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31화
사람들이 운집하자 서청수 회장이 마지막으로 나타났다.
아마 재벌총수의 체면을 생각한 그는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차 안에서 머물다가 나왔을 것이다.
그건 일종의 배려이기도 했다.
서청수 회장이 먼저 나와 멀뚱히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면, 지각한 사람은 몸 둘 바를 몰랐을 테니까.
아는 얼굴들과 악수를 나눈 서청수 회장은 대찬에게도 웃으면서 손을 뻗었다.
“우리 배낚시 뉴 페이스.”
“회장님.”
대찬은 공손히 서청수 회장의 손을 잡았다.
서청수 회장은 잡은 손을 두 번 흔들더니 그대로 대찬을 방태열 사장 앞으로 이끌었다.
“방 사장, 여기는 비바체 조대찬 차장. 안면 있죠?”
“아, 그렇고말고요. 우리 업계에서 아주 명성이 자자하신 분인데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표님께서는 상당히 실력 있는 조사라고 들었습니다. 초보 좀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하하하! 벌써부터 사탕발림은. 그럽시다. 고기 잡으면서 재미없는 일 얘기도 좀 하고요?”
“하하.”
완도에 모인 일행은 배를 타고 완도에서도 멀리 떨어진 섬으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자 반건조 우럭을 닮은 중년 남자가 서청수 회장을 깍듯이 맞이했다.
“오늘도 귀한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선장이 왜 고마워해? 박 선장 보러 온 것도 아닌데. 나 볼락 보러 온 거야.”
“아이구, 그럼 볼락한테 감사해야겠군요. 고 녀석들 덕분에 돈푼 짭짤하게 챙기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돈 내는 사람은 나니까.”
서청수 회장과 박 선장은 격의 없이 아웅다웅했다.
그들이 그렇게 선두를 형성해 앞장서자, 나머지 사람들도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그 뒤를 따랐다.
대찬의 짝꿍은 방태열 사장이었다.
둘만 남게 되자 방태열 대표는 바로 말을 편하게 했다.
“그래, 듣자하니 회장님 배려로 다른 회사 공동대표도 겸임하고 있다던데.”
“네, 감사하게도요. 이름만 공동대표이지, 하는 것도 없고 규모도 밤톨만 합니다.”
“조 차장 수완이면 밤톨이 금방 밤나무 될 거야. 그래, 무슨 사업 하나?”
방태열 대표는 대찬의 사업에 관심을 표했다.
긍정적 의미로 ‘미친 또라이’로 통하는 대찬이었다.
그런 그가 무슨 사업에 손을 댔는지 방태열 대표는 순수한 호기심이 동했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영세하게 해외에서 커피 생두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오, 그래? 나름 레드오션일 텐데 의외의 아이템을 잡았군.”
“파푸아뉴기니에서 질 좋은 원두를 염가로 들여오고 있습니다. 풋내기치고는 아직 잘 버티고 있습니다.”
방태열 대표는 껄껄 웃었다.
“그래? 제품군은 겹치지 않지만, 어쨌든 동종업계 종사자군. 그렇다니 더 반가워.”
“감사합니다. 동종업계 선배로서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지도편달은 무슨.”
방태열 대표는 기분 좋게 웃었다.
박 선장이 서청수 회장을 위해 준비한 선박은 20명을 넉넉히 품을 정도로 컸다.
배는 물살을 가르며 푸른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코에 스미는 짠 내가 점점 짙어졌다.
대찬은 주섬주섬 구명조끼를 입었다.
그런데 구명조끼를 입는 사람은 대찬을 포함해 겨우 서너 명에 불과했다.
대찬이 방태열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님, 구명조끼 안 입으십니까?”
“하이고, 그렇게 초짜 티를 내고 싶어? 제 몸 챙기기에 급급하면 물고기도 제 몸 챙긴다니까.”
“하하…….”
그럼 제 몸부터 챙겨야지 생선부터 챙기나.
애초에 낚시가 목적이 아니었던 대찬은 멋쩍게 웃으면서도 구명조끼의 버클을 채웠다.
박 선장은 훌륭한 선장이었다.
과연 번번이 서청수 회장이 찾을 만했다.
그는 기가 막힌 포인트에 배를 멈췄다.
작은 볼락이 연거푸 올라왔다.
대찬 역시 손맛을 좀 봤다.
박 선장의 수완 덕택인지 초심자의 행운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찬의 낚싯바늘에 걸린 건 볼락이 아니라 제법 사이즈가 되는 우럭이었다.
표준명은 조피볼락이니, 볼락낚시를 가자던 서청수 회장의 말을 거역하진 않은 셈이었다.
방금 바다에서 건져진 우럭은 붉은 아가미를 벌름거리며 마구 요동쳤다.
방태열 대표는 그걸 보고 박수를 쳤다.
“여어, 조 차장, 첫 수 축하해!”
“감사합니다, 대표님.”
“거, 맛 좋게 생겼다. 금강산도 식후경인데 그걸로 반주나 한잔할까?”
“아, 예. 그러시죠.”
대찬이야 어떻든 좋았지만, 1마리 잡자마자 술부터 찾는 성질이 경탄스러웠다.
방태열 대표는 챙겨온 가방에서 회칼과 도마를 꺼냈다.
대찬의 눈이 커졌다.
“이걸 들고 다니십니까?”
“그럼! 여기 사람이 얼만데, 선장이 어느 세월에 내 거 썰어주고 있느냔 말이야. 앓느니 죽지. 그냥 내가 썰어 먹는 게 나아.”
“대단하십니다.”
“별게 다.”
방태열 대표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 웃고, 선내에 비치된 아이스박스에서 소주를 꺼내왔다.
‘나도 참 답이 없네.’
대찬은 아저씨들이 쓰는 말로 ‘히야시 된’ 소주에 침이 꼴깍 넘어가는 스스로가 우스워 쓴웃음을 지었다.
우럭은 잡혀 올라온 지 3분 만에 회 한 접시로 변했다.
우럭의 슬픈 대가리는 포 떠진 자신의 살점을 보며 뻐끔, 뻐끔 무의미한 호흡을 했다.
대찬과 방태열 대표는 하등생물의 정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갑판에 주저앉아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소주를 꿀떡 넘기고 차진 우럭 살을 초장에 푹 찍어 우물거렸다.
치아에 탱탱하게 부딪치는 살결이 절로 다음 잔을 불렀다.
그걸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본 서청수 회장이 푸하하 웃었다.
“아니, 방 사장은 벌써 술판이에요?”
“취기가 좀 올라야 생선들도 술 냄새 맡고 살금살금 올라온다니까요.”
“암튼 방 사장 술사랑은 알아줘야 해.”
서청수 회장은 피식 웃고 다시 낚시에 집중했다.
방태열 대표는 두 번째 잔을 쾌속으로 넘기며 말했다.
“조 차장, 그쪽 CF모델 있잖아.”
“CF모델이요? 네, 윤이영 씨 말씀이시죠.”
방태열 대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윤이영. 듣자하니 조 차장이 강력 추천했다며?”
“예, 그랬죠.”
“왜 그랬어?”
“예? CF모델에 적절할 거 같아서 추천했습니다만.”
“에이, 윤이영이?”
그는 입술에 묻은 초장을 혀로 살짝 핥고 말했다.
대찬은 그의 눈빛에 일순 진중함이 깃든 걸 확인했다.
“윤이영 씨는 갑자기 왜…….”
“좀 그렇지 않나?”
“좀… 그렇다뇨?”
방태열 대표는 소주로 입을 헹구고 말했다.
그가 입을 벌릴 때마다 약한 에탄올 냄새가 났다.
“내 생각엔 윤이영 이미지가 필래마트하고 좀 안 어울리는 거 같아.”
“예?”
“그렇잖아? 윤이영이 예쁘긴 한데, 지금까지 영화에서 맡은 배역이 그래서 그런가, 일견 음산하기도 하고 좀…….”
윤이영과 여러 번 만나본 대찬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의견이었다.
특히 윤이영이 될성부른 떡잎이란 걸 대찬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방태열 대표의 의견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괜한 어깃장으로 분위기를 망칠 생각은 없었다.
대충 눙치고 넘어갈 작정이었다.
“그런가요. 하하.”
“그렇게 그런가요, 하면서 넘어갈 문제가 아니야. 조 차장도 직급은 차장이지만 필래 비바체 경영에 책임 있는 사람 아닌가?”
“…맞습니다만, 윤이영 씨는 저희 브랜드이미지 제고에 크게 기여하고 계십니다.”
방태열 대표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이봐, 방금 전에 지도편달 부탁한다고 해놓고 벌써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건가?”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 일단 마셔.”
방태열 대표는 거푸 세 잔을 마셨다.
대찬은 한 잔만 마셨다.
그러자 방태열 대표는 불편한 눈총을 쐈다.
‘젠장.’
대찬은 방태열 대표의 압박에 두 잔을 더 마셨다.
방태열 대표는 그것으로 대찬을 ‘교육’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조 차장, 내 말 잘 생각해봐. 윤이영은 안 어울린다니까?”
“알겠습니다. 대표님의 말씀, 금과옥조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대찬이 공손히 대꾸하자 방태열 대표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윤이영하고 계약이 얼마나 남았지?”
“다년계약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기본 다년계약이지만 그건 모델료만 동결하는 것이고, 1년마다 쌍방이 협의해서 계약존속 여부를 결정한다고 하던데?”
대찬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어떻게 그렇게 상세히 아십니까?”
“그저 떠도는 풍설을 주워들은 거지.”
“그렇다면 그 풍설을 유포한 사람을 잡아 족쳐야겠군요. 그건 대외비인데.”
“하하, 뭘 그럴 거까지야. 암튼 내 말이 맞다는 거지? 알았어.”
방태열 대표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더 이상 윤이영의 얘기를 하지 않았다.
대찬은 미심쩍었다.
방태열 대표가 윤이영과의 계약내용을 소상히 알고 있는 것도 그랬고, 그걸 이제 와 대찬의 앞에서 구구절절 읊는 심리도 미심쩍었다.
4시간여의 낚시가 끝나고 사람들은 뭍으로 돌아왔다.
조과는 나쁘지 않았다.
대찬도 방태열 대표와 나눠먹은 우럭 1마리를 포함해 볼락 20마리와 갑오징어 1마리, 불가사리 여러 마리를 낚았다.
다른 이들도 만족하면서 하선했다.
박 선장은 아이스박스 가득 생선을 채워가는 이들을 보고 뿌듯하게 웃었다.
남자들이 모여서 술 마시는 것밖에는 더 할 게 없었다.
방태열 대표는 대찬이 본 것처럼 상당한 말술이었다.
한 잔에서 다음 잔으로 넘어가는 박자도 빨랐다.
남들 석 잔 마실 때 소주 1병을 깨끗이 비웠다.
박 선장의 손맛 좋은 마누라가 이들의 음식을 담당했다.
잡은 생선을 회 치고, 무치고, 굽고, 조렸다.
거기에 대합으로 뽀얀 국물을 우리고, 갑오징어를 숙회로 내왔다.
서청수 회장은 역시 사모님이 일류 셰프보다 낫다면서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안주발이 서니 다시 술을 불렀다.
그렇게 새벽까지 술자리는 이어졌다.
서청수 회장은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이들도 굳이 완전히 풀어지도록 먹고 싶지는 않았다.
슬금슬금 잠자리를 찾아갔다.
완도에서 서울까지 속이 거북한 채로 올라가고 싶지는 않았다.
대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바로 옆의 방태열 대표가 그를 올려다봤다.
“어디 가?”
“예? 아, 저도 잠자리에 들까 하고…….”
“뭐? 이제 시작인데!”
“하하… 취해서 더 마시기 어렵습니다.”
대찬은 그렇게 둘러대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방태열 대표의 고집도 여간이 아니었다.
방태열 대표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린놈의 새끼가 싸가지 없게!”
방태열 대표의 악력에 대찬의 몸이 휘청거렸다.
순간 욱, 화가 치밀었지만 대찬은 차분하게 말했다.
“대표님, 취기가 좀 오르신 거 같은데, 이쯤 드시고 이만 주무시죠.”
“간도 싱싱한 놈이 뭐 벌써 술잔을 내려놔? 이리 앉아! 마셔!”
방태열 대표는 강제로 대찬을 주저앉혔다.
대찬은 바닥에 앉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자기가 말하던 활달한 본성인가.’
방태열 대표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대찬을 응시했다.
꼴불견이었다.
방태열 대표는 주취자 특유의 크고 혀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야! 나랑 술 마시면 이번 달 필래마트에 우리 제품 반값으로 들여줄게!”
“정말입니까?”
“그래, 인마! 됐냐! 이제 마시자고.”
대작 몇 번 해주고 그런 조건이라면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
해뜰녘은 방태열 대표 일가가 지분 100퍼센트를 보유한 회사다.
그렇게 하려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주취자는 자신에게 터무니없이 불공정한 약속을 기꺼이 하지만, 다음 날 그 약속을 쉽게 어긴다는 것이었다.
“녹음해도 됩니까?”
“이런 개새끼가, 술맛 떨어지게!”
“녹음 안 해주시면 안 마십니다.”
대찬이 배짱을 튕기자 방태열 대표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찬이 여간해선 물러날 태세가 아니자, 귀찮다는 듯 그의 말대로 해주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술병을 들었다.
“그럼 맛있게 드시죠.”
“좋우아! 이봐, 마담! 여기 안주 좀 새로 내와!”
‘마담은 지미럴.’
방태열 대표를 보고 박 선장의 아내는 눈살을 찌푸렸다.
서청수 회장을 전담하던 그녀였다.
방태열 대표쯤이야 하찮았다.
계룡대에 일하는 병사들이 원스타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경례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