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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38화 (237/556)

난 할 수 있어 238화

“파푸아뉴기니 현지에서 광고촬영을 진행하려고 해요. 윤이영 씨의 모델료와 광고촬영에 드는 모든 경비를 왈라비 측에서 부담하세요.”

“모, 모든 경비를요?”

“우리한테 받은 투자금 생각하면 새발의 피일 텐데요?”

“…….”

“물론 윤이영 씨 개인에게도 왈라비 측에서 적절한 비용을 지불해야 할 거예요.”

왈라비 대표는 백민하 부사장에게 읍소했다.

“아, 그러기에는 배보다 배꼽이…….”

“아니면 법원에서 난타전 하시든지요. 선택은 대표님 몫입니다.”

“아아…….”

“경영인이면 더하기 빼기는 3초 안에 해야지. 할 거죠?”

“…네.”

해뜰녘과 왈라비는 공방전을 끝내고 악수했다.

백민하 부사장은 대찬에게 직접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얘기를 들은 대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잘됐군요. 이번 사업에 공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내 사업이기도 하니까 감사해할 거 없어요. 대신 조 차장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씀하세요.”

“조 차장이 광고촬영 현장에 동행해줬으면 하는데.”

“네? 제가요?”

대찬은 곤혹스러웠다.

필래의 업무가 산적해있었다.

광고촬영에 대찬이 빠질 수 없는 존재라면 모를까, 굳이 대찬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다.

그런 대찬의 마음을 백민하 부사장도 잘 아는 듯 피식 웃었다.

“이거 때문에 시간 내기 어렵죠?”

“네……. 파푸아뉴기니면 적어도 일주일 일정으로는 다녀와야 하는데 아무래도 부담스럽습니다.”

“방태열 그 인간이 배낚시 갔을 때 조 차장한테 이번 달 납품가 절반으로 후려쳐줬다면서요?”

“아, 네, 그거야 지금 이렇게 된 마당에 생각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도 반쯤은 장난이었고요.”

백민하는 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무르기도 어렵게 됐어요. 이 웬수 같은 인간이 벌써 그 계획을 포함시켰거든요.”

“그런가요? 그럼 감사히…….”

“그래도 맨입에 주기는 아까워요. 반값은 너무하고 20프로 디스카운트 해줄게요.”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죠.”

“그렇죠? 이 정도면 명분 충분하잖아요. 해뜰녘 업무 서포트 하고 건수 챙겼다는 식으로 대충 둘러대요.”

“하기야 제가 회사에 일주일 뭉개고 있는 것보단 훨씬 이득이긴 합니다만…….”

“얘기 끝났죠? 그럼.”

백민하 부사장이 전화를 끊으려는 걸 대찬이 급히 붙잡았다.

“부사장님, 그런데 굳이 저까지 파푸아뉴기니로 동행시키는 이유는 뭡니까?”

“현지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거 알아요? 윤이영 씨하고 나하고 요즘 꽤 친해진 거.”

대찬은 갑자기 윤이영의 얘기를 하는 백민하 부사장이 의아했다.

“친해지셨다고요? 윤이영 씨하고?”

“네, 어떻게 보면 나나 윤이영 씨나 방태열이 그 인간한테 된통 당한 입장이잖아요. 동병상련이라고요.”

“아, 그러신가요…….”

“몇 번 만나다보니 취향도 통하고 그래서 많이 가까워졌거든요. 근데 윤이영 씨가 꼭 조 차장이 파푸아뉴기니에 같이 가줬으면 한다더군요.”

“저를요?”

“네, 그러니 이왕 필래에 호구 잡힌 김에 친한 동생 민원이나 들어주는 거죠, 뭐.”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저도 파푸아에 볼 일이 없는 건 아니라 잘됐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아두겠습니다.”

“잘해 봐요.”

“네?”

“아니에요. 끊어요.”

백민하 부사장은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그렇게 또 당분간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의 사무실을 비웠다.

그런 그를 두고 일을 개판으로 한다는 뒷말이 나오진 않았다.

대찬이 쌓아둔 게 워낙 입지전적이었고, 한 달 간 해뜰녘의 제품을 20퍼센트 낮은 가격에 들여온다는 성과가 있었다.

그렇게 대찬은 생각보다 이른 시일에 파푸아뉴기니를 재방문했다.

대찬은 윤이영과 공항에서 만났다.

왈라비 대표는 최대한 경비를 줄이기 위해 인원을 최소화했다.

왈라비 측 인원은 윤이영과 그녀의 매니저가 고작이었다.

거기에 해뜰녘 담당자 한 사람, 그리고 광고촬영을 위한 기획사의 인원들이 동행했다.

윤이영은 보따리장수처럼 짐을 잔뜩 짊어지고 왔다.

대찬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디 피난 가요? 뭘 그렇게 바리바리 챙기셨어요.”

“이번에 보고 언제 또 줄리아 볼지 모르잖아요. 챙길 때 확실하게 챙겨줘야죠.”

“아, 너무 그러시면 곤란해요.”

“네? 뭐가 곤란해요.”

대찬은 얼굴을 찡그렸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원톡이 얼마나 중요한지.”

“근데요?”

“윤이영 씨가 그렇게 너무 잘해주면 저 찬밥취급 받는다니까요. 이러다 원톡에서 쫓겨나면 윤이영 씨가 책임질래요?”

윤이영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조 차장님이 더 잘해주면 되잖아요. 그럴 자신이 없으니까 괜히 나만 잡는 것 봐.”

“제가 아무리 잘해도 저렇게 짐을 한 트럭 갖고 오면 어떻게 이깁니까?”

“두 트럭 싸세요, 그럼.”

“말해 뭐해.”

“하지 마세요, 그럼.”

대찬은 입술을 악물었다.

대찬과 윤이영은 비행기에 나란히 앉았다.

윤이영은 대찬을 흘끗 보며 말했다.

“조 차장님.”

“왜요.”

“뭐야, 왜 이렇게 퉁명스러워?”

“지금 은근슬쩍 말 놓으시는 거예요?”

“조 차장님이 먼저 찬바람 쌩쌩 불었잖아요.”

“아닌데요. 착각이신데요.”

“남자가 뭐 그렇게 쪼잔해.”

“쪼잔한 거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저 안 쪼잔하거든요.”

윤이영은 대찬에게 눈을 흘기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다시 대찬을 바라봤다.

“가는 동안에 심심하시죠.”

“아뇨. 잘 거예요.”

“심심하시잖아요.”

“저한테 심심함을 강요하지 마세요. 저는 비행기 타면서 자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니까. 비즈니스면 더더욱.”

“자꾸 이러면 나 광고 엉망으로 찍을 거예요.”

대찬은 윤이영을 빤히 바라보다가 얕은 한숨을 쉬고 좌석에 푹 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요. 안 잘게요.”

“저 마라와카 말 좀 알려주세요. 줄리아 만나서 그쪽 말로 인사하게요.”

“윤이영 씨 이제 보니까 나 밀어내고 아주 마라와카 원톡 들어가려고 작정하신 거 같네요?”

윤이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조 차장님처럼 정치적인 줄 알죠?”

“모든 사람이 정치적은 아니라도 윤이영 씨는 맞는 거 같은데요?”

“애한테 인사 좀 하겠다는 걸 어떻게 그렇게 배배꼬아서 생각하세요?”

“배배꼬인 게 아니라……!”

대찬과 윤이영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승무원이 다가왔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손님, 대화소리가 약간 소란스러우셔서 다른 승객들이 불편해하십니다. 조금만 작은 목소리로 대화해주시겠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대찬은 얼쯤하게 다리를 오므렸다.

윤이영은 입을 가리고 애처럼 킥킥 웃었다.

“그러니까 제가 마라와카 말 좀 알려달라고 할 때 순순히 알려주셨음 좀 좋아요?”

“에휴……. 그럽시다.”

대찬은 안주머니에 지참한 꼬깃꼬깃한 단어장을 꺼냈다.

윤이영이 단어장에 관심을 보였다.

“이게 뭐예요?”

“마라와카 갔을 때 꼬박 이주일 간 달달 외웠던 거예요.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마라와카 말 교재거든요.”

윤이영은 손때 묻은 단어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흐뭇하게 웃었다.

“조 차장님은 뭐든지 열심이네요.”

“그렇지도 않아요. 이건 중요한 일이니까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거지.”

“그래도 이정도로 열심인 사람, 흔치 않아요.”

대찬은 피식 웃었다.

“왜요, 멋있어요?”

“네, 멋있네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윤이영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자 대찬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그렇게 바로 인정해버리면 내가 되게 웃겨지잖아요.”

“멋있는 걸 멋있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요?”

“…….”

대찬은 귀가 빨개진 채로 몇 장 되지도 않는 단어장을 뒤적였다.

그는 서둘러 마라와카 어 교습을 개시했다.

“그러니까 인사말은…….”

윤이영은 그런 대찬을 보며 풋, 한 번 웃고는 조곤조곤한 강의에 집중했다.

그렇게 1시간여가 지났다.

“자 그럼, 문장으로 이어서 말…….”

해볼까요.

대찬은 뒷말을 발음하지 않았다.

툭, 윤이영의 고개가 대찬의 어깨로 떨어진 까닭이었다.

대찬은 어깨의 움직임을 최소화해서 단어장을 도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곁눈으로 살핀 윤이영은 완전히 골아떨어졌다.

‘공부에 별로 열정적인 스타일은 아니네.’

대찬은 피식 웃고 계속 윤이영에게 어깨를 허락했다.

그렇게 어깨가 슬슬 뻐근해질 즈음, 승무원이 기내식을 준비했다.

윤이영은 요지부동.

대찬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2시간 후면 비행기는 공항에 내릴 것이다.

꼭 기내식이 급한 시점은 아니었다.

승무원이 대찬에게 다가왔다.

“쇠고기로 하시겠습니까, 닭고기로 하시겠습니까?”

“아, 저희는 괜찮습니다.”

승무원은 대찬과 윤이영을 빠르게 살피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나중에 시장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간식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찬은 웃으며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 시간 뒤.

대찬과 윤이영은 모두 잠에 빠졌다.

둘의 이마가 붙었다가,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윤! 윤!”

줄리아는 전속력으로 뛰어나와 윤이영의 품에 폭 안겼다.

쪼그려 앉아 두 팔을 벌리던 대찬의 꼴이 민망하게 됐다.

피터가 비적비적 그쪽으로 다가와 진지한 얼굴로 대찬에게 말했다.

“내가 대신 안겨드릴까.”

“…아뇨.”

대찬은 쩝, 입맛을 다시며 허공을 한번 껴안고 일어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이영과 줄리아는 숫제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윤이영은 마라와카의 말로 인사를 건네고, 줄리아는 한국어로 화답했다.

다른 마라와카 사람들도 칙칙한 동양남자보다 화사한 동양여자를 더 환영했다.

그냥 여자도 아니고 배우였으니 대찬과 윤이영은 더 대비되었다.

대찬은 꽁한 얼굴로 마라와카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윤이영을 빙 둘러싸고 히죽히죽 말도 안 통하면서 웃기만 했다.

‘허, 누구는 M16까지 갈겨야 원톡이고, 누구는 그냥 착륙하자마자 원톡이야.’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하다.

대찬은 속으로 한탄하다가 마음의 상처를 잊으려고 피터에게 일 얘기부터 했다.

“커피 생산은 잘 돼가요?”

“아주 잘 되고 있소. 듣자하니 이번에 생산량을 확 늘려야 한다던데.”

“네, 여기 커피에 한국 사람들이 아주 푹 빠져서요. 힘드신 건 알지만 조금 더 고생해주세요.”

“우리야 공짜로 하는 것도 아닌데, 뭐. 대신 이번에 웜샤인에서 의약품 공급을 좀 더 확실히 해줬으면 하오.”

“예, 자질구레한 질병 때문에 필요 이상의 고생은 안 하시도록 확실하게 조치해두겠습니다.”

피터는 대찬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저 뒤편의 윤이영을 슬쩍슬쩍 바라봤다.

“저 여자는 이번에 새로 뽑은 직원이오?”

“아뇨, 이번에 광고촬영 차 방문한 배우입니다.”

“그렇소? 어쩐지……. 그럼 다음번에도 또 볼 수 있는 건가.”

“아뇨, 일회성 방문입니다.”

“…그런가.”

“…아쉬우세요?”

“…딱히.”

피터는 부정했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 윤이영에게로 흘끗흘끗 향했다.

대찬은 한숨을 쉬었다.

오래 머물 시간이 없었다.

왈라비 대표는 시간이 곧 돈이라며 빠른 촬영을 원했다.

그들에게 허락된 시간은 왕복 일주일. 대개 오가는 데 소요되었고, 마라와카에서의 시간은 1박2일이 고작이었다.

광고에 관해서라면 대찬이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광고에는 줄리아를 비롯한 몇몇 마라와카 사람들도 동원되었다.

그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도와주는 정도였다.

나머지 시간은 그저 오두막에 앉아 광고촬영을 지켜보는 정도였다.

윤이영은 프로였다.

그녀는 감독이 원하는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줄리아를 비롯한 마라와카 사람들과 어울렸다.

광고촬영을 맡은 감독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시원시원하게 진행했다.

노을이 지는 정글을 배경으로 마라와카 아이들과 뛰노는 윤이영.

‘그림이 되네, 그림이.’

대찬은 팔짱을 낀 채로 바라보면서 웃었다.

“아, 좋아, 좋아. 윤이영 씨가 생각 이상으로 잘하네.”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는 더 신이 나서 적극적으로 촬영에 임했다.

감독은 흡족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감독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 다 좋은데 조금 아쉽다, 그지?”

“한 가지 컨셉으로 나가서 그래요. 오늘 그림 잘 뽑히는데 다른 컨셉으로도 좀 더 찍어볼까요?”

“이대로라면 오히려 시간이 남으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어.”

둘은 한동안 숙덕공론을 벌였다.

한참 얘기하던 그들의 시선이 갑자기 대찬에게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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