사업부가 보유한 물류창고를 거점기지로 삼고, 필래마트와 필래 인 마켓 점포를 최전방으로 삼아 이제 본격적으로 새벽배송을 시작할 거야.”
“초반의 적자는 감수해야겠지만, 시장점유율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면 비바체를 먹여 살릴 수 있을 겁니다.”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래페이도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으니, 이 두 가지를 결부시키면 시너지가 훨씬 클 거야.”
“점유율을 끌어올려 수익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가야죠.”
서원웅은 만족스러운 듯 얼굴에 웃음기를 띠었다.
“그러려면 인프라를 더 속도감 있게 확충해야 해.”
“네, 그렇죠.”
“나도 이쪽저쪽 바쁘게 움직이면서 투자를 유치하려고 하고 있어.”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알죠. 그래도 노력이 빛을 발해서 다행입니다. 우리 회사의 미래를 보고 적극적으로 투자하려는 돈다발들이 많으니까요.”
“외부에서 투자를 유치하는 동시에, 우리 내부에서도 자금을 조달하면 어떨까 하는데.”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부에서요?”
“응, 우리사주조합을 설립해줬으면 하는데.”
우리사주조합은 임직원들이 회사와 협의를 거쳐 결성, 자사주의 지분을 보유해 경영에 참여하도록 하는 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