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30화
호주의 파트너인 조나단 테일러도 뛰어난 수완가였다.
파푸아뉴기니의 현장 관리자를 통한 관리.
경비행기를 통한 파푸아뉴기니 국내 수송.
수도 포트모르즈비에서 선적하여 한국과 호주로의 수송.
그리고 한국에서의 판로 개척.
제법 솜씨 좋은 대찬과 민승기였지만, 둘의 힘만으로 만만치 않은 업무가 연속되었다.
보람은 있었다.
“카페베네핏에서 스페셜티 라인업을 꾸리는데, 우리 제품을 후보에 넣었대.”
“잘됐네요. 승산이 있을까요?”
“그쪽에서 일단 미팅은 해보자는데, 내부 반응이 나쁘지 않다네.”
“넵. 제가 만날까요?”
“아니야. 이미 내가 나가는 것으로 세팅해놨어.”
“네. 고생 좀 해주세요. 카페베네핏 계약 따내면, 그걸 무기로 다른 체인과의 계약도 주력해주세요.”
“이 계약만 성사되면 일단 한숨 돌릴 텐데 바로 다른 파트너를 찾으라고?”
“네,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카페베네핏은 토종 카페 브랜드로, 엄청난 점포확장을 통해 점포 숫자로는 국내 1위를 고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 그들이 밀물처럼 일어나 썰물처럼 몰락한 걸 알고 있었다.
그러한 것이 두 번째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계약을 위해 몇 번 카페베네핏 측과 접촉해본 결과, 대찬은 역시 고개를 저었다.
두 번째 삶에서도 그들이 견실한 성장을 이어나기는 글렀다고 판단했다.
주먹구구식의 소기업 시스템.
그 후진적 방식이 몇 번의 접촉만으로도 상대방인 대찬에게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1위 브랜드와의 계약을 따냈다는 건 상당한 강점이에요. 그걸 기반으로 다른 채널도 뚫어놔야 안정적이죠.”
“교활한 토끼는 굴을 3개 파놓는다?”
“네, 바로 그겁니다.”
죽이 잘 맞으니 업무는 착착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대찬은 필래와 로튼 프룻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
대찬이 나서서 필래 몫으로 확보된 쿠바산 원두 수입채널을 로튼 프룻츠에 위탁하기로 결정했다.
필래 비바체는 마트사업부와 택배사업부 간의 긴밀한 운송체계 확립에 주력하고 있었다.
대찬은 그 사실을 내부자로서 알고 있었다.
이를 위해 벌여놓은 사업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
해외제품을 직수입하는 건 필래 비바체의 체질에 어울리지 않았다.
대찬은 이를 로튼 프룻츠에 위탁하도록 유도했다.
물론 그게 대찬의 권위를 이용한 억지 접붙이가 되면 곤란했다.
작은 이득을 탐하려다 발목을 옭아매는 꼴이 되는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대찬은 자리만 알선해놓고 민승기와 필래 비바체가 치열한 협상을 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어떠한 외력도 행사하지 않았다.
서로 최대의 이익을 도모하여 합치된 결과를 이끌어내도록 했다.
로튼 프룻츠는 새로운 판로를 얻어냈다.
필래 비바체는 회사 내부의 거품을 빼면서도 합리적인 가격에 안정적으로 쿠바산 커피제품을 공급했다.
자리는 대찬이 깔았지만, 거기에는 안두홍의 페이퍼컴퍼니와 같은 옥상옥의 부당거래가 없었다.
로튼 프룻츠는 파푸아뉴기니와 쿠바의 커피 수입채널을 확보했다.
그동안 파푸아뉴기니와 쿠바산 원두는 한국으로 잘 들어오지 않았다.
이에 로튼 프룻츠는 이 두 국가의 원두를 거의 독점적으로 수입하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지만 수입절차가 까다로운 커피를, 로튼 프룻츠는 최대한 염가에 제공했다.
당장의 이익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 목적이 있었다.
그렇게 로튼 프룻츠는 커피 생두 수입업체로 번듯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대찬은 로튼 프룻츠를 단순한 커피 도매상에 머물게 할 생각이 없었다.
‘이건 시작이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대찬은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장과 로튼 프룻츠 공동대표를 겸하는 입장이었다.
이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균형임을 대찬은 알았다.
‘이게 가능한 건 어디까지나 서청수 회장의 묵인이 있기 때문이야.’
만일 대찬이 필래의 직원으로 이전보다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서청수 회장이 헛기침을 할 것이다.
그럼 대찬은 필래를 퇴사하거나 로튼 프룻츠의 경영에서 한 발짝 멀어지거나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대찬은 둘 다 원하지 않았다.
필래에서 불명예퇴장하는 건 그야말로 불명예다.
게다가 로튼 프룻츠의 경영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로튼 프룻츠 경영의 최전선에서 물러나는 건 병정개미 노릇에 열중하겠다고 베짱이 노릇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 또한 원치 않았다.
그러니 서청수 회장의 묵인이 지속되도록 필래 비바체에도 같은 양의 열정과 노력을 쏟아야 했다.
그런 대찬의 노력을 서청수 회장도 모르지는 않았다.
서청수 회장은 직접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회장님.”
“조 차장, 요즘 눈코 뜰 새 없겠어?”
로튼 프룻츠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네. 최대한 우리 회사 일에 누가 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우리 회사란 필래를 말하는 건가, 아니면 로튼 프룻츠를 말하는 건가?”
“물론 필래입니다, 회장님.”
“그래. 나도 에피니키온을 탈퇴하고 어엿한 로튼 프룻츠의 일원이 아닌가. 그러니 조 차장, 아니 조 대표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네.”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로튼 프룻츠 두 젊은 사장님들 수완이 여간 아니야. 이거 나도 미리 잘 보여야 할 거 같은데.”
“저희 수완이 대단해봤자 회장님 발끝에나 미치겠습니까.”
“하하, 나는 아버지 유산을 받았으니 출발선이 다르지.”
“저희 역시 필래의 지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음, 그래도 차원이 다르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조 대표한테 잘 보이려고 내가 낚싯배 한번 태워드리려고 하는데.”
서청수 회장의 말에 대찬은 귀가 쫑긋 섰다.
낚싯배 한번 태워드린다는 말은 가볍게 흘려들을 일이 아니었다.
서청수 회장은 배낚시에 측근을 초대해 그룹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그 자리에 대찬을 초대한 것이다.
대찬은 침을 꼴깍 삼키고 서청수 회장에게 물었다.
“감성돔 잡으십니까, 아님 볼락 잡으십니까?”
“하하하! 자네 생각보다 내밀한 사정을 잘 알고 있군.”
“하하…….”
감성돔을 잡느냐, 볼락을 잡느냐.
필래그룹 수뇌부에서 곧잘 쓰이는 은어였다.
서청수 회장이 감성돔을 잡으러 간다고 하면 그룹의 중대사를 논의한다는 걸 의미했다.
볼락은 중대사보다는 가벼운 친목도모나 주변 잡무에 치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대찬은 이 말을 첫 번째 삶에서 귀동냥으로 알았다.
유백기가 자신이 얼마나 그룹 수뇌부와 가까운지 자랑하려고 떠들어대던 말을 주워들었던 기억이었다.
물론 실상은 유백기 역시 남에게 알음알음으로 듣고 떠벌렸던 것.
그래도 서청수 회장의 반응을 보아하니 틀린 정보는 아닌 듯했다.
서청수 회장이 대찬에게 말했다.
“너무 심각할 거 없어. 볼락 잡을 거니까.”
“다행이군요. 하마터면 숨 막힐 뻔했습니다.”
“조 차장 담력 센 거 다 아는데 엄살은. 아, 자네 혹시 방태열 사장이라고 아나?”
서청수 회장의 질문을 받은 대찬은 곰곰이 생각했다.
어디서 들은 이름이었다.
‘아, 생각났다.’
대찬은 서청수 회장에게 대답했다.
“네. 지난번 김태준 사장님과 코다(KODA) 정기회의에 참석했을 때 뵈었던 분입니다. 해뜰녘 대표시죠.”
“자네 기억력도 어지간하군.”
“하하, 뵈었을 때 워낙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맞아. 해뜰녘은 중견기업이긴 하지만, 우리의 중요한 사업파트너야. 개인적으로도 가깝고.”
“그렇군요.”
“식품업체이니만큼 비바체 쪽과도 안면을 잘 터놓으면 좋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그러니 자네가 비바체 얼굴로 방 대표 전담마크 하도록 해.”
“그러겠습니다, 회장님.”
“그럼 주말에 보지.”
서청수 회장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찬더러 비바체 얼굴이라고 하니 서원웅은 배낚시에 참석하지 않는 듯했다.
방태열 대표와의 교분은 대찬으로서도 바라마지않는 바였다.
방태열의 해뜰녘은 중견기업이었다.
하지만 서청수 회장의 말대로 식품업계에서는 대기업 못지않은 저력을 과시했다.
로튼 프룻츠는 적극적으로 커피 생두를 수입하고 있었다.
당장의 분류를 식품업이라고 해도 좋았다.
따지고 보자면 식품업계의 터줏대감인 해뜰녘은 로튼 프룻츠의 대선배 격이었다.
대선배와 안면을 터서 나쁠 건 없었다.
모름지기 누굴 만나든, 그와의 좋은 관계를 원한다면 일단 말이 끊이지 않아야 한다.
데면데면한 침묵은 관계를 시름시름 앓게 만드는 독이다.
말이 많으려면 정보가 많아야 한다.
대찬은 허벅지를 벅벅 긁으며 인터넷을 켰다.
주마간산 격이나마 방태열 사장의 정보를 하나둘 꼼꼼히 익혔다.
개중 눈에 띄는 인터뷰 기사가 있었다.
-대표님은 애주가로 유명하신데요, 술이란 대표님께 어떤 존재입니까?
-술이란 사람의 본성을 일깨워주는 묘약이죠, 묘약. 사실 저도 평소엔 점잖지만, 술이 좀 들어가면 활달한 본성이 나온답니다.(웃음)
-본성을 일깨워주는 묘약이라, 어떻게 보면 장단점이 공존하는 양날의 검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인들을 일컬어 흔히 혼네와 다테마에가 다르다고 하잖습니까? 본심과 겉으로 드러나는 예의가요.
-네, 그렇죠.
-한국인이라고 다를 거 없어요. 똑같습니다. 그런데 술은 그 혼네와 다테마에의 장벽을 무너뜨린단 말입니다. 그야말로 허심탄회한 관계를 만들어주는 지름길인 셈이죠.
대찬은 방태열 사장의 음주찬가를 보고 입가를 긁적였다.
‘아, 이거 좀 쎄한데.’
술을 좋아하는 건 관계없다.
하지만 저렇듯 맹목적인 신봉은 다른 문제다.
신실한 신도와 광포한 광신도만큼이나 다른 문제다.
대찬은 술 주 자, 주님을 섬기는 광신도의 전담마크를 맡긴 서청수 회장을 원망했다.
주말이 돌아왔다.
대찬은 초보낚시꾼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고가의 아이템을 착용할 때 초보는 가장 꼴불견이다.
선수용 글러브를 끼는 사회인 야구 4부 리거.
히말라야 14좌 봉우리를 정복한 등산대장의 등산복을 입는 북한산 불륜커플.
라이카 카메라로 뚝불 찍고 있는 풋내기 블로거.
대찬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 않았다.
간소한 차림에 저가의 장비로 무장했다.
게다가 서청수 회장의 배낚시에 참석하는 면면은 모두 화려하다.
대찬이 죽을힘을 다해 고가의 장비를 세팅해봤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었다.
모임 장소는 완도였다.
그곳에서 한데 배를 타고 출조지인 한 섬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 섬은 서청수 회장이 보유한 여러 별장 중 한 곳이 세워져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과연 중대사보다는 유대감을 다지기 위해 모인 볼락낚시이니 참석한 인원은 비교적 대규모였다.
대찬은 일개 차장인 자신이 참석할 정도니 인원이 적게 모일 것은 아니라 예상하고 있었다.
인원은 대략 20명가량이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많았다.
서청수 회장의 최측근인 김왕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사사로이 대찬의 사돈어르신이 되는 서청운 필래 컬처인더스트리 사장도 참석했다.
그 외에도 모두 한 가락 하는 사람들이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한 가락 하는 경지에 오르려면 나이가 사오십은 돼야 한다.
그렇기에 그 틈바구니에서 30대 초반의 대찬은 단연 돋보였다.
돋보이는 대찬에게 아는 얼굴들이 인사치레를 했다.
김태준 사장이 대찬을 가장 먼저 챙겼다.
“어어, 조대찬이, 많이 컸네. 배낚시에도 다 오고.”
“사장님 밑에서 많이 배우고 많이 컸죠, 하하.”
“계속 쑥쑥 크라고.”
“네. 우유 많이 먹겠습니다.”
김태준 사장은 피식 웃으면서 대찬의 등을 툭 두드리고 떠났다.
서청운 사장 역시 대찬을 발견하고 고개를 움직였다.
대찬은 직각으로 허리를 꺾어 답례를 했다.
서청운 사장은 씩 웃으며 다른 쪽을 바라봤다.
그는 대찬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
아무리 출세욕이 없다지만 금쪽같은 둘째아들이었다.
그런 아들을 평사원의 누나와 맺어준다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있던 그였다.
그런데 그 평사원이 예사 평사원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둘째아들은 평강공주 같은 며느리를 둔 덕에 삶에 의욕을 찾았다.
여러모로 서청운 사장에게도 대찬과의 인연은 홍복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자의 반, 타의 반 함께 서원웅을 지지하는 그룹에 속했다.
그러니 적잖이 대찬을 흠모할 수밖에.
하지만 마냥 대찬에게 웃어주는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장백주 실장은 대찬의 인사에도 냉기만 뿜으며 스쳐 지나갔다.
대찬이라고 그의 살가운 인사에 기뻐해줄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에게서 거두는 대찬의 시선도 장백주 실장 못지않게 냉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