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34화
그릇의 크기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왈라비처럼 손바닥만 한 회사도 어쩌지 못하는 주제에 누가 누구랑 입장이 똑같아?’
대찬은 떨떠름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이건 우리한테 기회란 말입니다. 해뜰녘이 우릴 돕겠다잖아요.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될 걸 왜 이렇게 딱딱하게 구십니까?”
“미안하지만 우리는 그쪽 왈라비하고는 신세가 다릅니다.”
“예?”
그는 왈라비 대표에게 따갑게 쏘았다.
“당장 돈 몇 푼에 쩔쩔매서 회사 대들보를 수렁에 처박는 그런 부실한 회사가 아니란 말입니다.”
“조 차장님, 말씀이 조금 심하시네요.”
“그쪽이 윤이영 씨한테 저지른 패악보다는 안 심하죠.”
“좀 흥분하신 거 같은데.”
“그럼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하게 범죄에 동참하자는 말을 들으면 흥분할 수밖에.”
“범죄라니, 진짜 말씀 가려서 안 합니까?”
“네가 먼저 가렸어야지.”
대찬은 왈라비 대표하고의 대화를 일방적으로 종료했다.
대찬은 커피숍 밖으로 뚜벅뚜벅 나가버렸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왈라비 대표는 당황과 분노가 교차하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이 사태를 쉽게 종결할 수도 있었다.
윤이영과의 재계약이 불발되면 적당히 다른 연예인과 계약을 맺으면 그만이다.
단가만 맞춰주면 광고 마다하는 연예인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는 당장 마음은 편해도 장기적으로는 독이었다.
윤이영과의 재계약이 불발되면 다음 수순은 안 봐도 뻔했다.
방태열 대표가 시도 때도 없이 로비를 넣을 것이다.
대찬이 거듭 거절하면 살금살금 웃는 낯은 독사처럼 굳을 것이다.
방태열 대표는 서청수 회장과도 교분이 있고, 필래 비바체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소위 ‘슈퍼 을’이었다.
만악의 근원은 방태열 대표.
그를 어쩌지 못하면 대찬은 내내 시한폭탄을 안고 갈 수밖에 없다.
‘해결해야지.’
주말.
대찬은 최재한과 만났다.
누군가 감추고 싶은 뒤를 캐는 데 선수인 직업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형사.
하나는 기자.
대찬은 남의 뒤캐기 전공인 사람이 자신의 죽마고우요 막역지우라는 게 더 없이 기뻤다.
게다가 최재한은 별종 기자였다.
기자치고 입 무거운 기자는 없다.
그런데 가뭄에 콩 나듯 입 무거운 기자가 나오는데, 개중 하나가 최재한이었다.
최재한은 보안을 요하는 일은 일언반구 외부에 발설하지 않았다.
물론 그걸 감수해도 될 만큼 대찬이 훌륭한 취재원이기도 했다.
“그래, 이번에는 누구야?”
“방태열. 해뜰녘 대표.”
“아주 거물급은 아니네.”
그 말에 대찬이 쓴웃음을 지었다.
“안두홍 잡으러 다니고 CS랑 단독인터뷰 했다고 눈이 너무 높아진 거 아니야?”
“그 사람들에 비하면 잔챙이인 건 사실이잖아.”
“그래도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나름 식품업계 공룡이라니까.”
“공룡이라고 다 같은 공룡인가, 어디. 필래가 티라노쯤 되면 해뜰녘은 이구아노돈쯤 되는 걸.”
공룡 이름은 일곱 살 때 다 까먹은 대찬은 대답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권윤지라는 배우 알아?”
“윤이영도 네가 하도 말해서 알았는데. 나 연예인에 별로 관심 없잖아. 연예부 기자도 아니고.”
“드라마 한 편, 영화 한 편, 연극 한 편 찍어본 적도 없는데 배우인데, 방 대표가 이해 안 될 정도로 팍팍 밀고 있거든.”
최재한은 피식 웃었다.
“뻔하네, 뭐.”
“뻔해?”
“응, 스폰이야.”
“아.”
최재한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확정적으로 말했다.
대찬은 최재한의 단언에 설마 그러겠느냐고 말하지 못했다.
흔한 일이었다.
돈 많은 중년이 연예인 지망생이나 화류계 종사자, 혹은 일반 대학생들에게 막대한 자금지원을 하면서 비윤리적인 교제를 하는 케이스.
적지 않았다.
경력도 일천한 권윤지가 아무리 규모가 작다지만 소속사와 계약을 맺고, 윤이영 대신 필래 비바체의 홍보모델로 내세워지는 것.
그것도 방태열 대표가 권윤지의 스폰서라면 가능했다.
하지만 대찬은 신중했다.
“정황이 그럴 듯해도 단정할 순 없어.”
“그렇지. 하지만 99퍼센트 맞을걸.”
“정보가 더 필요하겠는데.”
“평일에는 필래, 주말에는 로튼 프룻츠 때문에 눈코 뜰 새도 없는 네가 이걸 할 수 있겠어?”
대찬은 난처하게 웃었다.
“어렵지.”
“그럼 이렇게 하자.”
“어떻게?”
“내가 알아봐줄게. 대신 이 건, 내가 보도한다. 유명 식품업체 대표 A씨, 스폰서 여성 지원하려 소속사에 압력.”
“그건 안 돼.”
대찬이 말하자 최재한은 미간을 좁혔다.
“그럼 맨입으로 하라는 거야? 너한테 나쁠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노리는 건 방태열 대표 하나뿐이야. 권윤지한테까지 불똥 튀기고 싶진 않거든.”
최재한은 떨떠름한 곁눈질로 대찬을 살폈다.
“웬 말라비틀어진 개똥철학일까.”
“이게 보도되면 권윤지 인생은 그대로 나락으로 고꾸라지는 거야.”
“능력도 없으면서 백만 믿고 남의 밥상 훔쳐 먹은 대가는 치러야지.”
대찬의 심정이야 최재한하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특히 최근 윤이영과의 접점이 많아지고 있었다.
죄 없는 윤이영을 쥐고 흔드는 권윤지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남한테 원한 안 사고 싶어. 그리고 권윤지를 건드리면 방태열 대표의 꼭지가 진짜 돌아버릴지도 몰라.”
“방태열 대표 본인을 건드리는 것부터가 이미 꼭지 도는 일 아냐?”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모욕해도 된다. 하지만 내 여자만큼은 건들지 마!”
“지랄.”
“그 지랄스러운 습성을 지닌 양반들이 많다니까.”
대찬과 최재한은 싱겁게 웃었다.
한참 웃던 최재한은 다시 꼬장꼬장한 태도를 내세웠다.
“그래도 보도는 할 거야. 보도도 못하면 난 뭐 먹고 사냐.”
“이 건은 참아줘. 대신 다른 거 줄게.”
“다른 거 뭐.”
“뭐, 있겠지, 언젠간.”
“이런 사기꾼.”
최재한은 대찬에게 면박을 주면서도 선선히 그 요청을 받아주었다.
대찬이 채무를 오래 짊어지는 성격이 아니란 걸 최재한도 알았다.
그러니 여기에 들이는 수고가 마냥 헛수고가 아니었다.
“좋아, 이번엔 일단 공짜로 뛰어줄게. 이렇게 내 멋대로 취재하러 다니게 된 것도 네가 건수들 물어다준 덕이니까.”
“고맙다. 어떻게든 일감은 물어다줄게.”
“당연히 그래야지. 안 그러면 널 팔아서라도 내 할당 채울 거야.”
“기자씩이나 돼서 그런 농담은 삼가라, 좀. 진짜 그럴 거 같아서 무섭다고.”
“내가 언제 농담이라고 했어? 진짜야.”
대찬과 최재한은 서로를 보며 싱겁게 웃고는 헤어졌다.
최재한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온 건 화요일쯤이었다.
대찬은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가설이 맞았어.”
“뭐? 방태열이 권윤지의 스폰서가 맞다고?”
“응, 교차검증 된 사실이야.”
“자세히 얘기해봐.”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권윤지의 대학동문을 몇 사람을 만나봤거든.”
“응.”
“방태열인지는 몰라도 적잖이 나이 먹은 남자랑 만난 걸 봤다는 사람이 몇몇 있었어.”
대찬은 미간을 좁혔다.
“그것만으로 어떻게 믿을 수 있어?”
“몇몇은 아주 완강하게 아니라고 부인했거든? 강한 부정은 뭐다?”
“강한 긍정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섣불리 단정할 순 없어.”
“당연하지. 그래도 이쪽으로 가닥을 잡고 더 캘 수 있는 원동력은 됐지.”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 했는데?”
“일단 권윤지의 부모님에 대한 재산조사를 좀 했어. 합법적인 방법으로 했으니까 또 괜히 앞서나가지 말고.”
대찬은 싱겁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랬더니?”
“평범한 서민 가정이었어. 재산은 임대아파트 한 채, 차는 2000년 식 누비라, 아버지는 직장에서 일찍 잘려서 백수, 어머니가 김밥 장사.”
“음.”
“그런데 내가 권윤지는 어떻게 사나 체크를 했거든.”
“응.”
대찬의 궁금증은 바로 거기 쏠려 있었다.
로또라도 맞지 않은 이상, 권윤지가 부모의 형편보다 아득히 잘 살고 있다면 방태열과의 관계를 의심할 만했다.
“청담동에 오피스텔 한 채, 여기 찾아보니까 매매가는 10억이고 월세는 5천에 300이야. 전세는 7억.”
“월세라고 해도 권윤지가 자기 힘으로 샀을 리는 만무하네.”
“그렇지. 차는 크라이슬러 PT크루즈, 아무리 외제차 치고 저렴하다지만 10년 된 누비라보단 비싸겠지.”
“그렇지.”
“출퇴근하는 모습도 사진으로 찍어서 명품 잘 아는 동료한테 물어봤더니 온몸에 주렁주렁 명품이 열렸대. 명품나무래.”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거 역시 방태열 대표와의 관계를 직접적으로 입증하지는 못해.”
“그렇지. 우리 의심 많기로는 일등인 조대찬을 이 정도로 만족시킬 수는 없지. 너 오늘 저녁에 시간 되냐?”
“어, 시간은 돼.”
“밥이나 간단히 하자고 보여줄 게 있으니까.”
대찬은 퇴근하고 최재한을 만났다.
최재한은 대찬을 보자마자 인사 대신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어우.”
대찬은 그걸 보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누가 봐도 방태열 대표인 남자.
누가 봐도 권윤지인 여자.
둘이 얽혀 깊고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장소는 인적이 사라진 번화가의 뒷골목.
최재한은 그 사진을 포함해서 방태열 대표가 권윤지와 함께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는 여러 장의 사진 역시 내밀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솜씨 한번 대단하네.”
“솜씨가 아니라 노력이야. 내 얼굴 좀 봐. 다크서클 턱까지 내려오겠어.”
“고생 많았다.”
“말로 퉁 칠 생각 하지 마. 난 이 대가를 꼭 받아낼 거니까.”
“알았다니까 그러네.”
대찬은 그 사진들을 수습해 자신의 가방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최재한은 대찬의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근데 그 사람, 희한하더라?”
“뭐가?”
“내가 권윤지 사는 청담동 오피스텔에 차 대고 잠복근무한 게 꼬박 나흘이란 말이야.”
“응.”
“그런데 방태열 그 양반, 나흘 중에 사흘이나 나타났어. 시간이 들쭉날쭉했어. 여기 시간 정리한 수첩.”
최재한은 수첩 한 장을 북 뜯어 대찬에게 내밀었다.
대찬은 그걸 유심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첫째 날, 오후 8시부터 새벽 1시. 둘째 날, 오후 3시부터 오후 5시 반. 넷째 날, 오후 4시부터 오후 9시 반.”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최재한은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왜?”
“이상하지 않냐? 해뜰녘이면 큰 회사야. 그런 큰 회사를 책임지는 대표가 땡땡이치는 고딩처럼 애인이나 만나고 다니는 게 맞는 거야?”
“그렇네. 이상하네. 오후 3시면 점심 먹고 트림 한번 하고 바로 왔다는 건데.”
“그렇지.”
“알았어. 이 부분도 유념할게.”
대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최재한이 찢어준 수첩 한 장은 양복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최재한은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보도도 안 하겠다, 그래서 이제 이걸로 어쩔 건데?”
“이런 종류의 건수를 이용하는 건 둘 중 하나 아니야? 터트리든지, 아니면 터트린다고 협박하든지.”
최재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지. 근데 네가 가진 건 녹취하고 사진뿐이잖아.”
“응, 파괴력은 충분하지만 좀 애매해. 이걸로 방태열 대표를 움직일 수 있을지.”
“내 말이. 방태열 대표가 네 맘대로 해라, 터트리려면 터트려라 해버리면 너 꼴이 되게 우스워진다니까.”
대찬은 피식 웃었다.
“나도 알고 있어. 잘 연구해볼게. 우리 최재한이가 기껏 물어온 것들을 허망하게 날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래야지. 그래야 나도 나중에 빚 갚으라고 떳떳하게 독촉할 거 아니야?”
“그건 이 건의 성공여부랑은 별개야. 약속은 지킨다니까.”
대찬은 최재한과 술 한 잔도 나누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무기는 갖춰졌다.
이제 이 무기의 파괴력을 극대화시킬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단서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되었다.
출근한 대찬은 서원웅과 종종 독대했다.
둘이 점심을 같이 먹는 일도 허다했다.
이날도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서원웅이 얘기하던 신변잡기 중에서 대찬의 이목을 사로잡는 대목이 있었다.
“이번에 닷새 일정으로 상해 다녀와야 해.”
“상해는 갑자기 왜 가십니까?”
“식품유통협회에서 업계 대표들을 모아서 닷새 간 견학을 비롯해서 여러 일정을 소화한다고는 하는데. 이게 좀…….”
서원웅이 영 껄끄럽다는 얼굴을 하자, 대찬이 웃으면서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