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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47화 (246/556)

난 할 수 있어 247화

대찬은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윤이영 씨, 자요?”

“…안 자요.”

“이제 그만 일어나죠. 여기서 더 마시면 취해요.”

그러자 윤이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대찬을 바라봤다.

“집에 가게요?”

“네, 택시 태워드릴게요.”

윤이영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었다.

그녀는 치렁치렁 내려온 옆머리를 뒤로 넘기며 대찬을 바라봤다.

“지금 들어가면 안 돼요.”

“네?”

윤이영의 눈에 힘이 살짝 돌아왔다.

“오늘 화장 빡세게 했잖아요.”

“그런데요?”

“꼭 지우고 자야 되는데 이대로 들어가면 바로 엎어져 잘 게 뻔하거든요?”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술이라도 깨고 들어가시죠.”

“요 앞에 청계천이니까 잠깐 걷다가 가요.”

“그러시죠, 그럼.”

대찬은 기우뚱거리며 일어나는 윤이영을 부축해주었다.

그러면서 가볍게 타박했다.

“술 정도는 컨트롤하신다면서요?”

“이 마당에 꼭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셔야겠어요?”

“술 드시니까 더 사나워지시네.”

윤이영은 대찬을 찌릿 쏘고는 그의 팔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상쾌한 공기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윤이영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네, 걱정 마세요.”

윤이영은 대찬과 나란히 씩씩하게 걸었다.

청계천까지는 지척이었다.

금세 인공하천의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불빛이 있었지만 한밤의 청계천은 대체로 어두웠다.

거기에 행인은 대체로 연인들이었다.

그러니 누군가가 윤이영을 알아보고 둘의 시간을 방해할 확률은 적었다.

둘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걸었다.

여름의 한가운데였지만 밤에는 제법 쌀쌀했다.

대찬은 자꾸 윤이영의 화려한 파티복장이 가려주지 못하는 하얀 어깨가 신경 쓰였다.

대찬은 위에 입은 재킷을 벗어 윤이영의 어깨에 얹어주었다.

윤이영이 대찬을 올려다봤다.

“저 괜찮은데.”

“보는 제가 신경 쓰여서 그래요. 날이 춥잖아요.”

윤이영은 웃음을 띠었다.

“고마워요.”

“제 옷도 아닌데요, 뭐.”

머리카락이 흔들릴 정도의 바람이 한번 불자, 대찬의 몸에도 살짝 닭살이 돋았다.

대찬은 벗어주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윤이영은 기분 좋게 웃으며 대찬이 걸쳐준 옷을 꼭 쥐며 앞으로 여몄다.

그러다 흐르는 개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대찬을 돌아봤다.

“원래 물가에 앉아서 맥주 한 캔 딱 해줘야 되는데.”

“안 돼요.”

대찬이 단호하게 말하자 윤이영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나도 안다구요. 그럼 우리 바나나우유라도 먹을래요?”

“바나나우유는 생각도 못했네요. 좋죠. 술하고 커피만 아니면.”

“커피는 왜요?”

“이 밤에 마시면 잠 안 오니까.”

윤이영은 웃었다.

“하긴 그렇네요. 그럼 제가 바나나우유 사올게요.”

“됐어요. 술도 적잖이 올랐는데 그냥 앉아있어요.”

윤이영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그럼 같이 가요.”

“그것도 싫어요.”

윤이영은 기어코 대찬을 물가에 앉혀놓고 혼자 편의점으로 향했다.

물가에 내놓아진 건 대찬이었는데, 대찬은 오히려 윤이영이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불안했다.

다행히 윤이영은 무사귀환, 그런 대찬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윤이영은 바나나우유에 빨대를 꽂아 대찬에게 내밀었다.

“잘 마실게요.”

“아까 10만원 가까이 나왔잖아요. 보답이라고 하기엔 너무 양심 없지만, 어쨌든 보답이에요.”

“충분해요, 이 정도면. 그리고 오늘 나랑 놀아줬잖아요. 이영 씨 아니었으면 아주 외로울 뻔했어.”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

둘은 물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았다.

그리고 나란히 빨대로 바나나우유를 쪽쪽 빨아마셨다.

윤이영은 한 입 가득 바나나우유를 머금었다가 삼키고 옆에 내려놨다.

그녀는 무릎을 자기 쪽으로 당겨 팔로 감쌌다.

그렇게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흘려 내보내듯 말했다.

“좋네요.”

대찬은 윤이영을 흘끗 보고 다시 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좋네요.”

“대찬 씨 알게 되고 나서 모든 게 좋아요. 고마워요.”

“고맙긴요. 이영 씨가 모든 게 좋아지는 시점에 저를 알게 된 거뿐이에요.”

“꼭 일 얘기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럼요?”

“줄리아를 알게 되고, 파푸아뉴기니라는, 대찬 씨 아니었으면 가볼 엄두도 못 내볼 나라도 가보고요.”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그건 그러네요.”

“또 혼자였으면 쭈뼛거리면서 자리만 지키고 있었을 오늘 같은 행사에도 담력 좋게 땡땡이 쳐보고.”

“어째 듣자하니 제가 범생이한테 일탈 강요하는 양아치 된 느낌인데요.”

윤이영은 피식 웃었다.

“좋잖아요. 제가 이때까지 해본 일탈은 공부 접고 배우 하겠다는 거 하나뿐이었거든요.”

“그게 어떻게 일탈이에요. 훌륭한 선택이지.”

“부모님한테는 일탈을 넘어선 배신이었거든요. 지금까지 키워준 은혜를 한 순간에 저버리는 배신.”

“지금은 대견하게 여기실 거예요.”

윤이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뇨, 여태 연락도 안 닿는 걸요. 아무리 잘 나가도 그분들한텐 일개 딴따라라서. 혹은 발랑 까진 년.”

“윤이영 씨 부모님이면 아직 환갑도 안 되셨을 텐데 그런 케케묵은…….”

“마인드가 꼭 나이 따라가는 건 아니니까요.”

대찬은 안쓰럽게 웃었다.

“부모님께서 막연한 오해가 있으신 듯하네요. 누구는 배우 못 돼서 안달인데.”

“공부 잘하는 점잖은 숙녀로 자라서 번듯한 집안 내조하는 게 최고라고 하셨거든요.”

대찬은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뭐, 다 맞는 말씀이라고 쳐도 그건 부모님의 생각이죠. 본인 인생은 본인이 결정하고 개척하고 책임지면 그만이에요.”

“그러게요. 그 간단한 생각을 납득시키지 못해서 여태 이러고 있네요.”

윤이영은 눈두덩에 살짝 고인 물기를 잽싸게 손등으로 훔치고 웃었다.

대찬은 부러 못 본 척 해주었다.

“부모님하고 그렇게 척지고, 회사는 내 편이 아니고, 친구들은 또 각자 살림살이가 팍팍하니까 어쩔 수 없이 멀어지고, 그래서 외로워지고……. 아,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닌데.”

대찬이 보탤 수 있는 건 옅은 웃음뿐이었다.

윤이영은 한숨을 쉬려다 도로 삼키고 말했다.

“아무도 내 편이 없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대찬 씨를 알았는데, 대찬 씨한테는 작은 인연일지 몰라도 저한테는 큰 기쁨이었어요.”

“저한테도 이영 씨는 큰 기쁨이에요. 절대 작은 인연이라고 생각 안 해요.”

윤이영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살짝 갖다 댄 채로 대찬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암튼 고맙다고요.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대찬 씨처럼 말주변이 없어서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어요.”

“앞으로도 쓸데없는 말 많이 해주세요. 듣기 좋아요.”

“듣기 좋기는.”

“정말인데요?”

“안 믿어요.”

대찬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왜 안 믿어?”

“비바체의 왕차장 조대찬 씨의 사탕발림은 절반이 영업용이니 걸러 들으라고 단단히 주의 받았어요.”

“어떤 나쁜 놈이 그 따위 음해공작을 해요? 누구야?”

“허 과장님이라고……. 아, 이거 얘기하지 말랬는데.”

윤이영은 아차, 하며 황급히 바나나우유를 쪼로록 빨아마셨다.

대찬은 놀랍지도 않다는 반응이었다.

“그 양반은 내일부터 회사 다니기 싫어질 겁니다.”

“별명이 상사믹서기인데, 사실은 상사든 부하든 닥치는 대로 갈아 마신다고도 하셨거든요. 이제 보니 맞는 말씀만 하시는 거 같은데요.”

“그래요, 나보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허 과장을 더 믿는다 이거죠?”

“아니, 그게 아니고……!”

대찬은 오랜만에 잡은 건수를 놓치지 않았다.

“아까는 큰 기쁨 어쩌고 하더니, 누가 영업용 사탕발림인지.”

“아주 신나셨네요, 신났어.”

“그러게 누가 먼저 공격하래요?”

“부하직원 관리를 잘하셨어야죠. 오죽하면 허 과장님이 그런 말씀을 다해요?”

“됐습니다.”

“흥, 저도 됐거든요?”

둘은 서로를 보며 킥킥거리고는 다시 물을 바라봤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흐르는 검은 물만 바라봤다.

적잖은 시간이 지나자 대찬의 어깨에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대찬이 그녀를 내려다보니, 윤이영의 머리가 대찬의 어깨에 살짝 닿아있었다.

대찬은 그 모습을 빤히 보다가 윤이영의 어깨에서 흘러내린 재킷을 다시 당겨 올려주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으며 윤이영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녀가 다시 눈을 뜬 건 30분은 족히 흐른 뒤였다.

“…나 잤어요?”

“네, 마침 팔이 저려오던 참인데 딱 깨셨네요.”

윤이영은 민망하게 웃었다.

“깨우시지.”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요. 행사 때문에 아침부터 밤까지 고생하셨잖아요.”

“죄송해요.”

“죄송은요. 자,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윤이영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요.”

그렇게 일어나서 청계천을 떠나 대로변으로 나가려는데, 대찬은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음?’

어쩐지 누군가에게 노려지는 느낌.

대찬이 멈칫하자 윤이영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뇨, 아닙니다. 가시죠.”

“네.”

“시간이 늦었으니까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아뇨, 피곤하실 텐데.

윤이영은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말은 이기적으로 나왔다.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택시로 움직일 건데요. 가시죠.”

대찬은 윤이영과 택시를 잡으러 걸어가는 와중에도 찝찝한 느낌을 떨치지 못했다.

하지만 윤이영에게 괜한 불안감을 심어주지 않으려 내색은 하지 않았다.

대찬과 윤이영은 나란히 택시 뒷좌석에 앉았다.

윤이영의 집은 성수동에 있었다.

“뭘 자꾸 흘끔흘끔 뒤돌아봐요?”

“아녜요.”

대찬은 종로에서 성수동까지 차량 한 대가 따라붙는 걸 감지했다.

찝찝한 느낌이 단순한 느낌으로만 머물지는 않았다.

윤이영의 집은 성수동 골목의 한 다가구주택이었다.

그 앞에 택시가 멈췄는데, 대찬은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잠깐만 더 앉아있을게요.”

윤이영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왜 그래요?”

“아녜요. 일단 가만히 계셔보세요.”

윤이영은 살짝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택시 안에 있으니, 뒤따라오던 차량은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차에서 누구도 내리지 않았다.

“들어가시죠.”

“…네.”

“윤이영 씨, 저 대문까지만 바래다드려도 될까요?”

“네? 아, 네…….”

대찬은 기사에게 요금보다 만 원을 더 얹어주면서 말했다.

“기사님, 여기서 잠깐만 더 기다려주세요.”

“예, 그러죠.”

대찬은 윤이영과 함께 택시에서 내렸다.

연식이 제법 된 다가구주택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출입하는 전체현관은 없었다.

대찬은 건물 안으로 한 발짝 들어가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이영 씨는 올라가세요.”

“아, 네… 근데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예요?”

“네.”

“대찬 씨 표정이 그게 아닌데.”

“누가 따라붙은 거 같거든요. 좋은 일로 따라붙진 않았겠죠. 윤이영 씨가 여기 있어봤자 좋을 거 하나 없어요. 일단 올라가요.”

윤이영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대찬은 윤이영에게 집안으로 들어가라고 했지만 윤이영은 그러지 않았다.

대찬만 덩그러니 놔두고 집안으로 들어가기에는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혹여 누군지 모르는 불한당의 눈에 띄어 대찬에게 부담만 가중할 수 있는 터.

윤이영은 층계를 반쯤 올라가 몸만 숨기고 아래쪽으로 귀를 쫑긋 세웠다.

대찬은 출입구의 바로 옆에 팔짱을 낀 채로 서있었다.

그렇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으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입질이 왔다.

어떤 남자가 출입구 안으로 쑥 들어왔다.

혹여 자취를 놓칠세라 서두르는 품이었다.

대찬은 그를 발견하자마자 촉수를 뻗어 먹이를 덮치는 문어처럼 재빨리 팔을 뻗었다.

그의 목을 팔뚝으로 조이며 순식간에 제압해냈다.

“윽! 뭐, 뭐야!”

놈은 사지를 허우적거렸지만 대찬의 힘을 극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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