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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43화 (242/556)

난 할 수 있어 243화

“좋습니다. 각서를 쓰시죠. 그럼 저희도 필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결과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대찬은 오윤 상무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괜찮겠습니까, 상무님?”

“더 바랄 게 없죠.”

대찬은 이 질문으로 필래 측의 최종결정권자가 오윤 상무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었다.

오윤 상무도 대찬의 묵묵한 배려를 알고 웃음으로 화답했다.

레드벨은 대찬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수락했다.

대찬과 오윤 상무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레드벨 코리아의 사무실을 떠났다.

다시 필래그룹 사옥으로 돌아오면서, 오윤 상무가 대찬에게 물었다.

“괜찮겠어요?”

“네?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면세점 신규영업권을 얻어내도 이건 필래호텔 산하의 사업부로 들어갈 겁니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죠.”

“그런데 필래호텔의 사업취득을 위해 필래 비바체가 헌신한다는 게, 비바체 입장에서는 좀…….”

“하하, 어차피 레드벨이 유통을 대행하는 명품 브랜드를 능가하는 다른 브랜드가 필드 업에 입점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 밑의 브랜드는 오히려 필드 업에 입점을 강력하게 희망하겠죠. 신도시에 거주하는 젊은 소비자들이 딱 그들의 타깃층이니까. 문제없습니다.”

오윤 상무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필래 비바체에 어느 정도 부담이 따랐어도 저는 같은 결정을 했을 겁니다.”

“왜죠?”

“CG는 서원웅 대표의 가장 큰 적이니까요. 물론 회장님의 가장 큰 적이기도 하고.”

오윤 상무는 대찬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군요.”

“아, 다시 생각해보니 안 되겠군요. 필래 비바체에 손해를 끼쳐가면서 각서를 썼다간 제가 배임행위로 감방에 갔을 테니까.”

오윤 상무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레드벨에 한 약속이요.”

“네.”

“서원웅 대표님과 사전에 합의가 된 모양입니다. 아무리 조 차장이라지만 그런 약속을 덜컥 할 수는 없을 테니.”

“아뇨, 덜컥 해버렸네요.”

“역시 왕차장님이시군요.”

“이 정도 재량권을 부여할 생각이 아니었다면 서 대표님이 굳이 저를 이 TF에 넣지 않았을 겁니다.”

오윤 상무는 고개를 끄덕이곤 몸에 힘을 주며 손바닥을 비볐다.

“아무튼 모쪼록 결과가 좋았으면 하는데요.”

“좋을 겁니다.”

필래유통의 협상팀이 부랴부랴 레드벨 코리아 담당자와 만난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그들로서는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필래그룹에서 면세점 사업에 손을 뻗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까닭.

그저 얼굴도장이나 찍을 요량이었다.

보낸 직원들의 직급도 고작해야 과장, 대리.

천원석 과장과 유백기 대리였다.

“안녕하십니까, 천원석 과장입니다.”

“유백기 대리입니다.”

그들은 편하게 명함을 교환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한 레드벨 코리아의 태도는 전혀 뜻밖이었다.

사흘 전, 대찬과 오윤 상무를 만났던 레드벨 담당자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오는데 고생 많으셨다, 신규사업권을 꼭 취득하시기 바란다는 일상적인 인사말과 덕담 대신 날카로운 비즈니스로 직행했다.

“필래유통의 조건은 뭡니까?”

“예?”

천원석 과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사전협상 하러 오신 거 아니에요?”

“예? 아 저희는 그저 인사차…….”

“그렇게 여유로울 때가 아니실 텐데요.”

레드벨의 말에 천원석 과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또라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천원석 과장은 정신을 차리고 레드벨에게 물었다.

“아직 신규영업권이 어느 회사에 돌아갈지도 결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마당에 무슨 협상을 한단 말입니까?”

“그래요? 어떤 회사는 벌써부터 발 빠르게 나서던데요.”

“어딥니까, 거기가.”

레드벨 측은 씩 웃었다.

“그건 알려줄 수 없고요. 자, 편하게 얘기해볼까요? 어디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

레드벨이 뜻밖의 고자세로 나오자 필래유통 측은 당황했다.

즉시 담당자를 교체했다.

급을 높여 레드벨 측과 교섭했지만 쉽지 않았다.

레드벨은 필래유통의 입장에서 보면 무리한 요구를 하고 그 이하의 조건으로는 시원시원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아직 본선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에게 가혹하게 구는 레드벨을 필래유통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명품 브랜드를 유치해야 하기에 헐레벌떡 협상에 임했다.

필래유통은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내걸었지만 레드벨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마진율을 2퍼센트 정도만 더 잡아주면 괜찮을 텐데.”

“그럼 우리 계산으론 적자가 나옵니다.”

“안 그러면 우리 기준으로 우리가 적자를 보는데요?”

“그럴 리가요. 적자를 볼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상대적인 적자죠. 다른 회사랑 손을 잡으면 이것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 계약을 체결할 수 있거든요.”

레드벨 코리아는 끝끝내 필래유통을 뿌리쳤다.

명품 없는 면세점은 구멍가게에 불과하다.

서청규 사장은 길길이 날뛰었다.

재떨이와 난초 화분을 비롯한 사무실의 몇몇 집기들이 결딴났다고 했다.

하지만 서청규 사장이 뒷목을 잡게 만든 소문은 그 다음이었다.

“뭐! 필래호텔이 면세점 따먹겠다 나섰다고!”

서청규 사장은 쇼크를 받아 닷새 간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필래호텔과 필래 비바체.

새천년백화점.

호텔백제.

이 세 곳이 최종적으로 시내면세점 신규사업권 유치전에 뛰어든 기업들이었다.

면세점사업TF는 이제 숨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나 치열한 유치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대찬은 1인분의 역할은 해냈지만 그 이상의 부담은 떠안지 않았다.

오윤 상무의 말마따나 이건 필래호텔의 몫이었다.

대찬은 비바체의 직원으로서 철저히 보조적인 업무를 지원했다.

오히려 전면에 등장한 건 서원웅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필래호텔의 얼굴로 나선 구 전무와 마찬가지로 전무인 서원웅을 공동TF팀장으로 임명했다.

의도인즉, 조금만 수고해도 면세특허를 따낼 것 같으니 서원웅이 소위 얼굴마담으로 나서서 과실을 꿀꺽 하라는 것이었다.

필래호텔과 비바체는 새천년백화점과 호텔백제를 따돌리고 시내면세점 신규영업자로 선정되었다.

역시나 관건은 입지였다.

과감히 명동 필래호텔의 여러 층을 비워 면세점으로 바꾸겠다.

그렇게 천명한 서청수 회장의 결단이 통했다.

게다가 비바체의 승부수도 통했다.

신도시의 젊은 중산층들이 붐비는 예비 핫 플레이스에 넓은 매장을 약속하는 건 비바체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필래호텔-비바체, ‘면세점 전쟁’에서 승리…‘서원웅 후계설’ 본격 수면 위로

언론은 기실 숟가락 하나 얹었을 뿐인 서원웅을 대서특필했다.

짠.

면세점사업TF는 다 같이 모여 잔을 부딪쳤다.

중심에는 서원웅이 있었다.

공동 TF팀장을 맡았던 필래호텔의 구 전무가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서 대표님.”

“같이 자축해야 할 일이죠. 막판에 등장해 공을 가로챈 것만 같아 죄송스럽습니다.”

구 전무는 호탕하게 웃었다.

“비바체의 도움이 없었으면 고전했을 겁니다. 확실히 레드벨의 협조를 얻어낸 게 컸어요.”

서원웅은 대찬에게 공을 돌렸다.

“조대찬 차장이 시의적절한 배팅을 해줬습니다. 모쪼록 조 차장 공을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렴요. 조 차장 명성이야 이미 그룹 내에선 파다하죠. 수고했어요, 조 차장.”

구 전무가 대찬을 향해 웃었다.

대찬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제가 벽돌 한 장 놓긴 했습니다만 그건 다 서 대표님의 혜안입니다. 인사가 만사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래도 조 차장 공로는 분명하니까. 마땅히 칭찬 받아야지.”

“오윤 상무님께서 판을 잘 깔아주셨습니다. 확실히 저 같은 신출내기가 못 따라갈 관록이었습니다.”

이번엔 대찬이 오윤 상무를 띄워주자 구 전무는 더 호탕하게 웃었다.

“이건 뭐 초등학교 교실 같구만. 다 늙은 아저씨들끼리 칭찬릴레이 하고 있으니 귀여워.”

이에 오윤 상무가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

“같은 늙은 아저씨로 묶기에는 서 대표님과 조 차장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긴 하군. 이거, 말실수를 했습니다.”

구 전무가 익살스럽게 사과하자 서원웅은 엷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별 말씀을요.”

“아, 회장님께서 면세점 운영을 필래 비바체에 맡기겠다고 들었습니다. 면허를 함께 취득했으니 명목상은 공동운영이긴 하지만요.”

그 말에 대찬과 서원웅의 귀가 쫑긋 섰다.

서원웅이 의아한 낯빛으로 물었다.

“예? 그건 당연히 필래호텔에서 운영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서는 아무래도 유통업체인 필래 비바체가 맡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셨다더군요.”

“만약 그렇다면 토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필래호텔 측에서 불만이 없을 수가 없는데요.”

구 전무는 빙긋 웃었다.

“제 얼굴에 불만이 보입니까?”

“아뇨, 그렇진 않지만…….”

“물론 저희가 직접 면세점을 운영하면 더 많은 영업이익을 창출하겠죠. 하지만.”

“하지만?”

“그만큼 많은 인력이 투입돼야 합니다. 저희로서도 부담이 따를 수밖에 없죠. 면세점을 운영한 노하우도 없으니까요.”

“으음…….”

서원웅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자 구 전무는 웃으면서 그의 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어차피 공짜로 넘기는 게 아닙니다. 엄연히 면세점이 들어서는 명동호텔은 저희 소유니까요. 임대료를 받을 겁니다.”

대찬은 그제야 구 전무가 면세점 운영권을 비바체에 넘기고도 웃을 수 있는 까닭을 알았다.

필래호텔 측은 유통에 관해 더 전문적인 비바체에게 운영을 넘겨 부담을 덜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객실로 운영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앉아서 돈 버는 일이었다.

오히려 반길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서원웅도 일단의 부담감은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이익이 임대료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군요.”

“하하, 설마 그러려고요.”

이렇게 서청수 회장의 결단으로 면세점 사업부 역시 필래 비바체가 거느리게 되었다.

물론 어마어마한 임대료는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까딱하다가는 정말 적자를 보는 수도 생겼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어쨌건 결과적으로 필래 비바체는 마트사업부, 택배사업부, 면세점사업부, 세 군데의 알짜 사업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야말로 유통공룡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의 위용이었다.

그에 반해 필래유통은 완전히 체면을 구겼다.

내로라하는 백화점을 보유하고도 필래호텔과 비바체에 밀려 본선에도 진출하지 못했다.

서청규 사장은 망신살이 뻗쳤다.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경영능력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필래유통의 대표에 오른 건 순전히 핏줄 덕분이었다.

하지만 필래유통을 굳건한 필래그룹 제1의 계열사로 이끌어온 건 순전히 자신의 능력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청규 사장 자신은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왔다.

그런데 택배사업부를 뺏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면세점을 도둑맞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정말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필래유통 현재가 43,890(-2.44%)

필래유통의 주가도 급락했다.

잠깐의 리스크가 아니라 오너에 대한 불신이 반영된 것이었다.

필래유통은 택배사업부 매각으로 얻은 자금으로 유망하다는 여러 회사를 합병했다.

하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결국 택배사업부 매각 이후 필래유통의 주가는 5%나 하락했다.

호시탐탐 서청수 회장의 자리를 넘보던 서청규 사장의 처지가 퍽 궁색해졌다.

이제는 필래유통 하나를 보전하는 데도 전전긍긍했다.

서청규 사장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필래유통이 하락한 만큼 필래 비바체는 상승했다.

“이야, 이거 짭짤한데.”

대찬도 어쨌거나 필래 비바체의 주주였다.

쭉 올라간 그래프를 보고 대찬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면세점이 필래 비바체의 품에 안기고 개장을 위해 순항하던 때.

대찬은 파푸아뉴기니의 블루마운틴 커피를 들고 김태준 사장을 방문했다.

김태준 사장은 그걸 보고 픽 웃었다.

“내숭은 있는 대로 떨더니 이제는 안면몰수하고 강매를 하러 왔군.”

“사장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이건 그저 선물입니다, 선물.”

“선물 한번 화려한 걸로 가져왔군.”

대찬이 가져온 블루마운틴 커피는 로튼 프룻츠의 제품 라인업 중에 가장 고가였다.

그만큼 원두의 질이 압도적으로 좋았고 포장도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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