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42화
루이 바스트, 에라스무스, 샤론.
소위 말하는 명품 3대 브랜드의 입점을 달성하느냐의 여부가 관건이었다.
이 브랜드들의 한국 내 유통은 레드벨 코리아에서 책임지고 있었다.
즉, 레드벨 코리아의 결정에 따라 면세점의 희비가 갈리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 면세점 신규사업자가 선정되기 한참 전이었다.
그렇기에 레드벨 코리아는 아무리 좋은 조건으로 거래가 들어와도 덜컥 도장을 찍기 어려웠다.
그걸 서로 알기 때문에 면세점 사업에 군침을 흘리는 기업들은 그저 안면이나 트고 서로의 패를 대충 맞춰보는 선에서 협의했다.
‘하지만 필래는 다르지.’
필래에서는 예선이 본선보다 치열했다.
필래호텔과 비바체는 일단 필래유통만 주저앉히면 신규사업자에 선정될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필래유통의 저력 역시 만만치 않으며, 그들이 신규사업자로 낙점 받지 못하더라도 고춧가루 뿌리기에 나설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필래호텔과 비바체는 이 예선전을 올림픽을 위한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처럼 치러야 했다.
일단 필래호텔이 유통보다 한 발짝 빨랐다.
오윤 상무와 대찬을 만난 레드벨 코리아 측 담당자는 살짝 놀란 눈치였다.
“너무 부지런하신 거 아닙니까?”
“하하, 저희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어서요.”
오윤 상무는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제법 유연하고 유쾌한 성격이었다.
레드벨 측 담당자가 오윤 상무에게 물었다.
“사연이라뇨?”
“뭐, 곧 알게 되실 거라 솔직하게 터놓고 말씀드리죠. 저희와 별도로 필래유통 측에서도 면세점 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레드벨의 눈이 커졌다.
“예? 필래 오너 가의 내분이야 저도 익히 알지만 이렇게까지…….”
“그렇기 때문에 저희는 남들이 한가한 지금이 가장 다급합니다.”
대찬은 오윤 상무의 협상 스타일에 적잖이 놀랐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방에게 최대한 패를 감추는 게 정석이었다.
그런데 오윤 상무는 도리어 상대방이 의심하기도 전에 가장 취약한 부분을 노출했다.
이야기 중간에 잠깐 휴식시간을 가질 때, 대찬은 오윤 상무와 나란히 담배를 피우며 말했다.
“상무님, 저희 측 상황을 먼저 그렇게 공개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하하, 어차피 저쪽이 우리 상황 아는 건 시간문제예요. 유통이라고 가만히 있진 않을 테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오윤 상무는 담배를 깊이 빨아들였다.
담배 끝이 확 붉어지며 빠르게 재로 변했다.
“알려줄 건 우리 쪽에서 빨리 알려주는 게 좋아요.”
“어째서죠?”
오윤 상무는 대찬을 바라보며 웃었다.
“약점은 감출수록 잘 보이니까요. 조 차장님이 김태준 사장님께 말씀드렸다면서요? 이번에는 속도전이 관건이라고.”
“아, 예. 그랬죠.”
“이걸 내내 감추면 저쪽도 이걸 내내 물고 늘어질 거예요. 그럼 속도전은 시작부터 물 건너가는 거죠.”
대찬은 그 말에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때로는 당당한 꼼수가 소심한 정수보다 나은 법이에요. 제 판단은 그래요. 조 차장님 판단은 다른가요?”
“달랐지만 같아졌습니다.”
오윤 상무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웃었다.
“우리끼리 통했으니 협상은 더 빠르게 진행될 수 있겠군요.”
오윤 상무와 대찬은 다시 레드벨과 마주앉았다.
오윤 상무의 말대로 레드벨은 지지부진한 탐색전으로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필래 쪽에서 원하는 걸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유통이 아니라 우리와 손을 잡겠다는 걸 구두로 약속해주세요.”
“구두약속도 필래 같은 대기업을 상대로라면 날인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지닙니다.”
“네, 그렇겠죠.”
“아직 필래유통 측과는 메일이나 몇 통 주고받은 상황이에요. 저쪽에서 얼마나 큰 파이를 내줄지 모르는 상황에서 덥석 귀사와 손을 잡을 순 없습니다.”
오윤 상무는 변주에 능했다.
투수가 변화구로 타자를 속이려면 정직한 직구를 섞어야 한다.
변화구만 던지면 그저 느린 똥볼이 될 뿐이다.
오윤 상무는 본격적인 협상에서는 직구로 일관했다.
“단순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귀사와 협의하려는 건 면세특허 이후의 상황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와 필래유통, 양자택일뿐이죠.”
“그런데요?”
“필래유통은 백화점을 보유한 강자지만 어쨌든 필래그룹이라는 아흔아홉 칸 기와집의 한 칸에 불과합니다.”
레드벨 측은 웃었다.
“그러니 필래유통은 필래의 상대가 안 된다?”
“네.”
“하지만 그건 저희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지금 필래그룹 전체와 협상하는 게 아닙니다. 필래호텔, 필래 비바체와 협상하고 있어요. 그 둘을 합쳐봤자 필래유통을 압도할 정도로 매력적인 카드는 아니에요.”
오윤 상무는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는 명동 필래호텔에 면세점을 유치할 겁니다. 매출 면에서 상당히 탁월한 성과를 낼 겁니다.”
“그렇게 치자면 강남 필래백화점도 나쁜 선택은 아니에요.”
“하지만 명동에 비하겠습니까.”
“근소우위에 있지만 역시 말씀드렸듯이 압도적인 차이는 아닙니다.”
레드벨 측은 아쉬울 게 없었다.
아직 필래가 면세특허를 얻은 것도 아니었고 시간은 한참 남아있었다.
속도전이야 필래의 목표였지, 레드벨이 대표하는 명품 브랜드들의 목표는 아니었다.
어떻게든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필래에서 뽑아내는 게 그들의 관건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확답을 받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잠깐 쉬었다 말씀하시죠.”
오윤 상무 역시 뾰족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담배만 태웠다.
다시 협상테이블로 돌아왔지만 담배 한 개비가 협상의 물꼬를 틀어주는 마법을 부리지는 못했다.
레드벨은 앵무새처럼 같은 논리만 반복했다.
“필래가 원하는 속도전은 저희에게 속단을 강요하는 겁니다. 저희가 속단하려면 그만큼 확실한 뭔가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럼 레드벨에서 원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기존에 논의되던 마진율을 2% 높게 책정해주시면 바로 사인하죠.”
택도 없는 소리.
오윤 상무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상무님, 필래 쪽에서 결단을 보여주셔야 저희도 결단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논의는 공회전할 수밖에 없어요.”
오윤 상무는 여기에 받아칠 말이 마땅치 않았다.
그때 대체로 오윤 상무를 거드는 정도에서 그치던 대찬이 입을 열었다.
“일단 논의의 초점을 확실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내 오윤 상무만 바라보던 레드벨이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초점이라뇨?”
“필래가 얼마나 레드벨에게 많은 것을 약속할 수 있는가. 이건 신규영업자로 선정된 다음에 논의할 일입니다.”
레드벨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은 뭘 논의해야 할까요?”
“지금 논의해야 할 건, 필래호텔과 비바체가 얼마나 필래유통보다 우위에 있는가. 그것에 초점을 맞춰야죠.”
레드벨은 겉보기에 풋내기인 대찬의 말을 가볍게 받아쳤다.
“지금까지 뭘 들으셨어요? 필래유통 쪽에서 어떤 카드를 내밀지 모르니 귀사에서 확실한 카드를 보여주셔야 한다니까요.”
레드벨은 대찬을 은근히 깔아뭉갰다.
딱히 대찬은 가소롭게 여겨서 그랬다기보다는 대찬을 모자란 사람으로 만들어 논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대찬에게도 대찬만의 논리가 있었다.
“필래유통은 절대로 저희보다 나은 조건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구조적으로 그래요.”
“구조적으로 그렇다니?”
“레드벨이 유통을 대행하는 바스트, 에라스무스, 샤론 3사는 명동에도 매장이 있고 강남에도 매장이 있습니다.”
“그렇죠.”
“그렇기 때문에 두 군데만 비교하자면 명동이 근소한 우위에 있을지언정 압도적인 매력이 아니라는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니까요.”
“하지만 조금 더 영역을 넓혀서 생각해보죠.”
“음?”
레드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남에 매장이 있습니까.”
“…하남요? 아뇨.”
“부천, 청주에도 없을 거고요.”
“송도에는 입점을 검토하고 있긴 하지만 예, 아직.”
“그렇군요.”
“그런데 왜 그걸 물어보십니까? 면세점을 하남에 낼 건 아니잖아요?”
대찬은 레드벨 쪽으로 살짝 상체를 숙였다.
“네, 대신 저희 필래 비바체가 추진하고 있는 필드 업이 하남에 들어서죠. 그리고 부천과 청주에도.”
“아.”
“서울 외곽도시의 소비자들은 명품 브랜드 매장이 포진해있는 서울의 주요상권의 소비자들과 중첩되는 부분이 매우 적습니다.”
감을 잡은 레드벨은 팔짱을 끼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필래유통 대신 필래호텔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럼 필드 업에서의 입점논의도 함께 급물살을 탈 겁니다.”
“아, 뭐 좋은 얘긴데요. 그럼 우리가 이번에 필래유통 선택하면 필드 업에 명품 안 들일 거예요?”
“…….”
“게다가 샤론이나 에라스무스는 필드 업에서 소화하기에는 너무 고가의 브랜드 아닙니까? 뭐, 루이 바스트면 가능하겠지만.”
레드벨은 빙긋 웃었다.
그는 이 협상에서 완벽한 갑이었다.
그의 지적은 적절했다.
필드 업에 명품 브랜드가 입점하는 건 순전히 명품 브랜드들의 선택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필래 비바체가 해주네 마네 할 신세가 아니었다.
오윤 상무는 불안한 눈빛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레드벨이 유통을 맡은 브랜드가 필드 업에 입점할 경우, 여태 브랜드보다 넓은 면적의 매장을 약속하죠.”
“음?”
“레드벨의 브랜드는 필드 업에서 가장 넓은 매장을 갖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최혜국대우와 다름없습니다.”
“글쎄요. 그게 명품 브랜드 입장에서 그렇게 파격적인 대우인지는 모르겠군요.”
레드벨은 완전히 대찬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듯했다.
상대방의 평정심을 깨뜨리는 건 오래된 협상의 기술이다.
대찬은 그런 얕은 도발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명품 브랜드 입장에서 파격적인 대우가 아닐진 몰라도, 귀사 같은 유통대행사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대우 아닙니까?”
“음?”
“명품 유통대행사는 레드벨뿐만이 아닙니다. 명품 3사는 경쟁자가 없을지 몰라도 레드벨은 경쟁자가 있지 않습니까?”
레드벨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었다.
“그래서요?”
“그렇다면 레드벨 역시 고객들에게 경쟁력 있는 회사라는 걸 끊임없이 입증해야죠.”
“…….”
“지금 구두약속 하나만으로 명동 필래호텔에 입점하는 동시에 필드 업에서 가장 넓은 매장을 확보한 공로를 챙길 수 있습니다.”
레드벨은 반박하지 않았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필래유통이 명품 유통대행사인 귀사에 저희보다 더 나은 제안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레드벨은 즉답하지 않았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레드벨은 대찬의 말을 받자마자 뱉지 않고 입에 머금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레드벨에 유통을 위탁한 명품 브랜드들이 협상 파트너라면 대찬의 제안은 심심하고 재미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탁을 맡은 레드벨에는 분명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협상을 할 때에는 마주앉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명품 브랜드의 이익을 대변하는 건 레드벨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었다.
그건 도구적 목표일뿐이다.
명품 브랜드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도모하려는 궁극적인 목표는 레드벨의 이익이다.
결국 필래가 주시해야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레드벨의 이익이었다.
호랑이와 마주앉았다면 토끼 한 마리는 심심한 제안이다.
하지만 호랑이의 위세를 등에 업고 호랑이 행세를 하는 여우와 마주앉았다면.
그 여우에게 토끼 한 마리는 군침 나오는 한 끼 식사다.
대찬은 여우에게 토끼를 던져주었다.
그러면서 말을 보탰다.
“이 자리에서 대답을 요구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약속해주십시오.”
“뭘 말입니까?”
“필래유통과 조만간 미팅을 하시겠죠.”
“네, 아마도.”
“필래유통이 내미는 카드는 분명히 우리보다 못할 겁니다. 그게 확인되면.”
“되면?”
“앞뒤 재지 말고 그 자리에서 거절해주십시오. 필래유통이 저울질하면서 잠재적인 변수로 남아있지 못하도록 하는 게 저희 목표니까요.”
레드벨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대찬은 탁자를 건드리는 손가락이 엇박이라 신경 쓰였다.
레드벨은 한참 고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구두계약인 만큼 조 차장님도 확실한 보증을 주셔야 합니다. 필드 업 개장 시 가장 넓은 매장을 약속하겠다는.”
“각서를 쓰죠.”
“각서 한 장으로 담보가 됩니까?”
“네, 됩니다. 각서에 명시된 사항이 이행되지 않으면 누가 필래를 신뢰하겠습니까.”
“으음.”
“더군다나 필래가 면세점 사업에 뛰어든 이상 명품 회사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건 필수입니다.”
“그렇죠.”
“이런 작은 약속을 어기기 위해 그들과의 적대적 관계를 방치하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진 않겠죠.”
레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