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41화
김태준 사장은 왕윤수 사장과 장백주 비서실장이 물러난 후, 서청수 회장과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말했다.
서청수 회장은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김 사장 덕분에 우리가 청규 녀석의 움직임을 조기에 간파할 수 있었어. 잘했어.”
“저야 귀를 열어놓고 있었을 뿐입니다.”
서청수 회장은 그를 흘끗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지?”
“조대찬 그 녀석이 냄새를 맡고 저한테 조잘거리던 걸요.”
“그 녀석이 어떻게 이런 고급정보를 턱 물어오나. 그럼 CR팀 다 잘라버리고 조대찬만 쓰게?”
김태준 사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조 차장 하는 말이, 소고기 먹다가 그렇게 됐다더군요.”
“그건 또 무슨 괴상망측한 소리야.”
“동석한 비바체 옥문영 상무가 용케 필래유통 대외협력부의 백 상무를 알아봤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조 차장이 백 상무랑 같이 있던 사람이 관세청장인 걸 알아냈답니다.”
“그래 거기까진 알았다 쳐. 근데 제깟 놈이 어떻게 그것만 보고 면세점 신규사업자 선정 건으로 만났다는 걸 간파했단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그게 의문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면세점 건을 핀셋으로 집어내더군요.”
서청수 회장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놈, 계룡산에 들어갔어야 할 걸 우리 회사에 잘못 들어왔어.”
“신통방통하더군요.”
“잠깐, 근데 그 녀석이 원웅이를 통해서 전한 게 아니라 자네한테 바로 전화를 했다고?”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흥, 그놈이 이제 자기 지분을 챙기려고 드는군.”
“서원웅 대표를 통해서 전달하기엔 급박한 사안이라 그랬겠죠.”
서청수 회장은 김태준 사장을 흘끔 보곤 말했다.
“사안이 아무리 급해봤자 1, 2초를 다투진 않잖아. 충분히 원웅이를 통해서 전달할 수 있었어.”
김태준 사장은 겸연쩍게 웃었다.
“서원웅 대표만큼의 관계는 아니지만 저도 나름 조 차장이랑 돈독합니다.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니야. 그놈이 나한테 시위하는 거야.”
“예? 시위라뇨.”
“조대찬이가 여기서는 차장인데 다른 곳에서는 대표인 거 알지?”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로튼 프룻츤가 하는 작은 회사 대표를 겸임하고 있죠.”
“그 회사가 기찻길 옆 오막살이처럼 아기자기해도 살림을 나름대로 견실하게 꾸려간다는군.”
“그렇습니까.”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조대찬이는 자기가 건수 물어왔으니 제대로 된 보상을 하라고 아우성을 치는 거야.”
“예?”
“동냥할 깡통도 없어서 원웅이 옆에 빌붙던 옛날이 아니라 이거지. 이제부터 보상을 줄 거면 자기 깡통에다 집어넣으라는 거야.”
김태준 사장은 말뜻을 이해하고 가볍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다면 맹랑하군요.”
“조대찬이 깡통을 보고도 원웅이 깡통에 동전 던져주면 회사 나가겠다고 할지도 몰라.”
“원, 천하의 회장님이 새파란 녀석 눈치를 다 보십니다.”
서청수 회장은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으며 웃었다.
“그러니까 고놈이 깜찍하고도 무섭다는 거야. 봐봐, 지금 자네도 일찍 알아챈 게 조대찬이 공이라고 선전하려고 여태 남아있던 거 아니야.”
“제가 그놈한테 미안한 감정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필래마트 시절에 조대찬이 아이디어를 옴팡 서원웅 대표한테 몰아줬었거든요.”
서청수 회장은 끌끌 혀를 차며 팔걸이를 탁탁 두드렸다.
“그 녀석이 별 볼일 없었으면 자네가 여태 미안하겠어? 미안하기는커녕 이름도 까먹었겠지. 그놈이 여간내기가 아니니까 냉혹한 김태준이가 미안해하기까지 하잖아.”
“하하, 그도 그렇습니다.”
“징그러워. 징그러운 놈이야.”
서청수 회장은 질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다음날, 김태준 사장은 대찬을 자신의 집무실인 필래지주 경영개선실장실로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사장님.”
“어, 앉아.”
대찬은 상석인 김태준 사장의 자리에서 두어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김태준 사장은 픽 웃었다.
“쓸데없는 겸손 떨지 말고 가까이 앉아.”
“알겠습니다.”
대찬은 말대로 했다.
김태준 사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요즘 커피가 많이 질려서 말이야. 자네 회사 커피는 먹을 만할까?”
“하하… 질이 나쁘진 않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미간을 좁혔다.
“나쁘지 않다니. 그 정도로 고객한테 어필이 되겠어?”
“아유, 필래 지붕 아래서 사장님과 제 부업 얘기를 하는 게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하기야 본처의 허락을 받아도 두 집 살림은 두 집 살림이니까?”
대찬은 삐질 곤란한 웃음만 지었다.
김태준 사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다음에 내 방 들어올 때 커피라도 한 박스 들고 와봐. 맛이라도 보게.”
“하하, 알겠습니다. 최상품으로 갖고 오겠습니다.”
“이번에 해뜰녘하고 캔 커피 만들었다며. 우리 마트에 입점 시켰어?”
“아뇨, 아직.”
“그래? 왜 안 했어. 나중에 조 차장이 갖고 온 거 마셔보고 내가 직접 추천해보지.”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끌끌 혀를 찼다.
“조 차장은 내숭이 너무 심해서 탈이야.”
“그래도 내숭이 방종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김태준 사장은 대찬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했다.
대찬은 실질적인 필래 비바체의 2인자였지만 ‘카페 파푸아’를 필래마트에 입점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서원웅은 얼른 그렇게 하라고 종용했지만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다.
김태준 사장은 필래 비바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영향력은 출중했다.
그 정도 되는 인물이 납품을 권한다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터였다.
대찬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자네가 물어다준 정보를 회장님께서 크게 흡족해하시던데.”
“가치 있는 정보였다면 다행입니다.”
“우리도 필래호텔을 주축으로 신규사업자 취득을 노려볼 생각이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절한 판단이십니다.”
면세점, 특히 서울시내의 면세점 사업은 노다지 그 자체였다.
밑져야 본전인 상황에서 신규사업자 선정에 뛰어들지 않는 대기업이 바보인 상황.
하지만 몇 년 후, 이 결정은 어떤 기업들에겐 막심한 후회만 남기게 된다.
대찬의 첫 번째 삶.
사드(THAAD) 배치 이후 중국인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면세점 시장은 위기를 맞는다.
게다가 정부는 지속적으로 면세점 허가를 늘리면서 기업의 경쟁을 유도한다.
이후 면세점 시장은 당분간 계륵 같은 신세로 전락한다.
방귀 좀 뀐다는 대기업들 중 몇몇은 미련 없이 시장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경향을 대찬이 인지하면서도 말리지 않는 건 그만큼 명동 필래호텔의 입지가 대단하기 때문이었다.
면세점 시장에 불황이 불어 닥쳐도 여행객들의 메카인 명동은 굳건할 것이다.
하지만 필래호텔이 충분한 경쟁력을 지녔다 해도 그 전에 넘어야 할 난관이 있었다.
“그런데 유통에서 칼을 빼든 이상, 자칫 잘못하다가는 볼썽사나운 집안싸움이 된단 말이야.”
“한 그룹에서 두 개의 계열사가 면세점을 신청하면, 아무리 오너 일가의 갈등을 인지하고 있는 대중이라도 비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나선다고 해서 CG가 순순히 물러날 리도 만무하고.”
“네, 사실상 대화를 통한 내부조율은 불가능할 겁니다.”
“회장님은 최악의 상황을 염려하고 계셔. 그러면 실리도 얻지 못하고 체면만 구기거든.”
대찬은 김태준 사장 쪽으로 몸을 틀면서 말했다.
“속도전이 중요합니다.”
“속도전?”
“CG가 조기에 단념하도록 회장님께서 직접 광폭행보를 벌이셔야 합니다.”
김태준 사장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으음, 말이야 쉽지만.”
“면세점은 회장님이 직접 움직이실 가치가 있는 사업입니다.”
“물론이야. 회장님께서도 확실한 전략이 도출되면 거기에 맞춰서 스스로 장기판의 말이 되겠다고 하셨어.”
“네, 그런 각오이시라면 서청규 사장이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
김태준 사장은 피식 웃으며 자세를 편하게 바꿨다.
“명동 필래호텔의 3개 층을 면세점을 위해 비울 준비가 돼있어.”
“필래호텔의 입지는 경쟁사를 압도하니, 분명 높은 점수를 받을 겁니다.”
“음, 그렇지?”
“하지만 서청규 사장이 면세점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천명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정부의 공식적인 발표가 있기 전까지 우리가 멋대로 떠들 수는 없지. 그럼 괘씸해서라도 우릴 탈락시킬 걸.”
“그렇겠죠.”
“뾰족한 수가 없겠나?”
“서청규 사장을 단념시켜야죠.”
김태준 사장은 웃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면세점 사업의 관건은 명품 브랜드 유치에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명품 브랜드를 유치하지 못하면 면세점 사업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얼마나 많은 명품 브랜드를 보유했는가.
그 여부가 면세점의 위상을 정한다.
한국을 방문한 여행객이 면세점에 방문하는 회수는 보통 단 한 번이다.
단 한 번 면세점을 가야 한다면, 최우선으로 고려할 조건은 제품의 다양성이었다.
명품 브랜드 유치가 힘든 이유는 명품 브랜드들이 매장 수를 무작정 불리는 걸 꺼려하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명품’의 가치와 위상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렇기에 면세점 사업에 뛰어든 대기업들은 명품 브랜드들의 발바닥이라도 핥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저쪽에서 먼저 가져가버리면, 이쪽은 굶어야 한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필래유통보다 한 발 먼저 명품 브랜드 유치 약속을 받아내면 됩니다.”
“우리가 명품브랜드들을 선점해놓으면 유통 쪽에서도 단념할 것이다?”
“네, 자존심이야 상하겠지만 어쩌겠습니까, 별 수 없죠.”
김태준 사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 여러 가지 방법이 시도되겠지만 선제적으로 명품 브랜드 유치전을 개시하자고 건의를 드려야겠어.”
“네, 어차피 유치전에 뛰어들어야 한다면 한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게 나쁘지 않잖습니까.”
김태준 사장은 대찬의 말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의 제안은 특별하지도 않았지만 흠도 없었다.
서청수 회장은 명품 브랜드 유치전에 선제적으로 뛰어드는 안을 승인했다.
그는 필래호텔을 주축으로 하되, 필래 비바체 역시 면세점 사업 유치에 인력을 지원하라고 지시했다.
서원웅은 대찬을 불렀다.
“내가 왜 불렀는지는 알지?”
“필래호텔 측 지원하라는 거죠?”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유치전은 우리 쪽에도 상당히 중요해.”
“네, 우리가 필래유통을 꺾고 신규사업자로 선정되면 필래의 간판 유통회사가 비바체라는 걸 과시하게 될 테니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현실적인 이익만 고려해도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어.”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명품 브랜드들은 사실 우리하고는 큰 접점이 없어.”
“네, 아무래도 백화점을 보유한 유통 쪽하고 안면은 더 깊겠죠.”
서원웅은 대찬을 바라봤다.
“필래호텔 역시 마찬가지야. 유통만큼의 인맥은 없을 거야.”
“네, 그래도 우리도 무기는 충분합니다.”
“자신 있어?”
“장담은 못하지만 최선은 다하겠습니다.”
“조 차장이 최선을 다하면 항상 결과는 좋았으니까. 이번에도 믿어볼게.”
대찬은 서원웅을 향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그런 착한 목소리로 압박하지 마세요.”
서원웅은 말없이 웃으며 대찬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대찬은 혁신경영팀과 실무부서의 인력 몇몇과 함께 면세점TF에서 한시적으로 일하게 되었다.
필래그룹이 면세점 사업에 손을 뻗었다는 걸 필래유통이 알면 곤란했다.
그렇기에 이 TF는 비공식적이었고, 높은 수준의 보안을 요구했다.
따라서 TF의 인원도 소수였다.
TF는 필래호텔 직원들이 주를 이뤘다.
TF 팀장 역시 필래호텔 측의 상무였다.
그는 대찬에게 호의적이었다.
말도 깍듯하게 존대어를 사용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뵙는군요. 필래호텔 오윤 상무입니다.”
“조대찬 차장입니다. 전력으로 상무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오윤 상무는 대찬과 악수를 나누고 웃으면서 말했다.
“보필은요. 조 차장님 위상이야 비바체 밖에서도 파다합니다.”
“위상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겸손하시군요. 아무튼 서원웅 대표님이 조 차장님을 TF에 포함시킨 건 비바체 쪽에서도 상당한 열의를 갖고 있다는 걸로 봐야겠죠.”
“혁신경영팀 업무가 좌충우돌하는지라 대표님이 보내신 것이긴 하지만, 상당한 열의를 갖고 계신 건 사실입니다.”
“저희 필래호텔 역시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칠 생각이 없습니다. 잘 해봅시다.”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심을 다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