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54화
대찬은 혈혈단신으로 필래 인 마켓의 한 점포로 향했다.
점포에는 사전에 공지하지 않았다.
날것의 현장을 봐야만 뜬구름을 잡지 않는다.
대찬은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흥읍시의 필래 인 마켓을 찾았다.
필래마트가 고작 점포 한 곳이었던 시절.
닉네임 양반후반, 본명 고숙희와 연대하여 원영맘을 축출한 무용담의 현장이었다.
필래 인 마켓 흥읍시장점은 필래마트 흥읍점과는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그런 덕분에 고객층이 많이 겹치는 편은 아니었다.
대찬은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흥읍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장 입구가 좁아서 배송기사가 왔다 갔다 하면 상인연합회에서 클레임 걸겠는데.’
대찬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수첩에 깨알 같은 글씨를 적었다.
‘신선식품은 상인들과 콜라보를 해서 함께 취급하면…….’
대찬은 생각나는 대로 수첩을 꼼꼼히 채웠다.
대찬은 그렇게 쉬지 않고 펜대를 놀리며 필래 인 마켓 흥읍시장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맨 처음 맞은 건 어서 오세요, 직원의 인사가 아니라 떠들썩한 소란이었다.
“아, 좀 가시라니까요!”
“버터코코넛 줘! 버터코코넛!”
“드릴 테니까 돈 달라고요, 돈. 돈을 주셔야 버터코코넛이든 맛동산이든 갖다 바칠 거 아녜요!”
“버터코코넛 줘!”
“허, 나 참 진짜!”
직원은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등이 구부정한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 때문에 말다툼을 하느라고 흥읍시장점 직원들은 대찬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직원은 큰 목소리로 또박또박 외쳤다.
“할머니! 저번에도 드렸고 저저번에도 드렸잖아요! 오늘은 공짜 안 돼요! 돈 갖고 오세요, 돈!”
“돈 없어! 버터코코넛 줘!”
“아, 증말 미치겠네!”
직원은 머리를 막 쥐어뜯었다.
대찬은 개입하지 않고 우선 관망했다.
상황은 빨리 파악되었다.
저번에도, 저저번에도 그랬다는 걸로 봐서 노인의 억지는 한두 번의 일이 아닌 듯했다.
“할머니, 이거, 이거 드릴 테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네?”
직원은 유통기한이 거의 끝나가 미리 진열대에서 빼낸 듯한 과자를 노인의 품에 안겨주며 읍소하듯 말했다.
노인은 그걸 들고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빠다! 코코! 낫!”
“버터코코넛은 안 돼요!”
“줘!”
“안 돼요!”
깐깐한 본사 직원이라면 저런 대응방식에 낙제점을 줬을지도 몰랐다.
짧지 않은 시간 이어지는 실랑이에 다른 고객들이 불편을 감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찬은 저런 대응방식을 어느 정도 이해는 했다.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오니 대응하는 직원 쪽에서도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연신 외쳐대는 ‘버터코코넛’을 그냥 공짜로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직원의 말을 들으면 공짜로 과자를 주었더니 오히려 노인을 더 집요하게 만든 듯했다.
직원은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허리가 새우처럼 굽은 노인이었다.
부상을 입을까 함부로 내쫓을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의 그를 대찬이 구원해주었다.
대찬은 할머니 대신 천 원짜리 한 장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 과자, 제가 대신 사드릴게요.”
“네? 아…….”
직원은 그제야 다소 안도하며 바코드를 찍었다.
대찬은 무릎을 살짝 굽히며 노인에게 과자를 건넸다.
“자, 버터코코넛 여기 있어요.”
“…….”
노인은 대찬의 손에서 휙 과자를 낚아채고 대찬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리고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휘적휘적 매장을 떠났다.
직원은 자기가 다 민망해져 대찬에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 저러세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암튼 감사합니다, 손님. 덕분에 오늘은 이쯤에서 끝나서.”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명함 한 장을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손님은 아니고요. 본사 혁신경영팀 조대찬 차장이라고 합니다.”
“아? 아… 아!”
직원은 상황을 파악하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마, 말씀은 몇 번 들었습니다. 저, 점장님 모셔올까요?”
“제 얘기 들을 일이 뭐가 있어요?”
“왜 없겠어요. 여기로 납품하러 오시는 협력업체 직원 분들부터 여기 흥읍시 아주머니들까지 이따금씩 조 차장님 말씀을 하시던데요.”
대찬은 빙긋 웃었다.
“그랬나요.”
“아, 아무튼 죄송합니다. 방금 전의 상황은 매뉴얼에 없어서 대응이 부적절했습니다.”
“아닙니다. 돌발 상황에 아무렇지 않게 대처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직원은 머쓱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으면서도 안심했다.
깐깐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사실이 본사에 바로 알려져 곤란해졌을 것이다.
대찬은 개의치 말라며 그를 다시 한 번 안심시키고, 매장을 둘러보았다.
대찬이 본사 직원 치고 인간적이라도 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직원은 대찬의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혹여 트집을 잡히지 않을까 긴장했다.
그의 걱정과는 달리 대찬은 아무 말 없이 수첩에만 몇 줄 글귀를 끄적였다.
그게 또 신경 쓰여서 직원은 은근슬쩍 까치발을 들며 글씨를 읽으려고 했다.
‘날려 써서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네…….’
대찬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빙긋 웃었다.
“걱정할 거 없어요. 그냥 참고삼아 몇 자 적는 거니까. 매장에 불이익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 옙.”
대찬은 그렇게 매장을 더 둘러보고, 직원에게 물었다.
“근데 저 할머님은 자주 오시나 봐요?”
“네?”
“버터코코넛.”
“아… 네, 좀 골치 아픈 분이세요.”
“말씀이 잘 안 통하시던가요?”
직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셔서.”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뇨?”
“확실하진 않지만 치매기가 좀 있으신 거 같아요.”
대찬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고생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수고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차장님.”
직원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찬을 전송했다.
대찬은 차를 타고 흥읍시장을 빠져나왔다.
허구한 날 찾아와 버터코코넛을 외치는 노인은 분명 매장의 입장에서는 그저 블랙컨슈머일 뿐이었다.
대찬 역시 허구한 날 그녀를 상대하는 입장이라면 연민보다는 악감정이 앞설 것이었다.
그러나 최전방에 있지 않기에, 그에게는 악감정보다 연민이 앞섰다.
대찬은 씁쓸한 마음을 안고 운전했다.
그때 대찬의 시선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뒷모습만 보고도 대찬은 알아차렸다.
“그 할머니잖아.”
대찬은 천천히 속력을 줄였다.
할머니는 달팽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 우뚝 제자리에 멈춰 섰다.
대찬의 차도 함께 멈췄다.
그녀는 당황한 듯 사방을 둘러봤다.
우두커니 선 채로 갈 곳을 몰라 했다.
대찬은 차에서 내려 그녀를 태우려고 했다.
안전띠를 끄르는 순간, 그녀의 걸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대찬은 손목시계를 흘끗 바라봤다.
아직 시간은 넉넉했다.
대찬은 그녀가 집을 잘 찾아가도록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런데 그녀의 발걸음이 멎은 곳은 집이 아니었다.
다시 필래 인 마켓 흥읍시장점이었다.
할머니가 다시 돌아오자 직원은 울상부터 지었다.
“할머니! 버터코코넛 아까 가져가셨잖아요!”
“…라.”
“네? 뭐라고요?”
“집이 어딘지 몰라.”
“왜 몰라요.”
“몰라! 왜 모르는지 몰라!”
노인의 떼쓰는 듯한 목소리에 직원은 넌덜머리가 났다.
“아악! 진짜! 할머니, 일부러 나 괴롭히려고 치매 걸린 척 하는 거죠, 맞죠!”
“…….”
가뜩이나 몰려드는 손님들로 눈코 뜰 새 없던 직원이었다.
할머니의 등장이 반가울 리 없었다.
대찬이 할머니의 뒤를 따라 매장 안으로 들어왔다.
직원은 그를 발견하고 허리를 꺾었다.
“아, 아아, 뭐 놓고 가신 거라도 있으세요?”
“아뇨, 어르신이 여기로 오셔서.”
“네? 어르신한테 볼 일 있으세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댁으로 돌아가시려던 거 같은데 다시 여기로 오셔서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가 해서.”
대찬은 그렇게 대답하고 노인의 등을 살짝 매만지며 물었다.
“할머니, 댁이 어딘지 모르시겠어요?”
“몰라, 어딘지 몰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과자를 쥔 손에 힘을 꼭 주었다.
대찬은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직원에게 말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경찰서에 연락 좀 해주세요. 할머님 댁에 좀 모셔다드려야지.”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노인의 손을 붙들고 조심스럽게 카운터에 마련된 간이의자로 이끌었다.
“어르신, 여기서 잠깐만 쉬고 계세요. 댁에 모셔다드릴게요.”
대찬이 그렇게 말하며 노인을 조심스럽게 의자로 유도하자, 노인은 대찬의 손길을 매섭게 뿌리쳤다.
“버터코코넛 내 거야!”
“당연하죠. 당연히 어르신 거죠. 저기 쉬고 계시면 제가 버터코코넛 하나 더 사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노인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경찰을 기다리는 동안, 대찬이 직원에게 물었다.
“이렇게 길 잃은 분들이 종종 오시나요?”
“치매노인 분들은 많이 안 계시고요, 길 잃은 애들이 오는 경우는 제법 있습니다.”
“아무래도 근방에서 친숙한 공간이니까.”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 시골지역은 더할 거예요. 거기는 편의점도 없으니.”
“그렇겠군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에 경찰이 도착했다.
그들은 노인을 대동하고 자택으로 향했다.
대찬은 생각하는 바가 있어 그들과 동행했다.
노인의 집은 주변에 낡은 염색공장이 즐비한 곳의 한 다세대주택이었다.
경찰은 뒤따라온 대찬을 보고 물었다.
“가족 분 되십니까?”
“아뇨, 할머님 혼자 계시면 또 길을 잃으실까 해서요.”
그러자 경찰은 대찬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폈다.
대찬은 웃으면서 명함을 꺼내주었다.
로튼 프룻츠 대표 직함이 쓰여 있는 명함과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장 직함이 쓰여 있는 것, 두 개를 모두 내밀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회공헌사업을 구상하는 데 아이디어 좀 얻으려고 그럽니다.”
“뭐… 이 정도 되시는 분이 쓸데없는 짓은 안 하겠죠.”
“쓸데없는 짓을 할 사람이어도 경찰 분들한테 눈도장 찍히고서도 그러겠습니까.”
“모쪼록 손자 올 때까지 어르신 좀 잘 돌봐주세요. 이 어르신, 우리 단골이거든요.”
얼마나 자주 이랬으면 보호자가 손자뿐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대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대찬은 노인을 소파에 앉혔다.
“어르신, 손주 분 있으세요?”
“…….”
노인은 경계심 가득한 눈빛만 대찬에게 뿌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품에는 ‘버터코코넛’을 꼭 껴안고 있었다.
대찬은 편안한 웃음을 짓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홍은주 주임이 받았다.
“홍 주임, 흥읍시장점 둘러보고 문서로 정리해서 메일로 보냈으니까 확인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들어오시나요?”
“아뇨, 사회공헌사업 관련해서 알아볼 게 있어서요.”
“네? 어떤…….”
“필래 인 마켓이 길 잃은 치매노인 분들을 임시로 보호하고 경찰과 연계해서 안전히 귀가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를 제공했으면 해요.”
“아, 검토해볼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소도시의 중심지에 매장이 있는 경우가 있으니까 실효성이 있을 겁니다. 아울러 길 잃은 아동도 마찬가지로.”
“경찰 측과 연계만 잘 하면 되는 부분이라 들어가는 비용도 크지 않을 듯합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터 리서치 좀 해서 보고서로 꾸려보세요. 리스크가 적으니 아마 오케이 사인 나올 겁니다.”
“네, 개요 완성해서 허 과장님께 드리겠습니다.”
“아뇨, 그러실 거 없어요. 홍 주임이 맡아서 해줘요.”
“네? 제가요?”
“슬슬 대리 다실 때 됐잖아요. 그거 건수로 삼아서 이번에 대리 답시다.”
“아…….”
“그리고 허운한테 맡기느니 홍 주임이 해주는 게 백 번 안심돼요.”
홍은주는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감사합니다, 차장님.”
“홍 주임은 꼭 일 떠넘기면 감사한다더라.”
대찬과 홍은주는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