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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44화 (243/556)

난 할 수 있어 244화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한번 시음해보시겠습니까?”

“그래, 조 차장이 한 잔 타봐.”

대찬은 기꺼이 그렇게 해주었다.

김태준 사장은 커피를 마시지도 않은 채, 향기만 한번 음미하고 잔을 내려놨다.

그는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향기가 좋군. 필래마트에 입점하도록 내가 언질을 넣어두지.”

“감사합니다, 사장님.”

계속 웃는 낯이었던 대찬은 더 활짝 웃었다.

김태준 사장의 웃음도 덩달아 커졌다.

“저, 저, 자본주의 미소 좀 보게. 얄미워 죽겠군.”

김태준 사장은 대찬의 민원 아닌 민원을 들어주었다.

필래마트는 이미 해뜰녘에서 납품받은 카페 파푸아는 물론, 파푸아뉴기니 산 블루마운틴 원두를 가판대에 비치했다.

필래호텔 오윤 상무가 전무로 진급했다.

소속도 필래 비바체로 옮겨졌다.

그는 필래 비바체 면세점사업부 부장이 되었다.

대찬은 새롭게 비바체 사업부장으로 취임한 그를 찾아갔다.

“축하드립니다, 전무님.”

“하하, 이게 다 조 차장 덕이죠. 조 차장 아니었으면 레드벨하고의 협상도 지지부진했을 테니까.”

“저야 말 몇 마디 보탠 게 전부죠. 오 전무님이 면세점 운영을 지휘하신다니 든든합니다.”

오윤 전무는 탁자에 비스듬히 기대며 웃었다.

“이렇게 되면 나도 자동으로 ‘더블더블유’ 라인으로 분류되는 건가?”

“더블더블유요?”

“조 차장은 몰랐어요? 회장님은 CS, 서청규 사장은 CG, 이니셜로 불리잖아요.”

“네.”

“그거 따라서 서원웅 대표님도 원웅(Won-woong), 더블유가 두 개라 더블더블유라고 부르던데요.”

“이제 서원웅 대표님도 이니셜로 불리는군요.”

“그만큼 위세가 대단해졌다는 뜻이죠. 거기까지 올라가게 만든 일등공신은 당연히 제 앞에 있는 조 차장이고요.”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제 공이 없지는 않겠죠. 하지만 서 대표님의 그릇이 되니까 여러 사람을 품는 거 아니겠습니까.”

“유약하다는 평가가 많았지만 비바체 대표에 취임하자마자 CG한테 한 방 먹이면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긴 했죠.”

“네, 앞으로 더 큰 그릇이 될 겁니다. 이제 서른둘이잖아요.”

오윤 전무는 대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 말은 조 차장에게도 해당하겠죠. 조 차장도 이제 서른둘이니까.”

“하하, 네. 저도 노력해야죠.”

오윤 전무는 흐뭇하게 웃으며 대찬의 등을 두드렸다.

대찬의 혁신경영팀은 대부분 면세점사업부의 업무에 집중했다.

신규 사업이었다.

아무래도 마트사업부나 택배사업부보다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창 업무를 보던 중.

오다혜가 다가와 말했다.

“차장님, 이번 면세점 신규사업자 선정 기념해서 파티를 연다고 하는데요.”

“파티요?”

“네, 서청수 회장님 비롯해서 회사 수뇌부들과 내빈들도 다수 참석한다고 해서요.”

대찬은 웃었다.

“아마 제일 기분이 좋은 사람은 회장님이시겠지. CG 콧대를 완벽하게 꺾어버렸으니까. 참석 안 하시는 게 이상하죠.”

“차장님께도 초대장이 왔어요.”

“오 대리랑 다른 직원들은?”

오다혜는 씩 웃었다.

“파티에 저희 같은 아랫것들이 어떻게 껴요. 높으신 분들만 참석해야죠.”

“그럼 우리 팀에서는 나만 가요?”

오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차장급에서는 차장님이 유일해요. 이유야 말씀 안 드려도 아실 거고요.”

“그럼 난 누구랑 밥 먹어요?”

“저는 파티장 구경도 못하는데 지금 놀리시는 거예요?”

대찬은 싱겁게 웃었다.

“그건 아니고.”

“서 대표님 참석하시잖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우리 더블더블유께서는 다른 높으신 분들하고 어울리시느라 여념이 없을 텐데.”

“아, 차장님 걱정을 하긴 하셔야겠네요. 이번 모임 컨셉 때문에.”

“무슨 컨셉?”

오다혜는 흐흐 웃었다.

“이번 모임, 부부동반이거든요.”

“큰일 났네.”

대찬은 뒤로 벌러덩 누웠다.

팀장님을 위한 고급 사무용 의자는 유연하게 뒤로 젖혀졌다.

대찬은 반쯤 누운 채로 얼굴을 비볐다.

“이건 나 엿 먹이려고 서원웅이 의도한 게 분명해.”

“그건 너무 자의식 과잉 아니신가요. 대표님도 솔로잖아요.”

“서 대표님이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느라 여념이 없겠지만 나는 아니라니까요.”

오다혜는 의뭉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아, 걱정 안 하셔도 되겠어요. 참석자 명단 보니까.”

“음?”

“윤이영 씨도 참석하네요? 차장님이 윤이영 씨랑 썸 탄다는 소문이 회사에 좍 퍼졌던데요.”

그 말에 대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발가락 끝이 저절로 오므라졌다.

“누, 누가 그런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니는 거예요?”

“천하의 조 차장님이 말 더듬으시는 거 보니까 합리적 의심을 할 수밖에 없네요.”

“생사람 잡지 마세요. 저는 그렇다 쳐도 윤이영 씨는 공인이라니까. 그게 하이에나 같은 연예부 기자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해봐요.”

“올, 지금 썸녀 걱정하시는 거예요?”

“오 대리, 회사 생활 지금까지 너무 편했죠.”

대찬이 으르렁거렸지만 오다혜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적어도 팀 내에서 불필요한 권위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걸 오다혜는 너무나 잘 알았다.

“아무튼 잘 해보시라구요. 솔직히 윤이영 씨 너무 매력적이잖아요?”

“매력적이긴 하죠.”

대찬이 무의식적으로 툭 던지듯 말하자 오다혜는 흐흐 웃었다.

“역시 차장님도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네요?”

“회사에 쓸데없는 소문 퍼트리면 진짜 안 됩니다, 오 대리.”

“당연하죠. 당장 김산호 대리한테도 못 말하는 걸요?”

오다혜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찬의 아픈 곳을 쿡쿡 쑤셨다.

“그만 가 봐요.”

대찬은 권태로운 손짓으로 오다혜를 물리쳤다.

대찬은 잠깐 곰곰이 생각하다가 윤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이영은 바로 받았다.

“네, 대찬 씨.”

“이영 씨, 통화 괜찮아요?”

“그럼요. 저 요즘 촬영 쉬는 중이라 한가해요. 무슨 일이세요?”

“저희 회사에서 여는 파티 초대장 받으셨다고 들어서요.”

윤이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 회사가 왜 그렇게 배려가 없어요? 남편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가겠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 점에서는 저도 저희 회사 편을 못 들겠네요.”

“대찬 씨도 파티 참석하세요?”

대찬은 의자를 빙글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네, 저도 초대장 받았어요.”

“잘 됐다! 그럼 솔로끼리 뭉쳐 다녀요.”

“저는 좋은데 이영 씨가 걱정이네요.”

“왜요? 저도 완전 좋은데요.”

“기자들도 많이 올 테니까요.”

“그런 걱정 마세요. 대찬 씨는 저를 자꾸 톱스타 취급 하시는데, 저 3류까진 아니어도 2.5류 정도밖에 안 돼요.”

“겸손도 심하셔라.”

“사실이거든요. 저 같은 2.5류는 관심에 잔뜩 목말라있거든요. 차라리 스캔들이라도 나는 게 좋아요.”

윤이영의 말은 시원시원했다.

아주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대찬은 자꾸 첫 번째 삶의, 톱스타 반열에 올랐던 그녀가 지금의 그녀와 겹쳐 보였다.

지금의 그녀도 충분히 톱스타 반열에 오를 역량이 있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당사자의 말처럼 2.5류는 너무 겸손한 표현이었지만 길거리를 지나가면 누구나 ‘어, 윤이영이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필래 비바체의 홍보모델이 된 것도 감을 알아본 대찬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비바체가 그 덕을 톡톡히 보는 것도 윤이영의 신선한 이미지와 역량 덕분이지 그의 인지도 덕분은 아니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이영 씨가 괜찮으면 저도 좋아요. 그럼, 그때 뵐게요.”

“쫙 빼입고 오셔야 돼요. 대찬 씨는 뭘 입어도 태가 나긴 하겠지만.”

“연예인만큼 센스는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전화를 끊은 둘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같은 미소를 지었다.

며칠 후, 명동 필래호텔 대연회장.

아직 본격적인 행사시간 전이었다.

초대장을 받은 대찬은 그 시간, 파티 참석자가 아닌 필래 비바체 직원으로 대연회장에 들렀다.

서청수 회장은 물론 그와 동격의 내빈들이 다수 참석하는 자리였다.

필래면세점을 총괄하게 된 오윤 전무가 직접 나서 행사준비를 감독했다.

그는 일찌감치 대연회장을 찾은 대찬을 보고 알은체를 했다.

“조 차장.”

“아, 전무님.”

대찬은 오윤 전무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오윤 전무는 웃으면서 말했다.

“파티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벌써 왔어요?”

“전무님도 이렇게 심혈을 기울이시는데 저라고 파티만 홀랑 즐길 순 없잖습니까.”

“홀랑 즐겨도 괜찮은데. 나는 면세점사업부장이라 유난 떠는 거죠. 조 차장은 그렇지도 않은 걸, 뭘. 굳이 행사준비에 부담 안 가져도 됩니다.”

“하하, 그래도 워낙 가만히 못 있는 체질이라서요.”

“그렇게 도와주고 싶으면 뜻대로 하세요.”

“감사합니다.”

오윤 전무는 대찬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말했다.

“그런데 이따 행사 때 그 차림으로 올 건 아니죠?”

“…네? 맞는데요.”

나름 최선을 다해 격식을 갖춘 옷차림이었다.

그런데 호텔에서 오래 일한 오윤 전무에게는 대찬의 대답이 경악스럽기만 했다.

“지금 장난해요?”

“예?”

“조 차장 패션센스가 업무능력의 반에 반만 됐어도 이렇게 개판으로 안 입었지.”

“개판…….”

대찬에게 꼬박꼬박 예의를 갖췄던 오윤 전무는 이례적으로 흥분했다.

“도저히 못 참아주겠어요. 일단 나 따라와요.”

오윤 전무는 대찬의 손목을 낚아채고 어딘가로 향했다.

필래호텔은 고객을 위해 의류 렌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가벼운 운동복부터 수영복, 파티용 예복까지 갖추고 있었다.

오윤 전무는 옷장을 빽빽하게 채운 옷들에서 몇 벌을 쏙쏙 골라냈다.

그리고는 멋대로 대찬의 몸에 하나, 둘 대보고는 바로 견적을 뽑았다.

“자, 이거, 이거, 이거, 입고 나와요.”

워낙 속전속결로 이뤄진 결정에, 대찬은 오윤 전무가 건네준 옷을 들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윤 전무는 그런 대찬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나더러 입혀달라는 건 아니죠?”

“절대로 아닙니다.”

대찬은 오윤 전무가 농담으로라도 입혀주겠다는 말을 할까봐 부리나케 탈의실로 들어갔다.

대찬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오윤 전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좀 봐줄 만하네.”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걸 이상하다고 하는 조 차장의 안목이 이상해요.”

오윤 전무는 그렇게 일축했지만 대찬은 내내 신경 쓰였다.

일단 행사준비가 급했기에 대찬은 옷 걱정은 잠시 접어두었다.

오윤 전무는 꼼꼼하게 작은 것 하나하나 점검했다.

대찬은 내빈석을 점검했다.

공식 기념식이 치러지는 동안 내빈들이 앉을 자리가 연단 앞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초대된 내빈들의 이름이 적힌 카드가 붙어있었다.

‘면면들이 다 대단하네.’

그룹의 주요 인사들은 물론이요, 레드벨 코리아를 비롯한 관계사들의 요인들도 참석 예정이었다.

‘주한 일본대사에, 무슨 국회의원에, 누구나 아는 영화배우에 어디 재단 이사장님까지.’

대찬은 그 면면들을 하나하나 구경하다가 문득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렸다.

‘왜 서청규가 없지?’

대찬은 행사준비의 실무를 담당한 필래호텔의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필래유통 서청규 사장님은 초대 안 하셨나요?”

그 말에 직원은 겸연쩍게 웃었다.

“물론 초대는 했습니다만…….”

“안 오실 거 같아서 아예 안 붙여놓은 건가요?”

“예……. 계열사 사장님들은 두 번째 줄에 나란히 배치를 했는데, 한 자리가 빠지면 티가 많이 나서요.”

“그래도 만에 하나 오시면 어쩌려고요?”

“그때는 발 빠르게 조치하도록 직원들을 교육해놨습니다.”

“그렇군요.”

물론 서청규 사장이 이 자리에 올 리가 없다는 건 대찬도 알고 있었다.

굴욕감을 즐기는 마조히스트가 아니고서야.

하지만 대찬은 직원의 충분한 설명을 듣고도 고집을 피웠다.

“서청규 사장님 자리를 만들어주시죠.”

“예? 하, 하지만…….”

“둘째 줄 말고요, 음.”

대찬은 어디 재단 이사장님과 무슨 브랜드 총괄디자이너 사이를 가리켰다.

“여기 어때요. 서청규 사장님 자리.”

“네? 둘째 줄에 준비하라고 하시면 저희도 그러겠지만 첫째 줄은…….”

“그래도 실질적인 우리 그룹의 넘버 투 아닙니까. 이 정도 대우는 해드려야죠.”

직원은 대찬의 방침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찬은 그걸 아랑곳하지 않고 한 술 더 떴다.

그는 좌석에서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휴대폰 카메라로 찰칵,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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