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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40화 (239/556)

난 할 수 있어 240화

대찬은 헛웃음을 짓고 마침내 항복했다.

“홍 주임, 벽제관 예약해줘요.”

“알겠습니다, 차장님.”

그 말에 팀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덩달아 곁에 있던 옥문영 상무도 두 손을 번쩍 들었다.

“한우 좋지! 벽제관은 더 좋지!”

“옥 상무님은 저희 팀원 아니시잖아요.”

“혁신경영팀 팀장씩이나 되는 양반 업무를 주임, 대리가 더 떠안았을 거 같아, 아님 부문장인 내가 더 떠안았을 거 같아?”

“…같이 가시죠.”

“꼭 말을 이상하게 해서 인심을 잃어요.”

“…….”

퇴근 후.

옥문영 상무가 추가된 혁신경영팀의 회식은 인테리어마저 고풍스러운 벽제관에서 이뤄졌다.

시작은 꽃등심 5인분과 안창살 5인분이었다.

허운이 소주잔을 내밀며 건배사를 했다.

“인연은!”

그러자 모든 팀원들이 입을 모아 후창했다.

“낯선 곳에서 온다!”

대찬은 귀가 새빨개진 채로 잔을 부딪쳤다.

당분간 혁신경영팀의 건배사는 그걸로 고정되었다.

대찬은 이들이 인연 어쩌고 떠들어대기 전에 입막음이 필요했다.

그는 황급히 술과 고기를 선제적으로 추가 주문했다.

허운은 연한 고기를 몇 번 안 씹고 꿀꺽 삼키면서 대찬에게 물었다.

“요즘 차장님 회사는 잘 돼요?”

“내 회사면 필래 비바체?”

“에이, 왜 그러실까. 필래면 우리 회사라고 했죠. 로튼 프룻츠.”

대찬은 젓가락질을 하면서 허운에게 말했다.

“그걸 허 과장이 왜 궁금해 해?”

“아니, 뭐 나중에 우리 회사에서 잘리면 자리 없을까 해서요.”

대찬은 젓가락으로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자리가 아무리 텅텅 비어도 허 과장은 안 뽑을 거야.”

“왜요! 나만큼 차장님 마음 읽어내는 심복이 또 어디 있다고?”

“당신은 천년만년 필래에 붙어 있으세요. 대기업에 있으니까 뺀질거리고 빈둥거려도 티가 안 나는 거야. 나였음 바로 잘랐어.”

“아, 진짜 섭섭하네.”

“섭섭하니까 내 술이나 한 잔 받아.”

대찬은 웃으면서 허운의 잔을 채워주었다.

옥문영 상무는 빙긋 웃으며 대찬에게 잔을 내밀었다.

“나도 한 잔 줘봐.”

“넵, 받으시죠.”

대찬은 옥문영 상무에게 공손히 술을 따랐다.

대찬은 딱 알맞은 높이까지 소주를 따랐다.

그런데 옥문영 상무는 술잔을 거두지 않았다.

대찬은 혹시 실수를 저질렀나 하는 생각에 옥문영 상무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녀의 시선은 술잔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술잔을 그대로 탁자에 내려놨다.

‘음?’

대찬은 옥문영 상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와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 옥문영 상무가 말했다.

“저 양반, 백 상문데.”

“백 상무요?”

옥문영 상무는 자못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필래유통 백화점사업부에서 대외협력팀으로 옮겼다고 들었는데.”

“대외협력부…….”

그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대찬이 입사 후 맨 처음으로 몸담았던 곳이 필래유통 대외협력부였다.

음으로 양으로 정보를 캐내고 요인을 접대하는 부서.

이런 고급 음식점에서 누군가와 만난다면 주목할 만했다.

게다가 그 장본인이 임원급이라면 더욱 그랬다.

대찬은 백 상무라는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을 주목했다.

‘모르는 얼굴이야.’

대찬은 몰래 그 사람의 얼굴을 촬영했다.

곁의 허운이 대찬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왜 찍어요?”

“누군지 알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암튼 부지런하고 철두철미해.”

“그래서 또 나쁠 건 없지?”

대찬은 미소를 지으며 팀원들에게 말했다.

대찬은 취하지 않을 정도까지 마음껏 먹고 마셨다.

물론 계산을 위해 카드를 내밀 때 손이 바들바들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총액 124만 3천 원.

‘양심 없는 인간들……. 124만 원 어치 부려먹을 거야.’

정작 대찬이 양심 없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벽제관 치고 정말 양심적으로 먹었다고 생각했다.

다음날, 대찬은 사진을 최재한에게 전송했다.

정계든 재계든 연예계든 가장 많은 얼굴을 알고 있는 존재는 기자였다.

아니나 다를까 최재한은 그걸 보자마자 답을 주었다.

“관세청장이네.”

“관세청장?”

“응.”

의외의 대답이었다.

어느 당의 국회의원도 아니고, 유관부서의 장차관도 아니었다.

‘하긴 그 사람들이라면 재한이한테 물어보지도 않았겠지만.’

“알았어, 고마워.”

대찬은 통화를 종료하고 골몰했다.

관세청은 웬만해서는 재계와 인연이 없는 자리다.

그런데 필래유통에서는 상무를 시켜 관세청장과 독대하도록 했다.

그냥 넘기기에는 찜찜했다.

‘밀반입하던 걸 걸리기라도 했나?’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그렇게 판단하는 건 너무 안일했다.

대찬은 곰곰이 생각했다.

‘유통, 관세청.’

답을 얻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면세점.’

대찬은 첫 번째 삶을 떠올렸다.

필래유통은 2015년, 면세점 사업에 뛰어든다.

면세점도 그냥 면세점이 아니다.

규모에 한계가 있는 공항면세점이 아니었다.

서울의 시내면세점이었다.

훨씬 넓은 공간에 다양한 제품군을 갖춰 훨씬 많은 고객을 불러들일 수 있는 알짜배기 사업이었다.

게다가 이는 2000년 이후 처음으로 모집하는 신규사업자였으니 대기업들의 각축장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필래유통은 신규사업자 선정에 실패한다.

지금은 2014년으로 연도의 차이는 있었다.

하지만 시점이 엇비슷했다.

그리고 필래유통 대외협력부 임원이 관세청장을 은밀히 접촉한 건 돌발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면세점 사업에 관한 로비가 유력했다.

필래유통은 택배사업부를 필래 비바체에 빼앗긴 이후, 최대한 필래 비바체와의 차별화에 만전을 기했다.

특히 명품 브랜드 입점을 비롯한 고급화전략을 채택했다.

필래 비바체는 택배사업부를 앞세워 빠른 배송을 추구하고, 독자 PB 브랜드와 SSM 사업부를 연이어 성공시켰다.

그러면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하지만 고급 이미지 확립에는 여전히 필래유통에 뒤처져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드업 착공에 돌입했지만 아직 물리적인 시간이 한참 남은 시점이었다.

필래유통이 백화점 브랜드를 앞세워 수 조 원에 달하는 시내면세점 시장에 진출하여, 필래 비바체의 추격에 대응하겠다는 전략이 충분히 가능했다.

대찬은 필래유통의 면세점 시장 진출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했다.

필래유통이 첫 번째 삶처럼 고꾸라져버리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지만, 두 번째 삶에서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첫 번째 삶에서는 필래그룹의 유통회사가 필래유통 한 군데였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필래 비바체 역시 이 사업에 뛰어들 자격이 충분했다.

이건 대찬이 혼자 싸매고 있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대찬은 바로 김태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태준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그의 전화를 받았다.

“왜, 술 사달라고 전화했어?”

“술은 어제 충분히 마셨습니다. 보고 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서원웅 라인 타고 올리는 게 아니라 나한테 바로 전화한 거면 제법 급한 사안이란 뜻인데.”

“네, 필래유통 대외협력부 백 상무가 관세청장과 접선했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그 말뜻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에게는 첫 번째 삶의 지식과 정보가 없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

“확실한 건 아니지만 필래유통 쪽에서 면세점 입찰을 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봐, 아직 정부에서 면세점 신규사업자 선정하겠다는 말도 안 나왔는데…….”

김태준 사장은 짚이는 바가 있어 말을 하다가 멈췄다.

대찬이 말했다.

“필래유통이 한 발짝 빠르게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네 말이 맞아.”

필래유통이 그룹 내에서 가장 큰 계열사라지만 필래그룹에서 운용하는 정보망에 비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통업에 한정한다면 필래유통의 정보망과 로비력은 필래그룹보다 한 수 위였다.

필래그룹은 산업 전체를 아울러야 했지만 필래유통은 유통업에만 핀 포인트로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태준 사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일단 우리 쪽 정보망을 그쪽으로 최대한 가동해봐야겠어.”

“네, 저도 물증이 있는 건 아니라 확언하기 어렵습니다만, 유통 쪽에서 면세점 사업을 준비하는 게 유력합니다.”

“좋아. 번번이 신세지는군.”

“신세라뇨, 저도 필래 일원인데요.”

“그렇긴 하지.”

김태준 사장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김태준 사장의 보고를 받은 서청수 회장은 즉시 모든 CR팀 인원을 면세점 신규사업자 입찰에 대한 동향파악에 집중했다.

더듬이를 바짝 세우니 정보가 들어왔다.

대찬의 추측이 맞았다.

서청수 회장은 이를 악물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꿈틀거리고 있었군.”

동석한 왕윤수 사장이 말했다.

“택배사업부를 뺏기고 나서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군요.”

“제깟 놈이 화가 나 봤자지.”

서청수 회장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분노했다.

첫째는 이런 거대한 사업을 총수에게 일언반구 없이 진행시킨다는 점이었다.

물론 형제의 관계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지만 어쨌거나 필래유통은 여전히 필래그룹의 우산 아래 있었다.

친절한 보고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적어도 낌새라도 보여줬어야 한다는 게 서청수 회장의 생각이었다.

물론 그 생각을 서청규 사장이 들었다면 에라 뽕이라고 했을 것이다.

둘째는 자신의 정보망이 서청규의 정보망보다 한 발짝 늦었다는 것에 있었다.

아무리 그룹 전체를 아울러야 한다지만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장백주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장 실장.”

“네, 회장님.”

“그룹 CR팀 대가리 좀 물갈이 해. 그 전에 좀 더 똘똘하고 냄새 잘 맡는 친구들 섭외해놓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그렇게 지시하고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며 침묵했다.

김태준 사장이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어떻게 해?”

“서청규 사장을 지원사격 하지는 않으실 거 아닙니까.”

“당연한 말을 입 아프게 왜 하나.”

김태준 사장에 이어 왕윤수 사장이 말했다.

“그럼 선택지는 둘 중 하나입니다.”

“음, 그렇지. 방관하거나 망치거나.”

“만에 하나 CG가 면세점 사업에 깃발을 꽂으면 상당한 캐시카우를 얻게 됩니다.”

“그래, 그걸로 내 목을 찌를 궁리만 하겠지.”

장백주 비서실장은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내놓고 방해공작을 펼치면 택배사업부 사태 이후로 생긴 갈등이 수면 위로 오를뿐더러, 여론의 질타도 따를 겁니다.”

“그 전에 주주들의 반발도 크겠지.”

“물밑에서 은밀히 공작을 벌인다 해도, CG 쪽에서 대대적으로 이걸 떠벌리고 다닐 겁니다.”

“나 같아도 그럴 거야. 얼마나 좋은 건수냔 말이야. 아우 등에 칼 꽂는 형님.”

그때 김태준 사장이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뭔가.”

“면세점을 우리가 가져오는 겁니다.”

서청수 회장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가 다시 폈다.

“하긴 우리도 못할 건 없지.”

그 말에 장백주 비서실장이 의문을 표했다.

“필래 비바체를 염두에 두시는 거라면 어렵습니다. 마트에 면세점을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비바체는 아직 여력이 안 되지. 대신 필래호텔을 내세우면 돼.”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래호텔에 면세점사업부를 신규 설치하면 가능한 일이야.”

“아무리 그래도 백화점을 보유한 유통을 상대로 될까요?”

장백주 비서실장의 거듭되는 의문에 김태준 사장이 말했다.

“명동에 있는 필래호텔을 내놓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3개 층 정도를 면세점으로 리뉴얼한다면 승산이 충분해.”

김태준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래호텔의 입지는 최상입니다. 필래유통은 물론 다른 경쟁업체들보다도 입지 면에서는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습니다.”

“좋아, 청규가 하는 걸 내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돼, 그렇지?”

서청수 회장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판단을 끝낸 상태였다.

동의를 강요하고 있었다.

김왕장 셋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청수와 서청규.

두 형제는 면세점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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