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53화
대찬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이 웜샤인에서 받으시던 연봉의 80퍼센트 수준을 보장하겠습니다. 대리급 이하는 90퍼센트까지 보장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박 부장을 비롯한 웜샤인 출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대찬은 말을 이었다.
“해외영업을 해보셨거나 외국어능력이 탁월하시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진행되는 파푸아뉴기니 커피 수입사업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그쪽으로 전환해드리죠. 단 세 명까지만.”
“김 과장이 영어랑 일어에 능통하고 장 대리가 상사한테 찍혀서 이쪽으로 넘어오기 전에 필래상사에서 근무했고요.”
박 부장이 첨언하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김 과장님과 장 대리님은 관심 있으시면 따로 말씀을 주세요. 물론 그 외의 분들도요.”
“알겠습니다.”
“본봉은 이 정도이지만 중소기업의 장점이자 단점이 예산을 오너가 떡 주무르듯 한다는 거잖습니까. 민 대표님이 인재대우에 인색하신 편은 아니니 최대한 편의를 봐주실 겁니다.”
“장담은 못하지만 그렇게 노력하죠.”
민승기는 웃으면서 대찬의 말을 선선히 인정했다.
맹윤주는 새로 동료가 된 이들을 향해 사근사근 웃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많이 배우겠습니다.”
“아, 저희야말로…….”
금세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민승기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여러분 안 오시면 어쩌나 걱정 엄청 했습니다. 당연히 오실 줄 알고 공실로 오래 있던 옆 호실 덜컥 계약해놨었거든요.”
“선배, 뭘 그렇게 서둘렀어요?”
“나는 네가 만난 자리에서 당연히 다 구워삶았을 줄 알았지. 누가 그렇게 배짱이나 퉁퉁 튀기고 오래!”
“하하…….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잘됐으니 됐죠, 뭐.”
대찬의 머쓱한 웃음을 보고 박 부장이 말했다.
“사실 저희가 점심시간 넘겨서 온 것도, 조 차장, 아니 조 대표님이 미워서 골탕 좀 먹이려고 그랬던 겁니다.”
“조대찬은 좀 당해봐야 정신을 차려요. 이때까지 일이 너무 쉽게 풀리니까 똥배짱만 늘어서.”
“뭐…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닌 거 같습니다.”
대찬을 놀리는 데 민승기와 박 부장은 죽이 잘 맞았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요. 맘대로 씹고 뜯고 하세요. 회사의 단합을 이룰 수만 있다면야…….”
로튼 프룻츠는 이로써 총 열다섯 명의 임직원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했다.
박 부장이 말했던 김 과장, 장 대리에 더해 우 주임이 기존의 커피 수입 업무에 투입되기로 결정되었다.
나머지 아홉 명이 웜샤인에서 보던 업무를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로튼 프룻츠는 커피 수입과 제품기획, 거기에 각종 사회공헌사업을 병행하는 기이한 형태의 회사로 진일보했다.
기존의 로튼 프룻츠 업무를 진행하는 인원은 일단 영리사업부라는 이름으로 묶여 민승기가 지휘했다.
웜샤인의 업무를 진행하는 인원은 사회공헌사업부라는 이름으로 묶이고, 박 부장을 박 이사로 진급시켜 일임했다.
웜샤인의 사업을 로튼 프룻츠가 맡게 되자, 자연히 웜샤인의 제품생산의뢰를 받던 수영실업과도 다시 교류하게 되었다.
그 사이 나이를 먹은 오광훈 사장은 은퇴했다.
후임으로 대찬과 함께 일을 했던 오찬식 팀장이 회사를 물려받았다.
“이야, 이게 얼마만이야.”
“대학 신입생 때 아무것도 모르고 업무 보조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요.”
“파릇파릇하던 학생 조대찬이 언제 이렇게 닳고 닳은 회사원이 됐을까 싶네.”
“저도 팀장님이 어엿한 사장님 되신 걸 보고 감개가 무량합니다.”
오찬식 사장은 흐흐 웃었다.
“이제는 내가 굽실거려야 하는 입장이네. 역시 그때 우리 회사에 눌러 앉혔어야 했어.”
“하하, 저희가 수영실업에 아쉬운 입장이죠. 수영실업만큼 솜씨 좋은 업체도 드무니까요.”
“웜샤인의 폐업이 아쉽긴 하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반갑기도 해.”
“왜요?”
“다시 조 차장 아니, 조 대표하고 일할 수 있게 됐잖아?”
대찬은 피식 웃었다.
“공치사가 너무 심하세요.”
“아, 공치사 아니야. 진심이라니까.”
“저도 사장님과 같이 일하게 돼서 기쁩니다.”
“하하, 그런 의미에서 오늘 소주나 한잔 하자고. 딱 오늘만 옛날 생각하면서 야, 너 하자. 내일부터는 깍듯이 대표님으로 모실 테니까.”
“계속 야, 너 하셔도 괜찮은데요.”
오찬식 사장은 대찬의 어깨를 매만지며 고개를 저었다.
“허물없는 비즈니스는 준비된 새드엔딩이야. 지킬 것 지켜야 오래간다.”
“새겨 들을 게요.”
대찬과 오찬식 사장은 서로를 보면서 웃었다.
자리에는 둘만 참석하지 않았다.
다른 반가운 얼굴들도 동석했다.
“이거 몇 년 만인지 모르겠슴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늙으셨슴다.”
“진위생 씨.”
대찬은 반갑게 진위생과 악수를 나눴다.
진위생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대찬을 향한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출세하셨단 소리는 들었슴다.”
“예전에 비하면 출세했죠. 그래도 앞으로는 진위생 씨한테 잘 보여야 돼요. 수영실업하고 다이렉트로 일하게 됐거든요.”
“암튼 우리 조대찬 대표님 마음보 의뭉한 건 알아줘야 해요. 잘 보일 마음도 없음서.”
“의심 많으신 건 여전하시네. 가끔 우리 사무실 와서 중국어 과외나 해줘요.”
“과외비는 시간 당 삼겹살 1인분으로 쳐주기요.”
“알았어요.”
대찬은 성 부장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대찬이 수영실업에서 일하던 때는 성 대리였던 사람이었다.
그가 수영실업에서 일하게 된 것도 출산휴가로 인해 잠깐 회사를 쉬게 된 그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였다.
“영준이는 잘 크고 있죠?”
“그럼요. 내년에 중학교 들어가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네요.”
영준이는 대찬이 수영실업에서 일하던 당시 성 부장의 태중에 있던 아이였다.
성 부장은 짓궂은 목소리로 말했다.
“영준이 과외 해준다던 약속 기억나요? 내년에 중학생인데 아직까지도 구구단 하는 데 손가락 쓴다니까.”
대찬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요. 성 과장님이 일방적으로 강요하신 거지.”
“야박해요!”
성 부장이 장난스럽게 투정을 부리자 오찬식 사장이 슬며시 그녀를 타박했다.
“성 부장이 조 대표님 심기 거슬러서 우리랑 재계약 안 하겠다고 하면, 책임질 거예요?”
“사장님은 여태 조 대표님 성격도 모르세요? 조 대표님이 그런 쪼잔한 찌질이일 리가 없잖아요.”
대찬은 기분 좋게 웃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제법 긴 시간 술을 마셨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다시 일할 수 있다는 기쁨은 대찬을 하룻밤 취하게 만들기에 족했다.
서승학의 필래기획은, 웜샤인을 폐업해놓고 보란 듯이 새로운 사회적 기업을 자회사로 설립했다.
소식은 비바체 혁신경영팀에도 전해졌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회사 이름이 뭐래요?”
“따빛이래요. ‘따뜻한 빛’ 줄임말이라나.”
오다혜의 대답에 송희근 과장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냥 웜샤인을 우리말로 풀고 그냥 멋대로 줄인 거잖아?”
“완전 성의 없죠.”
송희근 과장은 미간에 팍 주름을 잡으며 툴툴거렸다.
“아니, 기껏 폐업해놓고 이제 와서 새로 만드는 건 무슨 심보야?”
그 말에 한태윤 과장이 말했다.
“그간 서원웅 대표님의 이미지 제고에 기여했던 웜샤인을 없애고, 대신 자기 브랜드를 드높일 회사를 경영하겠다는 거죠.”
“아니 그러면 사람만 물갈이하지.”
“웜샤인에 속속들이 서원웅 대표님 사람들이 박혀 있잖습니까.”
“으음…….”
“식빵에 곰팡이 피면 그냥 버리고 새 거 사지, 일일이 곰팡이 핀 부분 떼어내고 먹진 않잖습니까.”
의자에 몸을 묻은 채 말을 아끼던 대찬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서 대표님을 띄우려는 단순한 의도로 웜샤인과 사업을 추진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건 오히려 부산물이었죠.”
한태윤 과장의 말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위선과 가식은 들킬 수밖에 없어요. 서승학 사장의 얄팍한 의도가 머잖아 마각을 드러내게 될 겁니다.”
“따빛, 성의 없는 이름만큼 서승학 사장의 사업이란 것도 성의 없을 겁니다.”
송희근 과장은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차장님은 바빠지시겠습니다?”
“네?”
“웜샤인이 로튼 프룻츠의 산하로 들어갔으니까요. 이제 단순한 협업이 아니라 업무를 주도할 위치에 계시잖습니까.”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네, 그렇죠. 따빛에 대항해 사회공헌사업을 진행하는 건 로튼 프룻츠 대표로서도, 비바체의 차장으로서도 중요하니까요.”
“기대됩니다. 어떤 사업으로 서승학 사장의 콧대를 꺾어놓으실지.”
대찬은 송희근 과장을 가볍게 질책했다.
“위선과 가식은 들킬 수밖에 없다고 방금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저희 사업은 서승학 사장의 콧대를 꺾으려고 벌이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 그 의도가 없진 않을 것 아닙니까.”
송희근 과장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대찬은 입술을 살짝 비틀었다.
“그래요, 맞아요. 됐습니까?”
“솔직하시니 얼마나 좋아요? 아니라고 잡아떼시는 것도 위선과 가식에 포함되는 거예요.”
“네, 네, 제가 졌습니다.”
대찬은 피식 웃었다.
송희근 과장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따빛이 서승학 사장을 띄워주는 것 이상으로, 로튼 프룻츠가 역할을 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놈들처럼 서원웅 우상화 작업을 벌이진 않을 거야.’
대놓고 쪼이는 스포트라이트는 촌스럽다.
어디까지나 로튼 프룻츠의 사업목표는 소외된 사람들.
서원웅과 비바체는 그 곁불을 쬐는 정도가 돼야만 한다.
그래야 세련되고 은근하다.
“따빛을 견제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 일에 소홀하면 안 되죠.”
허운의 말이었다.
대찬은 그를 웃는 낯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허 과장님이 웬일이실까? 그런 의젓한 말씀도 다 할 줄 아시고.”
“너무 무시하지 마시죠. 저도 1인분은 합니다.”
“어련하실까.”
허운은 찌릿 눈빛을 한번 쏘고는 말했다.
“차장님이 건의하셨던 사업이 곧 선보일 거라고 하던데요.”
“무슨 사업?”
“그건 본인이 건의한 사업이 워낙 많아서 무슨 사업인지 모르겠다고 자랑하시는 거죠.”
그 말에 허운의 부인이자 대찬의 동기인 유채경이 쏘았다.
“사람이 왜 그렇게 배배꼬였어요?”
“지, 지금 누구 편을 드는 거야.”
“편은 무슨. 말이 되는 시비를 걸어야 동조해주든 하죠.”
대찬은 웃음을 흘리며 유채경을 추켜세웠다.
“역시 유 대리는 공과 사를 잘 구분하신다니까. 허 과장도 좀 저런 멸사봉공의 정신, 본받으면 안 될까?”
거기에 유채경이 한 술 더 떴다.
“그리고 자랑이 아니라 사실이잖아. 조 차장님이 건의하고 추진한 사업이 어디 한두 개야? 으이구, 허 과장님은 한두 개라도 추진해보고 그런 시비를 거세요.”
“역시 기수가 같은 값이면 유 대리를 과장으로 올렸어야 하는 건데. 인사팀이 눈이 삐었지.”
허운의 귀가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어, 어쨌든 필래 인 마켓을 새벽배송 물류기지로 이용하는 건이에요.”
“음, 전국에 있는 택배집하장이 중간기지 역할을 해주긴 하지만 전국 각지 재래시장에 있는 필래 인 마켓이 가지는 강점이 분명하니까.”
“네, 추진한 지는 몇 년 됐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는 모양이에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마다 인터넷으로 쇼핑하는 고객들이 눈에 띄게 늘고 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혁신경영팀에서 필래 인 마켓의 배송시스템을 더 효율적으로 개선할 방안을 강구해보라고 옥 상무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지. 마침 우리한테 굵직한 이슈 없었죠?”
대찬의 물음에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처리하는 업무들은 비교적 가볍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송 과장님과 김 대리, 오 대리, 홍 주임이 기존 업무를 봐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한 과장님, 허 과장, 유 대리는 저랑 같이 점포들 좀 돌아보는 걸로 하시죠. 현장을 봐야 답이 나오니까.”
유채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팀은 어떻게 짤까요?”
“전부가 같은 동선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죠. 각자 권역을 정해서 움직입시다.”
유채경이 대찬에게 물었다.
“혼자 다니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래도 차장님 위신이 있는데 혼자 운전까지 하시면서 움직이시는 게.”
그 말에 대찬은 경악했다.
“유 대리, 왜 그래. 나 유 대리랑 동기거든요.”
“그래도…….”
대찬은 질색했다.
“꼬붕 없이는 못 돌아다니는 유치한 임원들이랑 나를 같은 취급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 대리가 그러면 어떡해?”
“하하… 노파심에 여쭤본 거예요. 죄송합니다.”
그러자 허운이 끼어들었다.
“역시 제가 유 대리 제치고 과장 된 이유가 있죠? 모름지기 승진하려면 상사의 마음을 잘 읽어야 되는데 저는 조대찬심리학 박사잖아요.”
대찬은 혀를 찼다.
“당신은 꼭 건수 잡아서 마누라 면전에서 망신을 줘야 속이 풀려?”
“아니, 아까는 멸사봉공의 정신 어쩌고 하시더니?”
“잘못도 아닌 잘못, 감싸줄 필요는 없지만 굳이 헐뜯는 게 잘한 일이야? 조대찬심리학 박사시라면서 이럴 줄 몰랐어요?”
“…….”
한태윤 과장은 아웅다웅하는 사람들이 그저 귀여운 듯 미소만 지었다.
대찬은 허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말했다.
“자, 그럼 움직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