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45화
사진을 살피던 대찬은 직원에게 말했다.
“아직 행사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죠?”
“예, 여유가 좀 있기는 한데 무슨 일이십니까?”
“앞줄에 있는 내빈들의 이름표만이라도 좀 폰트를 크게 해서 부착했으면 합니다. 물론 서청규 사장님의 이름표까지.”
직원에게는 대찬의 말이 해괴하게만 들릴 뿐이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지시할 권한이 없는 건 압니다만, 아마 오윤 전무님께서도 제 의견에 동의하실 겁니다.”
“권한은 차치하더라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잘 안 보여서요.”
직원의 표정이 더 구겨졌다.
“잘 안 보이다뇨?”
“기자들의 카메라가 제 스마트폰보다는 훨씬 좋겠지만 가급적이면 의자 전체와 서청규 사장님의 이름이 잘 보이도록 찍혔으면 하거든요.”
“저기 그러니까…….”
직원은 순순히 대찬의 의견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대찬은 그의 심리를 충분히 이해했다.
아마 본인이 그 직원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터.
하지만 지지부진한 입씨름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대찬은 바로 오윤 전무를 찾았다.
“전무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시죠.”
대찬의 말을 듣던 오윤 전무의 얼굴에 점점 웃음이 번졌다.
“너무 짓궂은 거 아닙니까?”
“짓궂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무님께서 혼내시면 혼나겠습니다.”
“여기서 조 차장을 혼내면 난 그 순간 나는 CG 쪽 사람이 되는데요? 그런 얕은 수작에 넘어갈 거 같아요?”
오윤 전무가 농담조로 대찬을 힐난하자 대찬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짓궂으신 건 도리어 전무님인 거 같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저기 주 과장.”
오윤 전무는 대찬과 입씨름을 하던 필래호텔 직원, 주 과장을 불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오윤 전무와 한솥밥을 먹었던 주 과장은 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대찬을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태도였다.
그 역시 샐러리맨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이기에 대찬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네, 전무님.”
“여기 조 차장 말대로 해요.”
“네? 정말입니까?”
“해요.”
오윤 전무의 두 글자 지시에 주 과장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내빈석의 첫째 줄에 포진한 이름표들이 교체되었다.
낮은 시력으로 군면제를 받은 사람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의 큰 글씨였다.
대찬과 오윤 전무는 서로를 보며 씩 웃었다.
그로부터 수 시간 후.
마침내 행사가 시작되었다.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녹음된 기계음이 아니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연주자들의 손끝에서 흐르는 진짜 음악이었다.
연회장에는 연주자들보다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있었다.
한 손에는 잔을 들고 우아하게 담소를 나눴다.
역시 말쑥한 차림의 웨이터들이 돌아다니면서 고급스러운 과자를 권했다.
‘이런 자리는 몇 번씩 와도 적응이 안 되네.’
대찬은 몸매가 드러날 정도로 타이트한 정장에 난색을 표했다.
살짝 갑갑했다.
이런 자리에 온다고 너무 힘주어 멋을 부린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대찬의 눈에는 오윤 전무가 권한 이 복장보다 원래의 것이 훨씬 좋았다.
대찬은 난처했다.
‘너무 힘줬다고 욕먹는 거 아니야?’
하지만 다른 이들을 보니 그건 기우였다.
뮤지컬배우처럼 차려입은 그들은 전혀 자신의 복장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되레 상대적으로 수수하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위축된 모습이었다.
대찬은 서원웅과 함께 대연회장에 있었다.
그러자 그들을 한번 본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서원웅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아, 감사합니다.”
아내와 팔짱을 끼고 다가온 키 작은 신사를 서원웅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감사하다는 답례만 먼저 했다.
그런 서원웅의 표정을 알아본 신사는 웃으면서 자기를 소개했다.
“레드벨 코리아의 유종만 부사장입니다.”
“아, 유 부사장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초짜라 귀하신 분들의 얼굴을 아직 깊이 익히지 못했습니다.”
“하하, 이해합니다. 그 나이에 이런 큰 기업을 이끄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원웅은 웃으면서 답례하고 유종만 부사장의 아내에게도 인사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번에 레드벨과의 협상이 정말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부사장님의 냉철한 혜안이 빛난 덕택이겠죠. 그리고 이건 사모님의 훌륭한 내조가 있기에 또 가능했겠고요.”
“젊은 대표님이 알아봐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유종만 부사장은 씩 웃었다.
“맞습니다. 제가 이런 자리에서 대접받게 된 것도 다 이 평강공주 덕분이죠.”
“나이 오십에 공주 소리를 다 듣네. 대표님이 욕하시겠어.”
서원웅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전혀요. 여전히 공주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정도로 미모가 빛을 발하십니다.”
“호호호, 그만해요. 너무 웃어서 얼굴에 주름 생기겠어요.”
대찬은 서원웅을 보고 미소를 머금었다.
‘저런 느끼한 립서비스도 아무렇지 않게 하고 말이야.’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서원웅은 필래 비바체의 대표 자리에 점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대찬을 띄워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레드벨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장본인은 제가 아니라 이 친구입니다.”
“아, 얘기는 들었어요. 조대찬 차장, 맞죠?”
유종만 부사장이 불쑥 내민 손을 대찬은 공손히 맞잡았다.
“네, 기억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비바체는 우리랑 미팅할 때 이 친구는 빼요. 사람 홀려서 홀라당 벗겨먹는 여우야. 딱 보면 알지.”
대찬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재주껏 활개 쳐봤자 부처님 손바닥 위인 걸요.”
그렇게 유종만 부사장이 눈도장을 찍고 떠난 후에도 서원웅은 끊임없이 사람을 상대해야 했다.
번번이 대찬을 소개하기 어려울 정도로 물 밀 듯이 쏟아졌다.
비바체의 쾌거를 축하하기 위한 자리이니 당연했다.
서원웅은 바빠지는데 그 옆의 대찬은 슬슬 한가해졌다.
구세주를 찾던 대찬의 시야에 구세주가 등장했다.
대찬은 한창 바쁜 서원웅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수고해라.”
대찬은 슬금슬금 인파를 헤치고 구세주를 향해 나아갔다.
“윤이영 씨.”
“아, 여기 계셨구나.”
윤이영은 대찬을 향해 빙긋 웃었다.
윤이영의 차림은 아름다웠다.
파티라고 바닥에 질질 끌리는 드레스를 입지는 않았다.
대신 어깨를 살짝 드러낸 짙푸른 원피스를 입었다.
또 자질구레한 장신구 없이 백금 목걸이와 작은 귀고리만 착용했다.
어깨선을 살짝 넘는 머릿결은 조명을 받아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은 쇄골에서 끝났다.
자연스레 대찬의 시선도 윤이영의 깊은 쇄골에 잠깐 머물렀다.
대찬은 윤이영의 모습을 보고 새삼 감탄했다.
작정하고 차려입은 윤이영은 아름답고 아름다웠다.
‘여신’이라는 비유를 괜히 사람들이 닳고 닳도록 쓰는 게 아니었다.
‘여신이네.’
대찬은 그것보다 나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옷이 날개라고 하는데, 날개도 어울리는 사람이 달려야 날개였다.
파리나 바퀴벌레에게도 달려있는 게 날개였다.
윤이영에게 옷은 그야말로 천사의 날개, 여신의 날개였다.
꾸민답시고 절제 없이 꾸며 과유불급인 사람들과는 달랐다.
설탕을 들이 부어 만든 단맛과 재료 본연의 맛에서 은은하게 우러나오도록 만든 단맛.
똑같이 단맛이되 전자는 달기만 하다는 말이 뒤따르고 후자에는 기분 좋게 달콤하다는 말이 뒤따른다.
윤이영의 미모는 기분 좋게 달콤했다.
넋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대찬을 향해 윤이영이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윤이영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평소랑 너무 다르죠? 너무 빡세게 꾸민 거 아니냐고 대찬 씨가 놀릴까봐 걱정했는데.”
“저랑 마찬가지 걱정을 하셨는데 이영 씨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윤이영은 대찬의 옷차림을 보고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 하기는 대찬 씨도 마찬가진데요. 다른 남자배우 못지않아요.”
“과한 칭찬은 오히려 욕인 거 모르세요?”
“과한 칭찬이 아니니까 욕도 아니에요. 평소에도 멋있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멋있으시네요.”
“오늘 최고의 패셔니스타한테 칭찬을 들으려니까 몸이 배배꼬이네요.”
“그거야말로 과한 칭찬인데요.”
대찬과 윤이영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때 무대에서 음악이 들렸다.
스티브 바라캇의 플라잉(flying).
이런 행사의 배경음악으로 숱하게 쓰이는 명곡이었다.
음악이 잔잔하게 퍼지는 와중에, 행사의 진행을 맡은 프리랜서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잡았다.
“필래면세점 브랜드 출범 기념식에 참석해주신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안내말씀 드립니다.”
그는 행사에 너무나도 어울리는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오늘 행사를 주최하신 필래그룹 서청수 회장님께서 나오십니다. 모두 큰 박수로 환영해주십시오.”
그 말에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무대를 향해 몸을 틀었다.
이런 행사에서는 꼭 이 각도로 몸을 틀어야 한다고 교육이라도 받은 듯, 일치된 움직임이었다.
대찬도 그들의 몸짓을 흉내 냈다.
음악이 더 커지고, 서청수 회장이 자신의 아내인 백양옥 여사와 함께 등장했다.
‘프로 쇼윈도부부시네.’
백양옥 여사는 세상에서 가장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의 표정을 지으며 등장했다.
그녀의 손은 가볍게 서청수 회장의 팔에 올려져 있었다.
화려한 백색 드레스, 그리고 그것과 대비되는 푸른 다이아몬드 반지가 이목을 집중시켰다.
벌써부터 이런저런 사모님들은 저 푸른 다이아몬드 반지의 가격을 놓고 점잖은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양옥 여사는 그들에게 보란 듯이 반지를 낀 손을 서청수 회장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여전히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는 미소를 만면에 유지한 채였다.
하지만 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대화는 표정만큼 화기애애하지는 않았다.
백양옥 여사는 서청수 회장에게 물었다.
“당신, 나 바깥활동 하는 거 싫어하잖아.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서 부부동반을 했어?”
“면세점 땄잖아. 기분 좋은 바람 불어서 그러는 거지.”
“당신이 기분 좋다고 선심 쓰는 사람 아닌 거, 내가 몰라?”
“허허, 좋도록 생각해. 이거야 원 호의를 베풀어도 의심을 사니까 더 베풀기 싫어지는 거야.”
“그러니 인생을 똑바로 살았어야지.”
“선은 넘지 말고.”
서청수 회장 역시 아내를 연단 옆의 의자까지 세련된 자세로 에스코트하고, 자신은 연단에 섰다.
그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빈들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박수소리는 더 커졌다.
“안녕하십니까, 필래그룹 회장 서청수입니다. 저희 그룹의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해주신 내빈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는 서청수 회장의 시선이 내빈석 첫째 줄의 빈자리로 향했다.
그 빈자리에 서청규, 이름 석 자를 발견했다.
서청수 회장은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하마터면 폭소할 뻔했다.
천하의 서청수 회장이 내빈들께 인사를 올리는 자리.
이 자리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딱 두 부류였다.
하나는 행사의 진행을 맡은 필래호텔 측 직원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의도적으로 동원된 게 분명한 대규모의 기자들이었다.
서청수 회장이 연단에 서고, 정면의 서청규 사장 자리가 비어있는 상황.
기자들이 이 예쁜 그림을 놓칠 리가 없었다.
기자들은 서청수 회장의 등 뒤에서 사진을 찍었다.
서청수 회장의 뒷모습이 나오고, 서청규 세 글자가 떡하니 쓰인 빈자리가 사진 한 장에 들어왔다.
이런 자질구레한 행사에 속보를 내보내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이 경우는 달랐다.
-엇갈린 승부, 엇갈린 형제 ‘서청규는 어디에?’
조롱의 의도가 은근히 깔린 제목으로 사진기사가 나간다.
서청수 회장은 미소를 머금은 채 진부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면세점 특허취득의 의의와 필래그룹과 비바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 기타 등등의 뻔한 소리들이었다.
그리고는 신사답게 웃으며 말을 맺었다.
“…아, 오늘 서청수 이 인간이 왜 굳이 부부동반을 고집했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궁금해 하지 않으셔도 말할랍니다.”
사람들은 작은 웃음으로 호응해주었다.
“물론 저의 아내인 아리따운 백양옥 여사를 자랑하려는 의도도 있습니다만.”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인다.
백양옥은 그 말을 듣고 그야말로 썩은 미소를 지었다.
서청수 회장은 백양옥을 잠깐 바라보며 웃은 뒤, 다시 청중을 바라봤다.
“서른둘이 되도록 장가갈 생각을 도저히 안 하는 우리 숙맥 같은 아들을 일깨우고자 합니다.”
그 숙맥 같은 아들이 서원웅을 의미한다는 걸 내빈들은 바로 이해했다.
서원웅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대찬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사전에 들은 바가 없던 서원웅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