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35화
“머리도 식힐 겸 다녀오시면 되지, 뭐가 그렇게 걸려요?”
“사실 친목도모 그 이상의 효용은 없는 외유성 출장이거든.”
“그래도 업계 큰손들이 모이는 자리잖아요. 대표님한테 딱 필요한 자리죠.”
서원웅은 쩝, 입맛을 다시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뭐, 그렇긴 하지.”
“모이는 자리에 아는 얼굴들도 제법 있을 거 아녜요?”
“응, 조 차장도 아는 사람들 많아. 차재원 대표도 갈 거고, 해뜰녘 방태열 사장도 간대.”
“방 사장도 간다고요?”
서원웅은 피식 웃었다.
“차 대표 간다는 말에는 반응 안 하면서 방 사장 간다니까 뭘 그렇게 놀라?”
“아뇨, 그분은 참 노는 거 좋아한다 싶어서요.”
“하긴 그러고 보니 저번에 배낚시에도 갔다고 그랬지?”
“네.”
대찬은 대답을 해놓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서원웅에게 말했다.
“대표님,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왜, 갑자기 조 차장도 상해 가고 싶어졌어?”
“아뇨, 그건 아니고요.”
“그럼 뭔데?”
“혹시 방태열 대표가 우리 회사 쪽에서 접대를 받거나 배낚시 같은 외유성 행사에 참여한 리스트를 확보할 수 있을까 해서요.”
서원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품은 들어도 어렵진 않지만 왜? 갑자기 방 사장한테 관심이 생겼어?”
“네, 제가 그분한테 관심이 좀 있어서…….”
“알았어. 지시해놓을게. 아마 오늘 퇴근 전에는 받아볼 수 있을 거야.”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상해 잘 다녀오시고요.”
“그동안 회사는 조 차장이 잘 맡아줘야 해.”
“제 자리는 잘 지키고 있겠습니다.”
대찬이 부탁한 리스트는 정말 서원웅의 말대로 오후에 도착했다.
대찬은 그걸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감탄했다.
“가관이다, 가관이야.”
서원웅이 건네준 리스트는 A4 용지 한 장을 빽빽하게 채웠다.
무슨 간담회, 무슨 회의 등등.
방태열 대표는 필래로부터 참 많이도 얻어먹고 다녔다.
거기에 비공식적인 만남까지 고려하면 일은 언제 하냐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필래한테만 얻어먹고 다닐 리는 없어.’
위마트, 업하우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밑의 하청업체는 또 어떻고.
그 와중에 허구한 날 권윤지를 만나러 간다?
‘회사가 안 망하는 게 이상하지.’
그런데 해뜰녘은 안 망했다.
망하기는커녕 순풍에 돛 단 듯 아주 순항 중이시다.
대찬은 그게 궁금했다.
그는 잠시 고심하다가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다.
“아, 인사팀장님, 조대찬입니다. 혹시 우리 직원 중에 해뜰녘 출신 경력직 있나요? 있으면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몇몇 있지요. 직급이 높을수록 좋습니까, 아님 그 반대가 좋습니까?”
“회사 사정에 밝을수록 좋으니 이왕이면 직급이 높았으면 합니다.”
인사팀장은 빙긋 웃었다.
“소회의실에서 잠깐 뵐까요?”
“네? 아뇨,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 해뜰녘 출신인지만 알려주시면 되는데.”
“그러니까요. 제가 해뜰녘 인사팀 출신입니다.”
“아.”
“소회의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대찬은 전화를 끊고 한달음에 소회의실로 달려갔다.
먼저 온 인사팀장이 웃으면서 커피를 내밀었다.
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인사팀장님이 해뜰녘 출신인 줄은 전혀 몰랐네요.”
“하하, 누가 어디 출신인지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알 방법이 없죠.”
“그러고 보니 팀장님은 우리 회사가 월드몰하고 합병한 이후에 합류하셨죠.”
인사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 회사에서 불필요한 잡음을 없애기 위해서 필래, 월드몰 두 군데와 모두 관련이 없는 사람을 인사팀장으로 구하려고 외부에서 헤드헌팅 했거든요.”
“그랬군요. 그럼 팀장님은 해뜰녘 내부사정에 밝으시겠군요.”
“아주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들끼리의 일은 잘 모르지만, 우리 회사의 해뜰녘 출신들 중에선 그래도 가장 낫죠.”
대찬은 인사팀장에게 자리를 권하고 그와 마주앉아 물었다.
“방태열 대표 있잖습니까.”
“예.”
“그분에 대한 경영평가는 어떻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인사팀장은 웃었다.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십니까? 설마 해뜰녘한테 스카웃 제의라도 받으셨습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그랬다 하더라도 인사팀장님을 떡하니 앞에 두고 그런 걸 얘기하겠습니까.”
“하기야 대표님하고도 막역하신데 해뜰녘으로 가실 이유가 없죠. 그럼 왜…….”
대찬은 후룩, 커피를 마시고 말했다.
“그냥 궁금증이 동해서요. 아무리 봐도 경영에 전념하시는 스타일이 아니신데 그래도 회사가 잘 나간단 말이에요?”
“당연하죠. 방 대표님은 직함만 대표지 역할은 술상무니까요.”
“예……?”
인사팀장은 빙긋 웃었다.
“술 접대를 해주고, 받고, 이 사람 저 사람하고 안면 트고 친분 쌓고. 그게 방 대표의 주요업무예요.”
“그럼 누가 경영을 맡아서 하고 있는 겁니까?”
인사팀장은 웃으면서 그 내막을 설명해주었다.
그걸 듣는 대찬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찬은 방태열 대표와 약속을 잡았다.
강남의 한 일식집.
대찬의 요구에 방태열 대표는 흔쾌히 응했다.
‘그래, 아무리 선비처럼 굴어도 네놈도 결국 장사치인 거지.’
방태열 대표는 속으로 흐흐 웃었다.
왈라비의 대표는 필래 측에 윤이영과의 재계약을 체결하지 않겠다고 누차 엄포를 놨다.
이렇게 된 마당에 대찬이 자신의 요구를 수용하리라 방태열 대표는 확신했다.
‘우리 윤지가 필래 홍보모델이 되고 그럴 듯한 드라마에 얼굴도장만 찍으면……!’
오빠, 정말 사랑해요. 난 오빠밖에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자신에게 키스세례를 퍼부어줄 권윤지를 생각하니 아랫도리가 불끈했다.
그때 대찬이 약속장소에 도착했다.
방태열 대표는 웃으면서 그를 맞았다.
“어어, 오랜만에 보는군.”
“네, 대표님.”
대찬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방태열 대표는 그 표정이 고까웠다.
‘흥, 그렇게 잘난 체 하다가 이제 와 무릎을 꿇으려니 자존심이 상하긴 하겠지.’
좋은 날 이 정도 무례쯤이야 넘어가주기로 했다.
방태열 대표는 웃으면서 말했다.
“오늘은 내가 식사를 대접하지. 능성어 어때? 주방장이 오늘 빵이 큰 놈이 들어왔다고 추천하던데.”
“아, 뭐든 좋습니다만 대표님께서 밥맛이 있으실지 모르겠네요.”
“…뭐야?”
“장소를 여기로 잡은 건 괜히 남의 이목 끌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식사는 딱히 안 해도 좋습니다. 얘기는 금방 끝날 겁니다.”
“자네, 아무리 좋은 날이라지만 이렇게 자꾸 어깃장 놓으면 재미없지.”
대찬은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날이요? 대표님께 딱히 좋은 날은 아닌데.”
“내년에 권윤지와 모델 계약을 체결하고 뒷구멍으로 내 조건을 받겠다고 온 거 아닌가?”
대찬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유감이네요. 너무 감이 안 좋으신데요.”
“…뭐?”
대찬은 거한 횟감이 올라와야 할 식탁 위에 사진 몇 장을 올려놨다.
그걸 보자마자 방태열 대표의 심장이 쾅쾅 뛰었다.
대찬은 평안한 얼굴로 말했다.
“거의 뭐 잡아 드실 듯이 키스를 하시던데.”
“이, 이게… 야!”
“이 정도면 그렇게 무리를 해서라도 밀어주는 게 이해되더라고요. 중년의 사랑, 응원합니다.”
“너, 이딴 식으로 사람 뒤캐고 다니는 거 아니야.”
“구린내가 여간 풍겼어야죠.”
방태열 대표의 등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황하면 안 돼.’
표정을 읽히면 안 된다.
강하게 나가야 한다.
방태열 대표는 대찬을 윽박질렀다.
“이게 뭐 어쨌다고. 나 정도 되는 사람은 얼마든지 하고 다니는 일이야. 이걸로 날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얼굴에 철판 깔기 작전으로 나오시는군요.”
“너, 세상 너무 쉽게 아는데, 이거 바깥에 흘려봤자 나 망신 조금 당하고 그만이야.”
“세상을 너무 쉽게 아는 건 방 대표님 아니십니까?”
방태열 대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너, 이거 어디 한번 흘려봐. 너라고 무사할 거 같냐? 이걸 흘리면 해뜰녘은 필래하고 영영 거래 중단이야. 서청수 회장이 널 함함하다 해도 내가 거래중단 선언하면 너도 아웃이라고.”
“거래중단 선언 못하게 하면 되죠?”
“어디서 건방지게 허장성세를 부려.”
“허장성세는 대표님이 부리고 계시죠. 깜도 안 되시면서 무슨 거래중단 어쩌고 하면서 협박질이십니까.”
방태열 대표는 쾅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야, 이 새끼야! 내가 못할 거 같아!”
“당연하지. 너는 껍데기만 대표잖아?”
“무, 뭣……!”
“야, 허구한 날 술이나 푸고 다니는 주제에 어디서 비즈니스를 들먹여.”
“…야? 너 지금 야라고 했냐?”
“그래, 야. 마누라 잘 만나서 대표 행세 하고 다니고 있으면 얌전히 헛기침이나 하고 다닐 것이지 딸 같은 여자애 만나면서 시시덕거리는 건 너무 의리 없지 않냐.”
“너 이 새끼 지금 뭐라고 계속……!”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공동대표 맡고 있는 백민하 부사장이 실질적인 경영주체면서 해뜰녘 실소유주잖아……?”
“…….”
방태열 대표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인사팀장이 일러준 정보였다.
대찬과 인사팀장이 소회의실에서 만나던 날.
인사팀장은 웃으면서 대찬에게 말했다.
‘해뜰녘 지배구조 보셨어요?’
‘무슨 우리장 전통연구소가 지분 4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던데요.’
‘네, 그 다음 방 대표가 4퍼센트, 아내인 백민하 부사장이 2퍼센트 갖고 있죠.’
‘네, 맞습니다. 근데 그건 왜…….’
‘우리장전통연구소는 작고하신 백민하 부사장의 부친, 백응만 인간문화재가 세운 곳이에요. 전통주하고 전통 장류 제조기술을 보유하셨던.’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우리장연구소 40퍼센트, 백민하 부사장 2퍼센트, 그리고 나머지 우호지분 9퍼센트. 해뜰녘의 실소유주는 백민하 부사장이에요.’
‘어떻게 그런…….’
‘해뜰녘은 백응만 선생이 창업한 회사거든요. 그걸 백민하 부사장이 이어받았고요.’
‘그럼 왜 방 사장이 대표노릇을 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술 접대도 하고 골프도 치고 그러잖습니까. 그런 쪽에는 어쩔 수 없이 남자를 내세우는 게 좋으니까요.’
‘지금까지 연구소 역시 방 대표가 실질적으로 소유한 걸로 알고 있었네요.’
‘딱히 드러내질 않으니 바깥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죠. 이러나저러나 방 사장 부부가 소유하고 있으니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거죠.’
‘…그랬군요.’
‘외부활동은 방 대표가 하지만 실질적인 경영은 백민하 부사장이 하고 있습니다. 방 대표가 껍데기인 게 외부에 알려지면 사람들이 상대를 안 해줄 테니 회사 차원에서 굳이 떠벌리고 다니지 않는 겁니다.’
‘그랬군요.’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 대찬의 얼굴에 쓴웃음이 자연스레 번졌다.
그걸 알고 방태열 대표를 보니 한없이 하찮고 한없이 한심했다.
“마누라가 벌어다준 돈으로 권윤지한테 생색내고 왈라비에 거들먹거리는 게 얼마나 신이 났을까.”
“…….”
방태열 대표는 받아칠 말을 찾지 못했다.
식은땀이 비지땀이 되어 온몸에 배어 나왔다.
“권윤지한테 사준 차, 오피스텔, 명품. 왈라비에 건넨 거액의 투자금. 백민하 부사장 몰래 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알았으면 경을 쳤을 테니까.”
“…….”
“그럼 마누라 몰래 거액의 비자금까지 조성해놨다는 거고, 그 비자금은 어디서 나왔을까.”
“…….”
“방 대표님 사비로는 택도 없잖아요. 그럼 그건 회사 쌈짓돈을 어떻게 잘 빼돌려서 횡령을 했다는 건데.”
“…….”
방태열 대표는 앉지도 서지도, 화내지도 울지도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어정쩡한 표정, 가장 어정쩡한 자세로 대찬을 바라봤다.
“아까 뭐라고 했어요? 바깥으로 흘려봤자 망신만 조금 당하고 끝날 거라고요?”
“이봐, 조 차장…….”
“망신이 뭔 줄 알아요? 망할 망 자에 몸 신 자예요. 아주 그냥 방 대표님 몸이 작살이 나는 거라고.”
“잠깐 내 말 좀 들어봐.”
“들을 것도 없어요. 무슨 말을 더 듣습니까.”
방태열 대표는 당장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턱.
그는 바닥에 무릎을 찧듯이 꿇었다.
“내 말 좀 들어줘, 응? 잠깐이면 돼. 잠깐.”
“그러시죠.”
방태열 대표의 동공이 상하좌우로 마구 흔들렸다.
그는 혓바닥을 몇 번 날름거리더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