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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46화 (245/556)

난 할 수 있어 246화

서청수 회장은 준비해온 말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모름지기 큰일을 하려면 현명한 반려자를 만나야 합니다. 아쉽게도 우리 숙맥 같은 아들은 경영능력은 일취월장인데 이런 부분에서는 영 미진하더군요.”

서청수 회장은 내빈석 첫째 줄의 누군가를 바라봤다.

“그런 아들을 아비 된 마음으로 돕고 싶었는데, 마침 오늘 이 자리에도 참석해주신 홍구완 극동일보 사장님과 의기투합을 했지 뭡니까. 홍 사장님.”

서청수 회장이 내빈석 첫째 줄의 홍구완 사장을 호명하자 그가 일어났다.

대찬은 돌아가는 상황을 종잡을 수 없었다.

홍구완 극동일보 사장은 연단 위로 올라왔다.

서청수 회장은 그에게 마이크를 양보했다.

“안녕하십니까, 홍구완입니다. 주저리주저리 길게 떠들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로 홍구완 사장을 주목했다.

“서청수 회장님과 술을 한잔 하다 보니 저한테는 과년한 딸애가 있고, 서 회장님께는 듬직한 아드님이 있더군요.”

대찬은 여기까지 듣고 둘의 작당모의를 눈치 챘다.

홍구완 사장은 계속 말했다.

“저희 생각에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더군요. 그래서 늙은 아빠들끼리 주책을 좀 떨어봤습니다. 오늘 부부동반모임에 나온 총각, 처녀가 임시로 짝을 맺어 안면을 트라는 것이죠.”

말만 들으면 홍구완 사장의 말마따나 주책도 그냥 주책이 아니라 주책바가지였다.

그러나 속내는 닳고 닳은 모략가들의 음험한 책략이었다.

늙은 아빠들의 주책이라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따지고 들자면 혼맥으로 얽히는 경언유착이었다.

‘서 회장이 확실히 원웅이를 밀어주려는 생각이 깊은 거야.’

극동일보는 국내 최고의 일간지였다.

여기서 최고란 가장 많이 팔리고 읽히는 신문이란 뜻이었다.

질적으로 최고란 건 아니었다.

만일 홍구완 사장의 딸이 서원웅과 결혼에 골인한다면.

서원웅은 전국 최대 언론사를 뒷배로 두게 된다.

그렇게 되면 차후 서승학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불거질 수 있는 문제를 조기에 제거할 수 있었다.

어딜 서자 아우가 적장자에게 대들 수가 있느냐.

첩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 불합리한 케케묵은 적서차별, 한국 특유의 싸가지론을 극동일보가 불식시켜줄 것이다.

극동일보가 서원웅에게 딸을 주기로 약속했다는 건 예사롭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극동일보가 보통내기도 아니고, 가능성 없는 잡주에 딸을 내주지는 않을 것이다.

서원웅이 필래그룹의 후계가 될 것이 유력하다는 판단이 있기에 결단을 했을 터.

서원웅에 배팅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판단이 됐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은밀한 자리에서 혼인을 주선하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서청수 회장은 왜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주책을 떠는 것일까.

‘제3자가 보기에 원웅이한테 좋은 일이긴 하지만 당사자 마음은 또 모르지.’

결혼은 그야말로 인륜지대사.

아무리 비즈니스적, 정치적으로 강력한 원군이라고 해도 마음이 통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아직까지도 숙맥에 대학생 같은 낭만을 갖고 있는 서원웅이었다.

‘줘도 못 먹는’ 사태가 벌어질까, 서청수 회장은 이런 공개적인 자리를 택했다.

그냥 손님들도 아니고 비즈니스에 꼭 필요한 파트너들이 모인 자리.

만일 여기에서까지 애처럼 군다면, 정말 자질이 없는 것으로 판단해도 무방했다.

서자가 자질마저 없다면.

서청수 회장이 서원웅을 지원해줄 이유가 사라진다.

홍구완 사장은 서원웅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말했다.

“부디 우리 서원웅 대표님께서 부담은 안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볍게, 가볍게 받아들여주세요.”

그 말을 부담 가지지 마라,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부담 가지라는 말이었다.

홍구완 사장은 흐뭇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기 제 딸아이가 앉아있습니다. 박수 잠깐 쳐주십시오.”

박수를 안 치면 또 극동일보에서 무슨 해코지라도 할라.

사람들은 작은 박수소리로 호응했다.

그러자 홍구완 사장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그의 딸이 일어나 수줍게 고개를 숙였다.

홍구완 사장은 그 와중에 자기 딸 자랑까지 야무지게 했다.

“제가 금이야 옥이야 키운 녀석입니다. 지금은 우리 극동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홍승연이를 위해 다시 박수 부탁드립니다.”

홍구완 사장은 박수에 목숨이라도 건 사람처럼 박수에 집착했다.

다시 박수소리,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는 홍승연.

서원웅은 홍승연을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대찬 역시 홍승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겉모습으로 사람을 재단할 순 없다.

그래도 단편적인 느낌은 있다.

대찬이 받은 느낌은 그저 잘 교육받은 요조숙녀, 그 정도였다.

‘이것도 재벌가 아들이면 감내해야 될 숙명이긴 하지만, 어째 좀 안 되긴 했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옆에 서있던 윤이영은 살짝 안쓰러운 얼굴을 지었다.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는 어째 좀 씁쓸하네요. 배우자도 자기가 선택 못하는 입장이.”

대찬은 윤이영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독심술이라도 배우셨어요? 어떻게 제 생각을 그렇게 딱 읽으셨을까.”

“그래요? 그럼 그건 독심술이 아니라 그냥 우리끼리 잘 통하는 거죠.”

“그런가요.”

대찬과 윤이영이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홍승연은 서원웅에게 다가갔다.

둘은 멋쩍게 인사했는데 서원웅 쪽이 훨씬 멋쩍었다.

‘그러고 보니 서원웅, 연애 비슷한 것도 여태 못했었구나.’

대찬은 두 번째 삶에서 연애는 겨우 김산하 한 번이 전부지만, 본래 겨 묻은 개가 유독 더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법이었다.

홍승연은 서원웅이 싫지 않은 듯, 친근하게 다가갔다.

서청수 회장과 홍구완 사장의 선언에 서원웅은 놀랐는데 홍승연은 놀라지 않았다.

홍승연에게는 미리 귀띔이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서원웅에 대한 이런저런 말도 듣고 사진도 봤을 터.

그럼에도 이 자리에 순순히 나왔으니 기본적인 호감은 있는 듯했다.

대찬이 꽤 오랫동안 두 남녀를 바라보고 있으니, 윤이영이 대찬의 팔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언제까지 남 구경만 하고 있을 거예요?”

“아, 그러네요. 미안합니다.”

대찬은 멋쩍게 웃으며 윤이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찬에게도, 윤이영에게도 파티는 지루했다.

그들은 이 파티에서 주목받을 일도 없었다.

서원웅과 홍승연 쪽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접근했다.

둘의 만남이 오늘의 메인이벤트이기도 했고, 거기에 애초에 비바체를 위해 만들어진 자리였으니 서원웅의 주변에 사람이 끓는 건 당연했다.

이 자리가 고등학교 동창회면 모를까, 쟁쟁한 사람들이 운집한 자리였다.

대찬과 윤이영은 아무래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아무리 좌충우돌 활약하며 금자탑을 세워 서씨가 아닌 직원으로는 최연소 차장을 달아봤자 대단하신 분들의 눈에는 그저 차장이었다.

윤이영 역시 이날 숱하게 자리를 채운 가수나 배우들에 비하면 이목을 끌 이유가 없었다.

와인은 시큼털털하고 안주랍시고 나온 과자는 시시했다.

둘은 금방 지루해졌다.

대찬은 윤이영의 빈 와인잔을 보고 물었다.

“한 잔 더 드리라 할까요?”

“아뇨, 됐어요. 아무리 마셔 봐도 저는 와인 맛은 잘 모르겠네요.”

“저도 그러네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가서 소주나 한잔 하실래요?”

“소 곱창 어떠세요. 제가 살게요.”

“대찬 씨야말로 독심술 쓰세요? 어쩜 제 취향을 그렇게 잘 아실까.”

대찬은 잔잔하게 깔리는 클래식 음악에 귀가 간지러웠다.

“이런 자리 못 견디고 곱창집으로 탈출하는 거, 궁상맞은 거 아니죠?”

“누가 궁상맞다고 하면 그러라죠. 무슨 상관이에요.”

“그러게요. 무슨 상관이야.”

둘은 싱겁게 웃으면서 살금살금 파티장을 탈출했다.

살금살금 나갈 필요도 없었다.

누구도 그들의 탈출에 주목하지 않았다.

클래식 음악이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대찬의 마음이 편해졌다.

둘은 필래호텔을 빠져나왔다.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서울시내 역시 번화가를 몇 블록만 벗어나면 후미진 골목이었다.

빛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의 반대 속성을 가진 듯, 대찬과 윤이영은 어둠을 찾아 번화가를 벗어났다.

필래호텔을 나오면서부터 그들의 화려한 차림은 졸지에 우스워졌다.

후미진 골목으로 파고 들수록, 사람들의 시선이 대찬과 윤이영의 옷차림에 오래 머물렀다.

대찬과 윤이영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와인으로 텁텁해진 입을 소주로 헹궈낼 궁리만 했다.

“아, 저기가 좋겠어요.”

윤이영은 연기가 실내를 꽉 메우다 못해 밖으로 뭉게뭉게 피어 나오는 식당을 가리켰다.

식당에는 손님들이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둥글게 모여 연탄에 곱창이며 염통을 구워 먹었다.

대찬은 윤이영에게 물었다.

“옷에 냄새 많이 배일 텐데, 괜찮으세요?”

“아, 그리고 보니 대찬 씨 입고 계신 옷 빌린 거라고 하셨죠.”

“저는 괜찮아요. 세탁비 물어내라면 그렇게 하죠, 뭐.”

윤이영은 싱긋 웃었다.

“그럼 저도 그럴래요.”

“그러시죠, 그럼.”

대찬도 윤이영을 마주보며 웃었다.

둘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단출한 반찬 몇 가지, 그리고 주문한 소주가 나왔다.

녹색 병에 차가운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윤이영은 뽀드득 뚜껑을 열고 대찬의 잔에 두 손으로 술을 따르며 말했다.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니고 잘 마시는 편도 아닌데, 가끔 엄청 당길 때가 있단 말이죠.”

“그게 오늘이에요?”

“네, 오늘은 무조건 소주에 곱창 먹어야 하는 날.”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과음하시지는 말구요.”

“술 정도는 제가 컨트롤하죠. 자, 건배!”

“건배.”

대찬은 웃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둘은 동시에 소주를 죽 들이켰다.

대찬은 능숙한 솜씨로 곱창을 구워 윤이영의 접시 위에 균일한 크기로 잘라주었다.

윤이영은 빙긋 웃었다.

“고기도 잘 구우시네요.”

“하도 많이 먹고 다녀서요.”

“암튼 다재다능하셔. 다음 거는 제가 구울게요. 좀 드세요.”

“고마워요.”

윤이영의 손끝도 제법 야무졌다.

값비싼 파티음식보다 둘의 취향은 이쪽에 더 가까웠다.

윤이영은 그제야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호화스럽게 차려입고 곱창 먹는 건 처음이에요.”

“저도 처음이에요. 지금도 옆 테이블에서 흘끗흘끗 보는 거 아시죠?”

“남의 시선이 무슨 상관이에요. 술맛 떨어져요. 옆 테이블 보지 마요.”

“그럴게요.”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윤이영은 오른쪽 팔꿈치를 식탁에 올려놓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빤히 대찬을 바라봤다.

“술도 좀 들어갔겠다, 몇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네, 그러세요.”

“진짜 왜 저를 비바체 모델로 추천하신 거예요?”

“또 그 얘기예요?”

윤이영은 배시시 웃었다.

“궁금하잖아요. 솔직히 필래에서 광고 맡길 정도는 아니니까.”

“제가 추천하기 이전에도 이미 윤이영 씨는 우리 회사 광고 찍기로 돼있었어요.”

“그건 원두표 씨가 메인이고 저는 별책부록이었잖아요. 원두표 날아가고 저를 단독 메인으로 쓴 건 순전히 대찬 씨 의중이라고 들었어요.”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골백번도 더 말씀드린 거 같은데, 제 의중만으로 회사가 돌아갈 거 같아요? 윤이영 씨를 단독으로 기용하는 데 마케팅팀이 동의하고 경영진도 찬성했어요.”

“그래요? 그렇구나.”

대찬은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실망하는 표정이에요? 이영 씨가 원하는 모범답안은 뭐였는데?”

“됐어요.”

“됐으면 말아요.”

대찬은 짓궂게 대화를 차단했다.

윤이영은 찌릿 눈빛을 쐈다.

대찬은 일부러 눈빛을 회피하며 곱창을 씹었다.

그렇게 윤이영이 던진 화제는 흐지부지되었다.

한동안 허기를 달래던 대찬은 윤이영을 흘끔 보며 말했다.

“솔직히 사심도 있었어요.”

“네?”

살짝 부은 얼굴로 젓가락만 놀리던 윤이영이 대찬을 바라봤다.

“예쁘잖아요. 가까이서 보려고 박박 우긴 것도 없진 않아요.”

“웩, 느끼해.”

“아, 이것도 정답 아니었어요? 저 다른 건 몰라도 공부는 잘했는데요. 이건 출제자의 의도 자체를 모르겠네.”

“이건 공부가 아니니까요.”

윤이영은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술잔을 내밀었다.

배시시 웃음이 삐져나오는 걸 보니, 대찬의 정답이 80점짜리는 되는 모양이었다.

대찬도 그녀의 웃음에 따라 웃었다.

“괜찮겠어요? 벌써 한 병 다 비워 가는데.”

“에이, 이 정도는 괜찮아요. 주량 정도는 제가 컨트롤한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했어요.”

대찬은 웃으면서 잔을 부딪쳤다.

한 시간 후.

윤이영의 눈에 총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떨어졌다.

대찬은 윤이영에게 건배를 권하려다가 잔을 내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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