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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32화 (231/556)

난 할 수 있어 232화

대찬은 방태열 대표의 소위 ‘꼬장’의 피해자는 자신이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대찬은 그녀에게 다가가 멋쩍게 웃었다.

“여사님, 먼저 들어가세요. 제가 간단히 안주 만들어서 내갈게요.”

“아유, 귀찮은 사람한테 물렸어.”

“뭘요. 샐러리맨한테는 익숙한 일이죠.”

“저 방 사장, 회장님이 자주 데리고 오시는데, 올 때마다 코가 비뚤어져라 마신다니까.”

“고역이시겠습니다.”

박 선장의 아내는 방태열 대표 쪽을 잠깐 쏘아보고 목소리를 죽였다.

“나는 이만 들어갈 테니 내 고역은 끝났죠. 그쪽 고역은 이제 시작이라 문제지.”

“하하! 잘해보겠습니다.”

박 선장의 아내는 웃으면서 속닥거렸다.

“내가 팁 하나 줄까요?”

“팁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망할 자식이 뻗어야 술자리가 끝날 거 아니에요.”

“그렇죠.”

“방 사장 주량이 센 거 같지만, 저거 다 물의 힘이거든.”

“물의 힘이요?”

“네. 술 마실 때 물을 많이 마시면 1병 먹던 사람이 2병 먹게 되기 마련이에요.”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그렇긴 하죠.”

“그런데 방 사장은 다른 사람보다 효과를 더 톡톡히 보는 모양이에요.”

“그렇습니까?”

“지난번 물이 없을 때에는 신데렐라처럼 12시 종 치기 전에 뻗어버렸거든.”

대찬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그러니 은근슬쩍 물을 숨겨봐요. 일찍 술판 끝낼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조언해주셔서.”

박 선장의 아내는 눈을 찡긋거렸다.

“이 별장에 놀러오는 인간 중에 싸가지 탑재한 분은 드물어서요.”

“저야 싸가지 없으면 못 살아남는 아랫것이니까요.”

“이유야 뭐든 호감이 가네요, 젊은 차장님한테. 잘해봐요.”

박 선장의 아내는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대찬은 그녀가 만들어놓은 음식들을 다시 데워 방태열 대표에게 내갔다.

“뭐 이렇게 늦게 가져와?”

“죄송합니다. 손이 느려서.”

대찬은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물통을 상 아래로 치워버렸다.

방태열 대표가 화장실에 간 후에는 아예 도로 냉장고에 갖다 넣었다.

효과는 좋았다.

방태열 대표는 몇 잔을 더 마시더니 몸을 가누지 못했다.

“어, 어어… 오늘은 술이 좀 안 받네.”

“주무시겠습니까?”

“무슨 소리! 이럴 때 술맛이 제일 좋은 법인데!”

“아, 예. 드시죠.”

물 없이도 술 잘 마시는 대찬은 수월하게 술잔을 넘겼다.

방태열 대표는 눈을 힘겹게 감았다 떴다.

더는 감당하기 어려운 품이었다.

그는 풀린 혓바닥으로 말했다.

“조 차장, 윤이영 말이야.”

“…또 그 말씀이십니까?”

“이봐! 사람 말을 일단 들어봐야 할 거 아냐.”

대찬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보시죠.”

“만약, 만약에, 필래랑 더 계약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쩔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다른 사람을 알아봐야지.”

어차피 벌어지지도 않을 일.

대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그럼 이 사람은 어때?”

방태열 대표는 웃으면서 슬그머니 사진 1한 장을 꺼냈다.

20대 여성의 사진이었다.

대찬은 사진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얼굴은 물론 아름다웠지만 특징이 없었다.

윤이영에게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아우라가 없었다.

표정도 밋밋하고 작위적.

칭찬할 구석이 없고 폄하하자니 예의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찬의 감상은 짧을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우시네요.”

“그렇지? 윤이영하고는 게임도 안 되지?”

대찬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하, 근데 이분은…….”

“아, 뭐 그냥 어떤가 해서 조 차장 의견 물어본 거야. 별 사이는 아니고.”

‘누가 별 사이라고 물어봤나.’

방태열 대표는 자진해서 별 사이는 아니라고 둘러댔다.

그러니 유독 더 별 사이처럼 느껴졌다.

“그렇군요.”

“이 친구를 좋게 평가하는 거 보니 조 차장 안목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윤이영한테 후하네.”

“…….”

대찬은 미심쩍은 기운을 느꼈다.

이렇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건 모종의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대찬은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얼른 이 불쾌한 대화를 그만두고 싶었다.

방태열 대표가 함부로 필래 비바체의 내부결정에 간섭하는 것도 불쾌했다.

아무렇게나 윤이영을 깔아뭉개는 것도 불쾌했다.

‘자기가 뭔데 윤이영한테 난리야.’

대찬은 불쾌한 감정을 숨기려 입술을 꼭 깨물었다.

좋은 말도 세 번까지 좋은 법이다.

내키지도 않는 소리를 주야장천 들으려니 대찬의 참을성이 몇 번씩 동났다.

“아무튼 이 친구도 나름 매력이 있다는 거지?”

“네, 나름.”

대찬은 일부러 ‘나름’을 힘주어 발음했다.

방태열 대표는 어흠, 헛기침을 했다.

“그… 내가 거래를 하나 제안할까 하는데.”

방태열 대표는 무언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했다.

술 취한 정신을 최대한 정상으로 붙들려고 안간힘을 썼다.

‘거래?’

대찬은 수상한 냄새를 맡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요한 말씀이니 화장실 다녀와서 맑은 정신으로 듣겠습니다.”

“어? 어, 그래…….”

대찬은 화장실로 들어가 휴대폰의 녹음버튼을 눌렀다.

방태열 대표도 닳고 닳은 사람인지라 의심할 법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술 때문에 정신이 혼탁해져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 않았다.

대찬의 주머니에서 방태열 대표의 목소리가 녹음되기 시작했다.

방태열 대표는 아무 의심 없이 말했다.

“자네, 오늘 이 술 한잔 값으로 우리 회사 제품 염가에 들이는 거, 그거 수지맞은 거래지?”

“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거랑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달라고.”

“말씀해보십시오.”

“만약 윤이영 쪽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하면 어차피 새로 모델을 구해야 하잖아?”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은 소리에 대찬은 부아가 치밀었다.

그래도 도대체 이 인간의 속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꾹 참았다.

“네, 그렇죠. 만약에 그렇다면요.”

“그럼 내가 아까 보여줬던 그 친구는 어때? 솔직히 자격미달은 아니잖아.”

“자격미달은 아니지만…….”

“거 홍보모델이 누구든 매출에 얼마나 영향이 있다고 그러나. 사건 터지기 전 원두표 같은 정도가 아니면.”

“그래서 사진 속의 그분을 모델로 기용하면, 제게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방태열 대표는 어흠, 헛기침을 하며 대찬에게 바짝 다가와 앉았다.

술 냄새가, 치아에 낀 안주가 부패하는 냄새와 섞여 풍겼다.

대찬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호흡했다.

방태열 대표는 풀린 눈으로 대찬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솔직히 필래가 잘돼봤자 자네한테 좋을 건 없잖아?”

“회사가 좋으면 저도 좋지만 직접적으로 좋은 건 없죠.”

“그러니까. 하지만 로튼 프룻츠라면 얘기가 다르겠지.”

“로튼 프룻츠요?”

대찬의 안색이 조금 달라지자 방태열 대표는 대찬이 미끼를 물었다고 확신했다.

“그래. 우리 회사에서 로튼 프룻츠를 팍팍 밀어줄게. 자네가 말 한마디만 보태면 되는 거야.”

“팍팍 밀어준다면, 가령……?”

대찬이 슬쩍 질문을 던지자 방태열 대표는 신이 나서 말했다.

“커피 생두만 납품해서 돈이 되겠어? 우리랑 업무협약 맺고 캔 음료로도 출시하자고. 우리 업고 가면 거래처도 쉽게 확보할 수 있지.”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사진 속의 그분이 누구길래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시는 겁니까?”

“자네가 그것까지 알 필요는 없는 거 같은데.”

“네, 뭐, 그렇긴 합니다만. 사진 속의 그분이 CF모델로 적절하다면, 해뜰녘 모델로 내세우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린 신문광고는 내도 TV광고는 잘 안 내.”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시군요.”

“빨리 결정이나 내려. 좋은 조건이야.”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필래에 불이익을 끼치면서 로튼 프룻츠의 이익을 도모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봐, 그게 왜 불이익이야!”

“불이익이죠. 사진 속의 그분, 외람되지만 윤이영 씨 발끝에도 못 미치거든요.”

“야! 윤이영이 회사에서 안 하겠다고 하면 어쨌든 다른 모델을 구해야 할 거 아니야!”

이제 방태열 대표는 대찬을 조 차장, 자네도 아닌 ‘야’로 호칭했다.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꾸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전제를 말씀하시는데요.”

“뭐가 이해 못할 전제야?”

“윤이영 씨는 저희 회사와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렇게 갑자기 계약을 해지하자고 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윤이영은 그럴지 몰라도 윤이영의 소속사는 그렇지 않을지도.”

“글쎄요. 윤이영 씨가 속한 중소 소속사 입장에서는 저희와의 계약이 천금처럼 귀할 텐데요.”

방태열 대표는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볼살을 씰룩거렸다.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고.”

그렇게 말하는 방태열 대표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저 아저씨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대찬은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윤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이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조 차장님이 먼저 전화를 다 주시고, 오늘은 일진이 좋네요?”

“윤이영 씨, 혹시 이번 주에 시간 되십니까?”

그 말에 윤이영의 목소리가 확 밝아졌다.

“웬일이래요?”

“하하, 식사 대접하고 싶어서요.”

“음, 혹시 금요일 저녁 괜찮으세요?”

“네. 그때 뵙죠.”

윤이영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식사약속처럼 말했지만, 대찬의 마음은 심각했다.

방태열 대표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대충 짐작이 가는 까닭이었다.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주말에 만난 윤이영은, 전화로 얘기를 나눌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대찬을 보자마자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축 처진 입가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 차장님, 오늘 저랑 소주나 한잔하실래요?”

“그러시죠.”

대찬과 윤이영은 잔을 기울였다.

윤이영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사석에서 대찬을 만나는 건 이번이 겨우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줄리아가 동석했으니 단둘이 보는 건 이번이 처음.

그런 자리에서 덜컥 심각한 말을 뱉는다면.

대찬이 자신을 꺼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렇게 말을 주저하는 윤이영을 보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대찬은 윤이영이 말의 물꼬를 트도록 도와주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예? 아…….”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렇게 끙끙 앓으시는 게 더 보기 안 좋아요.”

“그런가요.”

윤이영은 멋쩍게 웃었다.

대찬은 조금 더 윤이영을 도와주었다.

“혹시 회사 쪽에서 안 좋은 쪽으로 푸시가 있었나요?”

“그,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역시.’

방태열 대표가 윤이영의 기획사 쪽에 모종의 압력을 가한 게 분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알짜기업이라지만 일개 중견기업 대표일 뿐이다.

그런 그가 기획사에 무슨 방법으로 압력을 가한단 말인가.

대찬은 윤이영의 말을 더 듣고 싶었다.

“말씀해보세요. 무슨 일이에요?”

“일단 한 잔 마셔요.”

윤이영은 잔을 내밀었다.

대찬은 엷은 웃음기를 머금으며 건배했다.

윤이영은 고개를 젖혀 휙, 잔을 비웠다.

그리고 탁,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가 이번에 여배우 1명하고 전속계약을 체결했대요.”

“여배우요? 제가 알 만한 분인가요?”

“아뇨. 이름은 권윤지라고 하는데, 못 들어보셨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못 들어봤어요.”

“뭐, 이 회사가 워낙 영세하니까 그럴 순 있어요. 저도 처음 계약했을 때는 무명이었으니까.”

대찬은 윤이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빈 잔을 채워주었다.

윤이영은 공손히 잔을 받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딱히 연기를 공부한 것도 아니고, 연극무대 한번 올라간 적도 없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리 무명이라 해도 해오던 가락이 있어야 배우라고 할 텐데 말이에요. 그렇죠?”

“제 말이 그 말이에요. 뭐, 그거야 괜찮아요. 저한테 피해가 오는 건 아니니까.”

대찬은 팔짱을 끼며 윤이영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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