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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36화 (235/556)

난 할 수 있어 236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어쩔 수 없다고요? 그게 말입니까?”

“조, 조 차장이 내 입장이었으면 마찬가지였을 거야!”

“아뇨, 아닙니다.”

방태열 대표의 눈에 그렁그렁 물기가 맺혔다.

“들어봐. 나 진짜 불쌍한 놈이야. 이렇게라도 안 하면 답답해서 숨을 못 쉬겠다고.”

“뭐가 불쌍합니까?”

“이 나이 이때까지 내 손으로 이룬 것 없고 마누라 눈칫밥만 먹으면서 살아왔어. 권윤지 그 애, 내 유일한 탈출구였어. 내 유일한 희망이야.”

대찬은 얼굴을 구겼다.

“이 나이 이때까지 본인 손으로 이룬 것도 없이 떵떵거리고 잘 살았으면 오히려 감사할 일 아닙니까?”

“그, 그게 오히려 남자의 자존심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기가 막히네요.”

대찬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자 방태열 대표는 무릎으로 기어 대찬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나이 오십 먹고 솜털 보송보송한 여자애한테 사랑한다 소리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떨리는 줄 알아, 응?”

“…….”

“집에 가서는 마누라 등쌀에 매일 쪼그라지는데 윤지한테 나는 키다리아저씨란 말이야.”

대찬은 넋 나간 얼굴로 방태열 대표를 응시했다.

“중증이시군요.”

“날더러 뭐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하지만 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권윤지 씨가 정말 대표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찬의 질문에 방태열 대표의 얼굴이 싹 바뀌었다.

“우리 관계를 그저 그런 불륜으로 보지 마.”

“아, 그저 그런 불륜하고 다르시다……?”

“뭐라고 비아냥거려도 좋지만 우리 관계는 순수해. 비록 시작은 돈이었지만 지금은 돈 없이도 사랑은 유효하다고.”

대찬은 이제 방태열 대표가 짠하게 느껴졌다.

“그럼 이렇게 하시죠. 제가 터트리기 전에 대표님은 백민하 부사장님께 두 가지를 고백하셔야 합니다.”

“…….”

“아내로서의 백민하에게 불륜을 고백하세요. 그리고 회사의 실소유주인 백민하에게 횡령을 고백하세요.”

“이, 이봐…….”

“백 부사장님이 뉴스로 보는 것보다 그래도 대표님 입으로 직접 전해 들으시는 게 덜 화나지 않겠어요?”

방태열 대표는 천천히 일어나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대찬의 어깨를 짚었다.

“우리 이러지 말자, 응? 더 좋은 방법이 있잖아.”

“제 나쁜 머리로는 이게 최선인데요.”

방태열 대표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거래를 하자고, 거래. 나 좋고 조 차장 좋은 거래하자고.”

“뭐, 또 이거 덮는 대신 로튼 프룻츠 지원해주시겠다고요?”

“그래, 바로 그거야! 윤이영하고의 계약도 안 건드릴게. 그냥 모르는 척만 해줘, 응?”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대표님하고 공범하기 싫은데요.”

“에, 에이, 이게 왜 공범이야.”

“대표님은 완벽을 기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백 부사장님이 이 사실을 아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

“그때는요? 그때 백 부사장님이 이런 사정을 봐주실까요.”

“그때 돼서 작살나는 건 나야. 조 차장한테 무슨 손해가 있으려고.”

“손해가 왜 없겠어요. 상종 못할 놈으로 업계공룡한테 딱 찍힐 텐데. 저는 그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 차장, 진짜 이럴래?”

“네, 이럴래요. 사흘 드리죠. 사흘 안에 자수해서 광명 찾으십시오.”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가치 없는 일에 지나치게 정력을 쏟았다.

그래도 윤이영과의 계약해지는 방어해냈으니 본전은 지킨 셈이었다.

방태열 대표는 황망한 시선으로 탁자 위에 올려진 사진을 바라봤다.

그걸 허겁지겁 북북 찢으려다가 허탈하게 내려놨다.

‘복사본이겠지…….’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했다.

방태열 대표는 주어진 말미의 최후까지 바들바들 떨며 가슴을 졸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눈 한번 질끈 감고 그렇게 하는 게 좋았다.

삑, 삑, 삑, 삑.

집으로 들어가는 네 글자 비밀번호를 누르는 게 지옥문을 여는 거 같았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집안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여보…….”

방태열 대표는 살금살금 집안으로 들어갔다.

영민한 백민하 부사장은 남편의 말을 구구절절 끝까지 듣지 않았다.

그러고도 내막을 파악했다.

그녀는 불처럼 화내지 않았다.

마치 로봇처럼 지시했다.

“왈라비에 투자한 돈 바로 회수해.”

“아, 알았어.”

“권윤지인가 뭔가 하는 그년하고 얼마나 만났어.”

“4개월…….”

“그년 SNS하고 뒷조사 좀 해보면 바로 나와. 거짓말하지 마.”

“2년…….”

“당장 헤어져.”

“…….”

방태열 대표가 주저하자 백민하 부사장은 도끼눈을 뜨며 그를 내려다봤다.

“대답 안 해?”

“아, 알았어!”

“지금까지 얼마나 해 처먹었어.”

“해, 해 처먹은 건 아니고…….”

“바른 대로 고해.”

“4, 4억…….”

“재무팀 시켜서 탈탈 털면 바로 나와. 솔직히 말해.”

“6억…….”

“방태열.”

“8, 8억 5천! 더는 없어! 진짜야!”

백민하는 한 손은 허리춤에 올리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리고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나 지금 재무팀장한테 전화한다.”

“10억…….”

방태열 대표의 말만 들으면 경매하는 줄 알 판이었다.

“소속사에 투자하고 그년하고 2년을 붙어먹었는데 10억밖에 안 돼?”

“투, 투자금은 회수하면 다시 우리 돈이 되니까, 헤헤…….”

“웃지 마. 아가리 찢어버리기 전에.”

방태열 대표는 합, 입을 다물었다.

“넌 오늘부로 대표이사에서 해임이야. 퇴직금은 전부 회수할 거야. 불만 없지.”

“여, 열심히 일해서 갚으면 안 될까!”

“네놈 새끼는 일할수록 마이너스야.”

“…알았어.”

“그리고 이 집에서 당장 나가. 내가 부를 때까지 전화도 하지 말고 찾아오지도 마, 알았어?”

“…응.”

“당장 꺼져.”

백민하 부사장의 싸늘한 명령에 방태열 대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백민하 부사장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를 불렀다.

“방태열.”

“으, 으응?”

방태열 대표, 아니 전 대표는 혹여나 일말의 자비심을 구할 수 있을까 하여 희망 섞인 목소리로 그녀를 되돌아봤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이뤄지지 않았다.

“갑자기 네가 개과천선해서 자수했을 리는 없고 누구한테 들켰다는 건데. 내 말 맞지.”

“…맞아.”

“누구야. 우리 회사 사람이야?”

“아, 아니.”

백민하 부사장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외부인한테 들켰어? 어떤 놈이야.”

“조, 조대찬 차장. 필래 비바체의…….”

“알았어, 그만 꺼져.”

백민하 부사장은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방태열 대표는 목을 움츠린 채로 집밖을 나섰다.

방태열 대표는 집에서 쫓겨난 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차라리 후련하다, 후련해!’

그는 집 앞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캔 맥주를 홀짝였다.

한 캔을 후루룩 비우고 휙 던졌다.

놀이터 모래에 맥주캔이 푹 박혔다.

그는 휘적휘적 걸어 택시를 잡았다.

“청담동 갑시다.”

방태열 대표는 권윤지의 청담동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권윤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들어가 있을까.’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했는데 그는 비밀번호를 알지 못했다.

항상 먼저 연락을 주고 오라던 권윤지의 신신당부가 있었다.

그렇기에 방태열이 먼저 연락을 하면 권윤지가 항상 문을 열어주었다.

어쩔 수 없이 권윤지와 연락이 닿을 때까지 앞을 서성이기로 했다.

10분, 30분, 1시간.

2시간, 3시간, 4시간.

방태열은 4시간이 되도록 미련하게 오피스텔 앞을 서성거렸다.

자정을 넘긴 시각.

권윤지에게서 전화가 걸렸다.

방태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윤지야!”

“오빠, 왜 전화했어요? 오늘 안 만나는 날인데.”

“하하, 보고 싶어서 그랬지. 나 지금 청담동인데.”

“네? 청담동이라고요?”

“응, 나 오래 기다렸다. 추워.”

권윤지는 한동안 침묵했다.

수화기를 통해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안 되겠어. 다음에 만나.’

그 작은 목소리가 나이가 먹어 난청이 생긴 방태열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살짝 짜증이 섞인 권윤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기다려요. 나 곧 집에 도착하니까.”

“어딜 갔다가 이제 들어오니?”

뚝.

전화가 끊겼다.

그렇게 20분을 더 기다려서야 권윤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태열은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가 꾹 안았다.

권윤지는 마지못해 안겼다.

“…왜 왔어요?”

“윤지야, 나 사랑하냐?”

“뜬금없이 밤 열두 시에 무슨 말이에요, 그게.”

“밤 열두 시든 낮 열두 시든 우리 사랑이 변하니? 나 사랑하냐?”

이 인간 또 술 처먹었구나.

권윤지는 소리 없는 한숨을 팍 쉬고 말했다.

“그럼요, 사랑하죠.”

“나 백민하랑 이혼하련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랑 결혼하자, 윤지야.”

그 말에 권윤지가 급히 방태열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해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갑자기 무슨 결혼 타령이에요?”

“나, 마누라한테 들켜버렸다.”

“뭐, 뭐라고요? 들켰어요?”

방태열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러운 놈한테 걸려서 들켜버렸어.”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회사에서는 잘렸지만 내가 누구냐. 해뜰녘의 대표이사만 15년 했다. 어디든 나 써줄 데가 있을 거야. 너 하나는 충분히 먹여 살려.”

권윤지는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에서도 잘렸어요? 오빠 사장이잖아요. 사장이 어떻게 잘려요?”

“하, 하하, 어떡하겠니. 처가 쪽 회사였는걸. 월급 사장이야.”

“…….”

“괜찮아! 오빠 아직 젊어! 하다못해 노가다라도 하면 월 200은…….”

“여기 오피스텔은요.”

“그게… 명의는 마누라 이름으로 돼있는데 내가 세입자 받았다고 하고, 월세를 내 월급으로 내고 있었거든……?”

“아씨, 뭐야! 그럼 여기서도 나가야 돼요?”

방태열은 권윤지를 살살 달랬다.

“걱정하지 마. 청담동은 아니래도 강북 어디에는…….”

“아, 염병하네, 진짜.”

“유, 윤지야! 너 어디서 그런 못된 말을 배워왔어!”

“차는, 차는 상관없지?”

“그럼! 차는 온전히 윤지 거지.”

“에이, 씨 알았어요. 이쯤 해서 봐줄 테니까 각자 갈 길 가자고요. 짐은 주말 안으로 빼줄 테니까.”

그 말에 방태열의 얼굴이 싯누렇게 떴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각자 갈 길 가자니. 우리는 같이…….”

“아저씨, 진짜 왜 이래, 징그럽게.”

권윤지의 목소리는 냉혹하기 짝이 없었다.

“윤지야…….”

“내 이름 부르지 마. 두드러기 날 거 같으니까. 돈 떨어졌으면 양심껏 찌그러질 것이지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했어?”

“야, 야아…….”

“주말까지 짐 빼준다고요. 그만 가요. 택시비는 있죠?”

권윤지는 그렇게 말하고 또각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갔다.

방태열은 황망하게 그녀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뒤를 쫓았다.

이미 공동현관의 자동문은 닫혀 있었다.

방태열은 유리로 된 자동문을 쾅쾅 두드렸다.

“야! 권윤지! 어디 가! 난 너밖에 없어!”

쾅쾅쾅!

유리문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 거세게 흔들렸다.

“야! 어디 가냐고! 권윤지! 이, 이 쌍년아!”

돌아오는 건 경비원의 제지였다.

오피스텔 앞에서도 쫓겨난 방태열은 허망하게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는 훌쩍거렸다.

“사랑했다…….”

방태열의 사랑이 끝났다.

권윤지의 사업이 끝났다.

백민하는 방태열에게 사람을 붙여 동향을 살피게 했다.

고로 방태열의 권윤지에 대한 미련을 확인했다.

저 나이 먹도록 철없는 남편을 그래도 한 번쯤은 구제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보고 그 용의가 사라졌다.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야.’

백민하는 방태열에게 이혼을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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