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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39화 (238/556)

난 할 수 있어 239화

대찬은 그들의 시선을 감지하고 그쪽에 물었다.

“통역 도와드릴 거 있어요?”

“아, 아니에요. 잠시만요.”

감독은 이쪽으로 오려던 대찬에게 손사래를 치고는 다시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오랜 토론 끝에 그들은 결정을 내린 듯했다.

조감독이 대찬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왔다.

“조 차장님!”

“네, 조감독님.”

조감독은 대찬에게 뜬금없는 제안을 했다.

“혹시 CF에 출연할 생각 없으세요?”

“네? 제가요?”

조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리가 들고 온 컨셉은 자연 속에서 느끼는 자유였거든요.”

“네, 회의에서도 그렇게 결정됐다고 들었어요.”

“근데 그 컨셉 하나만 소화하기에는 여기 노을이 너무 예쁘거든요.”

“그럼 무슨 컨셉으로…….”

“노을이 너무 로맨틱하지 않나요?”

대찬은 그 말을 듣고 높은 산봉우리의 뒤로 천천히 저무는 노을을 바라봤다.

“아, 뭐 예쁘긴 한데 저는 여러분만큼 예술적인 감각이 없어서…….”

“우리, 로맨스 컨셉으로 한번 찍어봅시다. 조 차장님이 좀 도와주셔야겠네요.”

“제가 도와드린다고 하시면…….”

“윤이영 씨랑 잘 어울리는데, 한번 같이 찍어 봐요. 둘이 연인이라고 하고.”

“아.”

대찬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띠었다.

다행히 노을이 그것보다 더 붉어 조감독은 눈치 채지 못했다.

대찬이 대답하지 않자 조감독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

“침묵은 긍정이죠? 윤이영 씨한테도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아, 근데 전 한 번도 카메라에…….”

“괜찮아요. 아마추어틱 한 것도 나름 매력 있으니까. 어차피 번외로 찍는 거니까 정 안 되면 안 쓰면 돼요.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조감독은 대찬이 거절할 여유도 주지 않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갔다.

대찬은 난감하게 웃었다.

조감독은 바로 윤이영에게 달려가 대찬에게 말했던 걸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걸 들은 윤이영은 웃으며 흔쾌히 동의했다.

그녀는 대찬을 잠깐 돌아보고 웃었다.

대찬도 그녀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대찬은 CF에도 출연하는 알찬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CF는 로튼 프룻츠와 해뜰녘이 손잡고 만들어낸 캔 커피, ‘카페 파푸아’의 출시 이후 방영될 예정이었다.

해뜰녘 홍보팀은 오히려 본래 기획이자 윤이영이 단독 출연했던 ‘자유’편보다 대찬과 윤이영이 함께 출연한 ‘사랑’편을 선호했다.

결국 찍는 김에 하나 더 찍자며 급조된 ‘사랑’편이 주력광고로 낙점되었다.

CF가 아직 전파를 타기 전.

오프라인 광고만 개시된 채 출시한 ‘카페 파푸아’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해뜰녘과 로튼 프룻츠 모두 꼼수를 추구하는 회사들은 아니었다.

해뜰녘은 방태열이 아니라 백민하의 회사였다.

백민하 이전에 인간문화재 백응만이 세운 회사.

품질과 근성만으로 뚝심 있게 식품업계 터줏대감으로 길러냈다.

그런 속성은 딸인 백민하 부사장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단순히 낯선 땅에서 온 특이한 커피라는 점만 부각하지 않았다.

해뜰녘 품질관리팀의 눈초리는 깐깐했고, 로튼 프룻츠는 그 깐깐한 기준을 만족시켰다.

초저가는 아니었지만 합리적인 가격에 커피다운 커피를 제공했다.

민승기는 콧노래를 부르며 말했다.

“순항, 순항, 순항. 이러다 금방 떼부자 되겠는데.”

“너무 흥에 취해 계시면 안 돼요. 더 열심히 해야죠.”

맹윤주 과장의 일침에 민승기는 머쓱하게 웃었다.

“누가 보면 맹 과장이 사장인 줄 알겠어.”

맹윤주 과장은 그 말에 살짝 웃기만 했다.

“부정은 안 하네.”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돌아온 후, 대찬은 윤이영과 종종 연락을 나눴다.

둘의 사이는 부쩍 가까워졌다.

관계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지만 환경의 영향도 분명한 탓이었다.

외딴 오지에서 일주일이나 함께 있었다.

그만큼 말도 많이 하고 감정도 많이 교류했다.

처음에는 깍듯이 서로를 존대했던 그들은 어느새 평범한 오누이처럼 편한 목소리에 편한 어조로 대화했다.

윤이영이 대찬을 부르는 호칭도 조 차장님에서 대찬 씨로 바뀌어 있었다.

“대찬 씨, CF 최종본 확인했어요?”

“네, 확인했어요. 아 진짜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왜요, 그래도 연기 좀 되시던데.”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너무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니에요. 진짜예요. 촬영할 때만큼은 상황에 몰입해서 저도 가슴이 두근거렸다니까요.”

“그래요?”

“네, 배우를 몰입시킬 정도의 연기력이면 출중하다고 할 만하죠.”

“윤이영 씨 정도의 여자니까 그렇게 했죠. 그건 연기한 게 아니라 그냥 그 순간만큼은 저도 빠져든 거예요.”

윤이영은 쾌활하게 웃었다.

“대찬 씨가 사탕발림을 다 해주고, 기분 좋은데요.”

“뭐 하러 사탕발림을 합니까. 진짜예요.”

“그래요? 나 그럼 기분 좋아해도 되는 거죠?”

“당연하죠.”

윤이영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아, 기대되네요. CF 첫 방송. 바로 내일이에요.”

“기대되세요? 저는 어디 굴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데.”

“본인 연기력에 자신감을 좀 가져도 좋다구요. 대찬 씨는 제 광고촬영 파트너 중에 최고였어요.”

대찬은 그 말에 흐뭇하게 웃다가 어딘가 이상한 점을 감지했다.

“광고촬영 파트너라고는 나하고 원두표밖에 없잖아요!”

“참 빨리도 알아채신다.”

“얄미워.”

윤이영은 다시 쾌활하게 웃었다.

“대찬 씨처럼 똑똑한 사람 놀리는 게 너무 재밌다니까요. 고마워요. 덕분에 웃으면서 잠자리 들겠네요. 잘 자요.”

“잘 자요, 윤이영 씨.”

대찬은 웃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 순간의 윤이영 역시 대찬과 비슷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다음날.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 사무실.

“야, 나온다, 나온다.”

허운은 과장 체면에 맞지 않게 호들갑을 떨었다.

송희근 과장도 나잇값을 못하며 주섬주섬 리모컨을 들었다.

그리고는 사무실 천장에 걸린 TV를 켰다.

혁신경영팀 직원들은 TV가 잘 보이는 곳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송희근 과장이 허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얼른 가서 조 차장님 모셔와!”

“옛 설!”

허운은 후다닥 팀장실로 뛰어갔다.

유채경은 피식 웃었다.

“우리 조 차장님 공개처형 당하시는 날이네.”

허운은 팀장실의 문을 똑똑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찬이 그를 흘끗 내다봤다.

“무슨 일이야?”

“조 차장님, 얼른 밖으로 나오시죠.”

“왜요, 또.”

“아이, 빨리.”

허운은 대찬을 억지로 일으켜 사무실 한가운데로 모셨다.

“자자, 조 차장님 행차십니다. 자리 비켜주세요.”

허운의 말에 사무실 직원들이 얼른 자리를 비켜주었다.

대찬은 가장 상석에 털썩 앉혀졌다.

대찬은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니, 근무시간에 이게 뭡니까? 일들 안 하세요?”

“왜요, 누구는 일주일이나 회사 빠지고 CF 찍어오는데요. 잠깐 한눈 파는 정도는 괜찮잖아요.”

대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당장 TV 안 꺼요! 빨리 끄고 일들 해요!”

그 말에 누구도 반응하지 않았다.

대찬은 다급하게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송 과장님! 사무실 기강 좀 다잡아주세요. 이게 뭡니까!”

“왜요, 지금 차장님 나오는 CF 보려고 업무 올스톱이잖습니까. 우리처럼 충성스러운 부하직원들이 어디 있습니까.”

젠장!

대찬은 한태윤 과장을 붙잡았다.

“한 과장님! 우리 원칙주의자 한 과장님, 뭐라고 좀 해주세요.”

“어, 지금 나옵니다.”

믿었던 한태윤 과장마저 대찬의 말을 묵살하고 TV 화면을 가리켰다.

대찬이 벌떡 일어나 팀장실로 돌아가려는 것을 허운이 어깨를 눌러 다시 억지로 앉혔다.

딴, 딴단, 척 듣기에도 로맨틱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배경은 노을 지는 파푸아뉴기니의 고산지대.

마라와카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여자.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홀로 마을을 찍는 남자.

대찬은 씩 느끼한 웃음을 지으며 카메라를 눈에 가져갔다.

“으엑! 오글거려!”

홍은주는 너무나도 적나라한 반응을 보이다가 얼른 낯빛을 단속하고 대찬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

대찬은 모든 걸 내려놓은 표정으로 의자에 널브러졌다.

홀로 걷던 남자.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아이들과 어울리는 여자에게 가까워진다.

카메라 렌즈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남자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무른다.

카메라 렌즈에는 환하게 웃는 여자의 웃음.

남자는 눈에서 카메라를 살짝 떼며 멍한 육안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다시 카메라를 눈에 가져다 댄다.

카메라 렌즈에 여자의 환한 미소가 가득 들어찬다.

남자는 조심스럽게 셔터를 누른다.

찰칵.

아이들과 까르르 웃는 여자의 모습이 잠깐 정지화면으로.

“뭐야, 저거 몰카 아니에요?”

불쑥 튀어나온 오다혜의 말에 감상이 와장창 깨져버렸다.

셔터 소리에 여자가 남자 쪽을 바라본다.

남자도 여자를 바라본다.

둘의 시선이 꽤 오랫동안 머무른다.

“크에엑, 못 참겠다.”

허운과 김산호는 서로를 껴안고 고통스러워했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사이, 자막과 함께 나레이션.

-인연은, 낯선 곳에서 온다.

남자와 여자는 동시에 서로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다시 나레이션.

-낯선 곳, 파푸아뉴기니에서 온 깊은 커피.

나레이션은 이제 혓바닥에 버터를 녹인 듯한 영어 원어민으로 바뀐다.

-Cafe Papua.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오두막에 걸터앉아 커피를 꼭 쥔 채로 부끄럽게 웃으며 CF는 끝났다.

“으으으으―”

직원들은 일제히 탄성을 내지르며 대찬을 바라봤다.

“…….”

대찬은 맘대로 능욕하라는 듯 모든 걸 내려놓은 얼굴이었다.

그 와중에 김산호는 저 모습을 보고 한때 단란했던 자신의 누나 김산하와 대찬을 떠올리며 몰래 눈물을 훔쳤다.

“오우, 조대찬. 그림 좋은데.”

옥문영 상무는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것을 본 사람의 표정을 지으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찬은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상무님.”

“업무는, 낯선 곳에서 온다.”

옥문영 상무는 꺽꺽거리는 웃음과 함께 대찬에게 서류를 건넸다.

대찬은 무력하게 서류를 건네받았다.

“낯선 곳, 경영지원부문에서 온 빡센 업무.”

“상무님! 1절만 하세요.”

“이게 어디서 1절만 하라 마라야, 확! 출연료 얼마 받았어.”

“받긴 뭘 받습니까. 땡전 한 푼 못 받았어요.”

“천하의 조대찬이 맨입으로 광고모델을 해줬다고? 누굴 속여!”

“아마추어잖아요.”

“시끄럽고, 오늘 회식은 조 차장이 쏜다!”

옥문영 상무가 제멋대로 선언하자 직원들은 박수로 호응했다.

대찬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퇴근하고 결국 대찬은 팀원들에게 거하게 한 턱 쏘기로 결정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결정되었지만 막상 결정된 다음에는 대찬은 흔쾌히 사겠다고 했다.

자신이 로튼 프룻츠 때문에 자리를 비운 공백을 훌륭하게 메워준 사람들이었다.

대찬의 공백을 탓하기는커녕 군말 없이 업무를 떠안아준 사람들이었다.

비록 CF 출연료는 못 받았지만 이들에게 술을 살 이유는 충분했다.

홍은주가 말했다.

“삼겹살 집 예약해둘까요?”

대찬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한우 먹읍시다!”

“이왕 한우 먹는 거, 벽제관으로 갈까요?”

오다혜의 말이었다.

벽제관은 물가가 높은 강남에서도 비싸기로는 손꼽히는 한우 전문점이었다.

오다혜는 한번 잡은 기회를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을 작정이었다.

대찬은 기함했다.

“오 대리, 거기 1인분에 8만 원이야.”

“딱이네요. 차장님이 일주일 간 자리를 비웠으니까 7일 치 업무공백이 있는 거잖아요? 우리 팀원이 7명이니까 일당 8만 원씩 쳐서 7인분 시키면 딱 떨어지네요.”

“우리 기적의 수학자 오다혜!”

김산호가 짝짝짝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대찬이 허겁지겁 응수했다.

“주말 껴서 갔으니까 7일이 아니고 5일인데?”

“에이, 저희도 차장님 일당을 8만 원으로 잡아드렸잖아요. 그것보단 더 받으시면서.”

“내 연차 쓰고 간 건데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정 싫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오다혜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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