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50화
그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만약 그녀와 그녀의 집안이 아니었다면 서청규를 꺾고 대권을 잡으리라 장담하지 못했다.
백양옥 여사는 단순히 내조만 전담하는 가정주부가 아니었다.
그녀 역시 필래그룹의 경영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주요 계열사에는 그녀 혹은 그녀가 쥐고 흔드는 단체가 상당한 주식을 갖고 있었다.
만일 백양옥 여사가 작정하고 서청수 회장의 뒤를 후린다면.
서청수 회장의 공고한 체제도 마냥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글라스에 각얼음을 담고 위스키를 담아 대번에 들이켰다.
‘승학이가 잘하면 내가 이렇게까지 하겠냐고.’
마냥 서원웅을 아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서청수 회장은 서승학과 서원웅이 치열하게 경쟁하기를 바랐다.
선의의 경쟁 같은 유치한 건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을 받아 이를 바득바득 갈며 치고 올라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서원웅이 성장하는 만큼 서승학이 따라오질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서청수 회장은 두 번째 잔을 역시 대번에 넘겼다.
공복에 스민 독주 때문에 속이 쓰렸다.
속이 쓰리기로 치자면 서청수 회장보다 서승학이 더했다.
서승학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했다.
“이런 개잡놈의 새끼가 어딜 슬금슬금 기어올라…….”
곽동성 필래푸드 사장은 서승학과 자주 만났다.
그는 서청규 사장의 심복이자 서승학의 핵심적인 지지자였다.
서청규 사장과 서승학은 공개적으로 만나기 곤란한 처지였다.
아무리 서승학이 망나니라지만 정도가 있었다.
서청규 사장과 대놓고 접촉해서 서청수 회장의 심기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곽동성 사장이 대체로 서승학과 서청규 사이를 오가며 가교 역할을 했다.
서승학은 곽동성 사장 앞에서 한참을 광분했다.
곽동성은 으레 있는 일인지라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마냥 화만 내실 일이 아니에요. 긴장하셔야 합니다.”
“긴장? 무슨 긴장이요? 저까짓 것한테 내가 왜 긴장을 해요?”
“서원웅이 대두하는 건 현실입니다. 받아들이셔야죠.”
서승학은 곽동성 사장에게 눈을 흘겼다.
“이봐요, 곽 사장님. 적당히 합시다. 사람 성질 건드리지 말고.”
“…….”
“그놈이 얼마나 잘난 줄은 모르겠는데, 지분싸움 세력싸움으로 가면 날 이길 수가 없어요.”
“그거랑 별개로 그룹을 감당할 그릇으로 성장하셔야죠.”
서승학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적당히 합시다. 지금 두 번째 말해요.”
“그러죠.”
곽동성 사장은 얕은 한숨을 쉬며 다른 곳을 바라봤다.
서승학은 곽동성 사장의 심기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제 할 말만 했다.
“그런 하나마나 한 소리는 관두시고, 서원웅 그 새끼 엿 먹이게 머리 좀 짜 봐요.”
“…알겠습니다.”
곽동성 사장의 조언은 서승학에 의해 바로 결행되었다.
그 소식은 대찬을 비롯한 필래 비바체 사람들에게도 즉각 전해졌다.
대찬은 업무협의 차 여러 번 연락을 나눴던 웜샤인의 박 부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웜샤인의 원년멤버로, 대찬의 대학시절부터 소통하던 사이였다.
“조 차장님, 우리 어떡합니까?”
“무슨 일 있어요?”
“필래기획에서 수익부진으로 우리 회사를 폐업하겠답니다.”
그 말에 대찬은 잠깐 두뇌활동이 정지되는 기분이었다.
“웜샤인을요? 웜샤인은 사회적 기업입니다. 사회적 기업에 수익부진을 운운해요?”
“저희도 당연히 그렇게 항의했습니다만…….”
“먹힐 리가 없었겠죠.”
“예.”
서승학이 웜샤인을 폐업시킨 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웜샤인은 필래기획의 산하에서 출범했지만 궤는 필래 비바체와 함께했다.
게다가 웜샤인의 주류를 이루는 직원들도 비바체 이전에 에피니키온 시절의 대찬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다 서승학이 필래기획의 사장으로 부임했다.
웜샤인의 고난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모회사인 필래기획으로부터의 일체의 지원이 차단되었다.
웜샤인은 풍랑을 헤쳐 나가는 돛단배처럼 위태롭게 나아갔다.
그렇게 간신히 유지되던 웜샤인의 숨통을 서승학은 아예 잘라버렸다.
박 부장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모회사가 자회사 직원들의 고용을 승계할 의무는 없다더군요. 전원 실직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서승학 그 인간, 진즉 알아보긴 했지만 생각보다도 단순무식하군요.”
“서원웅 대표님이 적수로 성장하니 서 대표님께 도움이 되는 채널은 다 깨부수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폐업해버리면 후폭풍이 클 텐데. 웜샤인의 사업으로 혜택을 보는 분들이 많잖습니까.”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겠죠. 서원웅 대표님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 이외에는.”
“내 살을 깎아서라도 남의 뼈를 부수겠다는 건가요. 별로 좋은 전략은 아닌 듯한데.”
“그만큼 원한이 사무쳤다는 것이겠죠.”
대찬은 얕은 한숨을 토했다.
“일단 박 부장님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 차장님만 믿겠습니다.”
“네, 지금 웜샤인은 서류에서 없어진 것뿐입니다. 어떤 방식이든 꼭 되살리겠습니다.”
“모쪼록 잘 좀 부탁드립니다.”
“대표님께 강력히 건의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러지 않아도 대표님이 현명하게 판단하시겠지만요.”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다른 직원 분들께도 잘 전해주십시오. 비바체에서 책임지겠다고.”
“그러겠습니다.”
대찬은 전화를 끊고 바로 서원웅을 찾아갔다.
서원웅 역시 소식을 듣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돼?”
“망나니칼춤이요.”
서원웅은 헛웃음을 지었다.
“맞네.”
“일단 서승학 사장의 행보보다도 웜샤인 직원들, 그리고 기존의 수혜자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차라리 비바체 산하에 사회적 기업을 하나 더 만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그 안을 포함한 모든 방법을 강구해봐. 혁신경영팀에서 맡아서 처리해줘. 나도 이 이슈를 1번으로 놓고 할 테니까.”
“그러죠.”
대찬을 비롯한 비바체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대책을 고심했다.
그런데 필래기획 쪽에서는 곧바로 후속공격을 개시했다.
그걸 알아챈 건 대찬이 인연을 맺었던 한마음양파영농조합의 전화를 받았을 때였다.
그들은 대찬과 결연하면서 웜샤인의 사업대상에 속해 있었다.
한마음조합의 도진애는 대찬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웜샤인에서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어요.”
“예? 뒤통수라뇨?”
“조 차장님한테도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도진애의 목소리는 살짝 격앙되어 있었다.
매사에 차분한 그녀이니, 저 정도로 동요한다는 건 분노가 꽤 깊다는 뜻이었다.
대찬은 차분하게 응대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습니다.”
“오해라뇨?”
“필래기획 측에서 일방적으로 폐업을 결정했습니다.”
“필래기획 측이요? 어쨌든 필래잖아요?”
도진애의 말에 대찬은 둔기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도진애처럼 도움을 받다가 일방적으로 차단당한 쪽에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지원이 끊겼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지금껏 웜샤인의 활동으로 이미지 제고의 이익을 봤던 건 서원웅과 필래 비바체였다.
그러니 활동의 중단으로 벌어지는 손해 역시 고스란히 그들의 몫이었다.
대찬은 꽤 긴 수고를 들이고 나서야 도진애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도진애는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분들은 전부 웜샤인이 필래 이미지는 실컷 끌어올려놓고 이제 와서 발 뺀다고 말이 많아요.”
“웜샤인의 폐업으로 무산된 사업은 저희 측에서 이어받을 겁니다. 당장의 불편은 감내하셔야 하지만 금세 원상복구 될 겁니다.”
“오해는 풀렸는데 다른 분들까지 납득시키려면 애 많이 쓰셔야겠어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험악한 형제사이가 애먼 쪽에 피해를 끼쳤네요. 죄송합니다.”
“아뇨… 무턱대고 예민하게 굴어서 제가 죄송하죠.”
도진애처럼 성숙한 사람들만 있다면 진땀 좀 빼고 말았겠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곳간에서 인심 나온다고 했다.
당장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들은 참을성이 없었다.
이 때문에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하려는 혁신경영팀 직원들은 빗발치는 항의를 먼저 감당해야만 했다.
서승학 쪽의 끄나풀 역할을 하는 기자들이 필래기획 측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기사로 내보냈다.
-‘착한 사장’ 서원웅, 단물 빠지니 사회적 기업 ‘팽?’
-서원웅 주도했던 사회적 기업 ‘폐업’…진정성 의심
서원웅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을 수밖에 없다.
서승학이 내팽개친 웜샤인을 잘 이끌어 성공적으로 사업을 진행해온 죄밖에 없다.
그런데 단물만 빨아먹었다느니, 진정성이 의심된다느니 하는 언론의 공세는 억울하기만 했다.
대찬은 차분하게 서원웅에게 말했다.
“폐업처분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서승학의 필래기획 측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일이라고 보도자료 배포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폐업한 웜샤인을 인수해 새로 사회적 기업을 출범시킬 거라는 점도 강조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찬은 발 빠르게 언론전에 나섰다.
서승학을 직접 타격할 순 없었다.
이런 낭설을 유포한 건 표면적으로는 언론.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서원웅이 서승학을 때리는 순간 패륜의 프레임이 씌워질 터.
대찬은 해명에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 서승학은 단단히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항상 서원웅 측보다 한 발이 빨랐다.
그들은 서원웅 측의 행보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의혹을 부풀렸다.
서승학의 돈을 먹은 기자들은 다시 앵무새처럼 조잘거렸다.
-필래기획 산하 웜샤인, ‘실질적’ 사장노릇은 서원웅이?…고심 끝 폐업결정 이면엔
-‘서원웅 계’ 웜샤인 직원들, 한 줌 수익금으로 방만 경영 의혹 불거져
사실관계를 조금만 들춰도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기자들은 교묘하게 편집하여 서원웅을 공격하는 데 이용했다.
연일 말도 안 되는 공격이 이어졌다.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운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얘네 완전 미친 거 아닙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지껄여대는데 부끄럽지도 않은 거예요?”
“부끄럼을 아는 종자들이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겠지.”
송희근 과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해서 얻을 게 뭐 있다고. 1면에 대문짝만 하게 걸리는 것도 아니고 단신으로 찔끔찔끔.”
그 말에 한태윤 과장이 반응했다.
“그게 더 문제인 겁니다.”
“응? 어째서?”
“차라리 1면에 떴으면 첨예한 진실공방으로 끌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공격에 우리가 욱해서 달려들면 판만 뛰어드는 꼴입니다.”
“그래도 억울한 건 적극적으로 해명해야지!”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되면 완벽히 저쪽 술수에 말려드는 거예요. 구조상 우리가 무조건 불리해요.”
“예? 거짓말은 저쪽이 하고 있는데 왜 우리가 불리합니까?”
“이런 자질구레한 사건에 우리가 아무리 설명해봤자 대중은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복잡하거든요.”
“허, 이런 얄팍한 거짓말을 홀라당 믿는단 말이에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서원웅이 착한 일을 많이 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나쁜 놈인 편이 더 재미있거든요.”
“사람을 재미로 평가하나?”
“다들 그러잖아요? 모 연예인이 성추행을 했다더라. 사람들이 이것저것 재가면서 욕하던가요?”
“…아뇨, 그냥 덮어놓고.”
“성추행을 했어야 재미있으니까 덮어놓고 욕을 하죠. 똑같아요.”
송희근 과장은 꽁한 얼굴로 꿍얼거렸다.
“하긴. 우리 동창 중에 돈 떼먹고 야반도주했다는 소문이 돌아서 실컷 욕했는데, 알고 보니 떼돈 벌어서 이민 간 거더라고요.”
“우리가 적극적인 해명을 할수록 저쪽이 깔아놓은 판만 키워주는 격이에요. 일단 자중해야 합니다.”
“저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반박하면 저쪽도 피해를 입지 않겠어요?”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구조상 우리가 불리하다고 한 건 다 이유가 있어요.”
“무슨 이윤데요?”
“서원웅을 아는 사람들은 다 천사표라고 해요. 근데 서승학은 어때요?”
“뽕쟁이에 난봉꾼에 망나니.”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털이 말끔한 개랑 이미 온몸에 똥이 묻은 개가 진흙탕에 뒹굴면 누구 손해일까요?”
송희근 과장은 입을 살짝 내밀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그러네요.”
“서승학은 정통성과 세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어요. 다만 회장님의 의중이 서원웅 대표님 쪽으로 약간 기울어있을 뿐이죠.”
송희근 과장은 코를 매만지며 말했다.
“서원웅 대표에게 계속 흠집을 내면 서청수 회장도 마냥 총애하진 않을 것이다?”
“서원웅을 흔들어보려는 거죠. 여기서 아마추어처럼 대응하면 결국 그릇을 드러내는 거니까.”
송희근 과장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이대로 당하기엔 너무 억울해요!”
오다혜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