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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37화 (236/556)

난 할 수 있어 237화

백민하는 오랜 인연을 끝내는 데 시원섭섭하지 않았다.

시원했다.

그렇게 방태열이 버려진 지 일주일.

한 임원이 백민하에게 다가와 쭈뼛거리며 말했다.

“부사장님, 저… 사장님께서 요새 출근을…….”

“아, 사장이 다른 여자랑 바람나서 지금 이혼소송 중이에요. 더 출근할 일 없을 거예요.”

일말의 숨김도 없이 당당히 말하는 백민하에 도리어 당황한 쪽은 임원이었다.

“그, 그럼 대표직은…….”

“당분간 제가 대내외적인 대표이사직을 수행할 거예요. 조만간 좋은 얼굴마담을 구해와야지.”

“아, 알겠습니다.”

“나가봐요.”

백민하는 그렇게 말하고 하던 일을 마저 했다.

대찬은 방태열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그에게 죄의 고백을 권한 이후로 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필래에서의 업무에 집중하던 중.

홍은주가 대찬에게 다가왔다.

“차장님, 손님 오셨는데요.”

“손님? 손님 누구요?”

“해뜰녘 백민하 부사장님이시라고 하던데요.”

그래도 방태열이 제 할 일은 했구나.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모시고 와주세요. 커피는 제가 타서 갈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찬은 커피 두 잔을 타서 팀장실의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백민하가 들어올 때까지 서서 기다렸다.

잠시 후, 홍은주가 백민하를 팀장실로 안내했다.

오십이 넘은 나이를 고려하면 상당한 미모였다.

대찬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장 조대찬 차장입니다.”

“해뜰녘 백민하 부사장이에요. 뜬금없이 찾아와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앉으시죠.”

대찬은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백민하는 간단히 목례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일단 고마워요. 외부에 발설하지 않아줘서.”

“고마워하실 거 없습니다. 제가 외부에 발설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순전히 저를 위한 판단이었습니다.”

“어쨌든 고마워할 일은 맞죠. 근데 저한테도 몇 년씩이나 안 들켰던 그 인간이 어떻게 조 차장한테 들켰을까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내 되시는 분께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방 대표님이…….”

“이제는 그냥 방태열 씨예요.”

백민하는 대찬의 말을 싹둑 자르고 지적했다.

‘잘렸구나.’

대찬은 즉시 정정했다.

“방태열 씨가 권윤지 씨한테 빠져 허우적대시더군요.”

“조 차장한테 은밀한 제안을 했군요. 그 인간 성품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지.”

“네, 맞습니다.”

대찬은 방태열로부터 제안 받은 일을 명료하게 일러주었다.

백민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구미가 당겼을 텐데?”

“덫에는 항상 구미 당기는 먹이가 들어있는 법이니까요.”

“젊은 나이에 사리분별이 잘 되시는군요.”

“항상 신중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그 나이에 실세 차장노릇에 어엿한 회사까지 거느리고 있지.”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어엿한 회사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요.”

“나이만 조금 더 많았어도 우리 회사 대표로 모셨을 텐데 아쉽네요.”

“말씀만으로도 오금이 저립니다. 제가 감당할 자리는 절대로 아닙니다.”

백민하는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피 맛이 좋은데, 이것도 조 차장이 땀 흘려 수입한 커피인가요?”

“네,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방태열이 이 원두로 캔커피를 만들어보자 했다고요.”

“네, 맞습니다. 설비지원과 마케팅 등을 약속하면서요.”

“이게 수지가 맞겠어요? 조 차장이 들여오는 커피는 고급이라고 들었는데.”

“주로 취급하는 원두는 고급이지만 전부 그런 건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저품질의 원두도 수입 가능합니다.”

“그래요? 그러니까 조 차장 말은 사업성이 있다는 말이죠.”

“네.”

백민하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랑 해볼래요?”

“네? 정말입니까?”

“나는 사업 관해선 허투루 얘기 안 해요.”

“워낙 단칼에 결정을 해주셔서.”

“나는 상품보다 사람을 먼저 봐요. 괜찮은 사람이 취급하는 상품은 무조건 괜찮거든.”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좋게 보였다니 다행입니다.”

“조 차장이 의지만 있다면 난 해보고 싶네요.”

“해뜰녘이랑 업무협약을 맺는다면 저희로서는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좋아요. 뭐, 이 자리에서 더 이 얘기를 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거 같으니.”

대찬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

“여긴 필래니까요.”

“우리 쪽 사람하고 논의를 한번 해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백민하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해봅시다.”

“네, 부사장님.”

백민하는 시원시원한 걸음으로 팀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필래 사옥을 나서면서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로튼 프룻츠라는 회사랑 조만간 업무협약 맺게 될 거야. 웬만하면 좋은 쪽으로 해봐. 그래.”

결과적으로 이번 일은 대찬에게는 큰 행운이 되었다.

백민하 부사장은 속전속결로 사업을 진행했다.

대찬은 이 건을 민승기에게 일임했다.

로튼 프룻츠의 대표인 민승기는 해뜰녘 측 직원과 만나 논의를 진행했다.

백민하 부사장의 입김이 들어간 이상, 지지부진한 밀고 당기기는 없었다.

로튼 프룻츠 역시 부스러기 같은 이익 때문에 이 커다란 기회를 날려버릴 요량은 아니었다.

협상은 물 흐르듯 진행되었다.

대찬이 협상 결과를 전해들은 건 백민하 부사장이 팀장실을 다녀가고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대찬은 주말, 로튼 프룻츠 사무실에서 민승기와 만났다.

“어떻게 됐어요?”

“우리로서는 만족할 만한 선에서 사인했어. 해뜰녘 쪽에서도 제법 열의를 갖고 있더라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도 나쁜 제안은 아니죠. RTD커피(ready to drink·구입 후 즉시 마시는 커피) 시장이 가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데 해뜰녘 쪽은 아직 이 시장에 진출하지 않았으니까.”

RTD커피 시장은 2010년대 들어 7%의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해뜰녘은 장류와 전통주 측면에서는 절대강자였다.

하지만 그 외의 식품사업에서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RTD커피 시장에 군침을 흘리면서도 쉽사리 도전장을 내밀지 못했다.

경쟁력 있는 업체들은 이미 경쟁사와 손을 잡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어중이떠중이랑 같이 일을 하자니 영 내키지 않았다.

그러던 해뜰녘에 로튼 프룻츠는 매력적인 카드였다.

“우리가 신생업체이기 때문에 그쪽에서도 주도권을 갖고 사업을 진행할 수 있고.”

“저희도 해뜰녘에서 이끌어주는 게 좋죠. 축적된 노하우가 다르니까.”

“응, 그리고 우리는 아무래도 다른 쟁쟁한 업체보다는 낮은 단가에 원료를 제공할 수밖에 없으니.”

“그래도 이걸로 확실히 한숨 돌리게 됐죠?”

민승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숨 돌리긴, 더 급해졌어.”

“더 급해지다뇨.”

“네가 아무리 돕는다지만 한계가 있잖아.”

대찬은 겸연쩍게 웃었다.

“항상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말로 때울 게 아니라니까. 지금 나랑 맹 과장이랑 둘이 하려는데 죽겠어. 후배들이 아르바이트 식으로 도와주고는 있지만 땜질도 한계가 있지.”

기분 좋은 투정이었다.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인력충원을 더 하긴 해야겠네요.”

“해야 돼. 정직원을 최소 3명은 뽑아야 돼.”

“3명이나요?”

대찬의 반응을 보고 민승기는 눈총을 쐈다.

“아이고, 공동대표라는 양반이 회사 돌아가는 상황도 모른다.”

“하하, 너무 타박하지 마세요. 그래도 제가 일감 많이 물어오잖아요? 제비가 박씨 물어다주듯이.”

“그래서 내가 여태 상전으로 모시고 살잖냐.”

“그런 말씀은 좀 웃으면서 하세요. 누가 보면 진짠 줄 알아요.”

민승기는 혀를 쯧, 차고 말을 관두었다.

민승기가 툴툴거리긴 했지만 그도 내심 기뻐했다.

그로서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에 뛰어든 건 도박이었다.

그게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결과로 돌아오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방태열을 강제로 고해성사 시켜 혜택을 얻은 쪽은 로튼 프룻츠만은 아니었다.

원래 빼앗긴 것을 도로 되찾은 것이니 수혜라고까지 할 건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윤이영에게도 이건 희소식이었다.

왈라비 엔터 측은 필래 비바체에 재계약 의사가 있음을 다시 알려왔다.

필래는 몇 마디 핀잔을 주고 다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재계약 불가 결정이 번복되자, 윤이영은 바로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차장님, 무슨 마법이라도 부리셨어요?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달라질까요.”

“애초에 재계약 불발이 말도 안 되는 억지였잖아요. 그저 정상으로 돌아온 거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저를 완전 찬밥 취급하던 대표님이 갑자기 손바닥을 열심히 비비더라니까요.”

“그래도 그 양반이 태세전환은 빨라서 좋네요.”

“암튼 이거, 조 차장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저는 그냥 거든 것뿐이에요.”

“조 차장님 아니었음 저 내내 손가락 빨고 있어야 했던 건 맞잖아요. 고마워요. 몇 번씩이나 도움을 받는지…….”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저도 제 이익을 위해 선택한 거예요. 저랑 저희 회사가 윤이영 씨를 계속 원했다면 그건 윤이영 씨가 잘나서 그런 거지 동정심이나 인간적인 호의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에요.”

“그 말씀은 좋게 들리면서도 나쁘게 들리는데요?”

“나쁘게 들릴 게 뭐가 있어요.”

“저한테 인간적인 호의를 베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거 아녜요?”

“윤이영 씨도 생각보다 속이 배배꼬이셨네요?”

대찬이 웃으면서 농담을 건네자 윤이영이 발끈했다.

“그렇게 말해놓고 지금 누구한테 누명을 씌워요!”

“하하, 내가 뭐라고 했다고요? 윤이영 씨가 잘났다는 얘기밖에 안 했는데.”

“됐어요!”

“칭찬해줘도 화내는 사람은 윤이영 씨밖에 없을 거예요.”

“암튼 진짜…….”

“좋은 날엔 좋은 얘기만 하자고요. 기쁩니다, 윤이영 씨가 다시 우리 필래 비바체의 얼굴이 돼서.”

“흥, 당연하죠. 권윤지 그 성괴보다는 내가 훨씬 낫죠.”

“권윤지 씨는 어떻게 됐대요?”

“권윤지가 우리 회사에 들어온 건 순전히 방태열 대표 입김 덕분이니까요. 그게 사라지면서 권윤지도 끈 떨어졌어요.”

“그분은 많이 아쉬워하겠네요.”

“별로 그런 것도 없던 걸요. 애초에 연예활동에 큰 관심도 없어 보였어요.”

“인생 참 쉽고 간단하게 사는 거 같아서 부럽네요.”

“그렇게 살려면 늙은 유부남하고 2년이나 불륜 저지를 용기는 있어야 하니까 그것도 쉽지는 않죠.”

대찬과 윤이영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백민하 부사장은 왈라비 엔터 측에 투자금을 반환하라고 으름장을 놨다.

돈이 급한 왈라비 엔터는 순순히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계약에 원금회수에 대한 내용은 없었으니 배를 쨀 테면 째보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한 성깔 하는 백민하 부사장은 즉각 법무팀을 통해 소송전에 착수했다.

돈을 돌려받지는 못해도 괘씸한 놈들을 바싹 말려 죽이겠다는 속셈이었다.

왈라비 엔터는 그런 해뜰녘의 움직임에 대응할 여력이 부족했다.

결국 왈라비 엔터의 대표가 백민하 부사장을 찾아갔다.

둘은 합의점을 찾았다.

해뜰녘은 왈라비 엔터에 대한 소송을 취하할 것.

투자금의 20퍼센트를 다시 해뜰녘에 반환할 것.

“하지만 이대로는 우리 쪽에 너무 손해잖아요?”

백민하 부사장의 말에 왈라비 대표는 최선을 다해 반박했다.

“마냥 그렇지도 않습니다. 저희가 받은 건 투자금이지 기부금이 아니에요. 저희가 잘 되면 해뜰녘에도 이익이 분배된다니까요?”

“돈 몇 푼에 정신이 팔려서 꽃뱀을 간판으로 내세우는 회사한테 무슨 이익을 기대하겠어요?”

“…….”

“기부금이나 다름없죠, 뭐. 그렇게 치면 이 조건은 우리가 너무 호구 잡히는 협상이란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죠.”

“해뜰녘에 이득이 되는 조건을 더 달아야겠어요.”

“투, 투자금을 더 반환할 순 없습니다. 그러면 정말 배를 째라고 말씀드릴 수밖에는…….”

“그건 됐어요. 대신 공짜 광고 하나 찍어야겠어요.”

“공짜 광고라뇨.”

“이번에 우리가 로튼 프룻츠라는 회사하고 캔 커피 제품 출시하기로 했어요.”

“그런데요?”

“우리도 음료시장에 야심차게 발을 내딛는 만큼 TV광고도 찍을 생각이에요.”

왈라비 대표는 감을 잡았다.

“그럼 저희 소속 연예인 중 한 명을…….”

“윤이영.”

“윤이영이요?”

백민하 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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