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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29화 (228/556)

난 할 수 있어 229화

대찬은 줄리아가 한국에 잘 왔다고 마라와카에 우편을 보낼까 생각하다가 관뒀다.

그 편지보다 줄리아가 빨리 도착할 테니까.

줄리아는 일주일 일정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대찬의 부모님은 대찬이 죄송해하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 정력적으로 줄리아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덕분에 줄리아는 원 없이 산책을 마치고 즐겁게 단잠에 빠진 똥강아지처럼 곤히 잠이 들었다.

대찬은 부모님에게도, 줄리아에게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줄리아가 잠든 침대로 가 그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음?’

그러던 대찬의 눈에 형형색색의 노트 1권이 띄었다.

아이들이 곧잘 쓰는 그림일기였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림일기를 펼쳤다.

부모님이 사다주신 크레용이 가득 칠해져, 지면에는 조금의 여백도 없었다.

거기엔 활짝 웃는 줄리아와, 양옆으로 그녀의 손을 잡은 부모님의 모습이 서툴게 그려져 있었다.

“풋.”

대찬은 저도 모르게 웃다가 줄리아가 깰까봐 얼른 주먹으로 살짝 입을 가렸다.

커다란 정사각형이 연달아 있는 아래쪽에는 정사각형을 꽉꽉 채운 글씨가 쓰여 있었다.

영어와 마라와카 말, 그리고 약간의 한국어가 혼재된 글이 꾹꾹 눌러써져 있었다.

-오늘은 하늘이 파랗다. 아줌마랑 아저씨랑 맛있는 밥을 먹었다. 가자당? 갬조통? 이라는 음식이다. 국물은 조금 뜨겁고 따가웠다. 그래도 뼈의 고기를 먹었다. 맛있다. 밥 먹고 유리에 갇힌 물고기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너무 크고 멋있다.

-오늘은 구름이 조금 있다. 빵 사이에 고기랑 야채랑 들어있는 음식 먹었다. 너무 맛있다. 밥 먹고 영화 봤다. 너무 신기하다. 커다란 그림이 눈앞에서 막 움직인다. 너무 귀여운 그림들이었다.

-오늘은 비가 오다가 안 내렸다. 아줌마, 아저씨가 나한테 커피를 줬다. 한국은 음식은 맛있는데 커피들은 너무 맛없다. 초가 왜 커피 사러 왔는지 알겠다. 달콤하게 만든 건 그래도 너무 맛있었다.

-오늘은 아줌마가 옷을 사줬다. 이름이 항복? 한복? 이라고 했다. 예쁜데 집 가서 입으려면 너무 더울 거 같다. 그래도 고마워서 웃었다. 옷 입고 큰 집에 갔는데 이름이 너무 어렵다. 공복궁, 기앙바꿍이라고 했다. 너무 예쁘고 너무 크고 신기했다. 나랑 비슷한 옷 입은 언니, 오빠들이 많았다. 줄리아처럼 얼굴이 까만 사람들도 있었다. 마라와카 사람인 줄 알고 마라와카 말로 인사했는데, 헬로우밖에 못한다. 줄리아보다 바보다.

대찬은 줄리아의 아빠라도 된 듯 흐뭇하게 웃으며 그림일기를 꼼꼼히 읽었다.

이불을 꼭 껴안고 잠든 줄리아에게서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줄리아에게는 아깝고 아까운 일주일이 흘렀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윤이영은 바쁜 스케줄 때문에 줄리아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대신 한 자, 한 자 꼭꼭 눌러쓴 편지를 기획사 직원들 통해 전달했다.

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쉽게 다치는 줄 알기에, 조심스럽게 써내려간 정성스러운 편지였다.

의젓한 줄리아는 그 편지만으로도 기뻐했다.

이미 정든 대찬의 부모님과 작별할 땐 애처럼 울었다.

대찬은 웜샤인 직원들과 줄리아가 떠나는 날, 직접 인천공항까지 나가 줄리아를 배웅했다.

“줄리아, 또 만나!”

“잘 있어, 초! 또 만나!”

줄리아는 대찬이 선물해준 곰인형을 꼭 끌어안고 공항 게이트 바깥으로 사라졌다.

줄리아를 보낸 다음부터는 철저한 비즈니스의 연속이었다.

민승기는 수완이 좋고 부지런했다.

중요한 고비는 모두 넘겼다지만, 남은 일처리도 쉽지만은 않았다.

로튼 프룻츠 단독으로 하는 사업이 아닌 까닭이었다.

우선 마라와카 사람들과 맺어진 원톡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호주 파트너인 조나단 테일러와의 협업도 중요했다.

내부자인 대찬이 돕는다지만, 필래와 협의할 일도 산더미였다.

파푸아뉴기니 정부 산하의 CIC, 그리고 기타 등등의 끊임없는 협의가 필요했다.

민승기는 약 한 달간 눈코 뜰 새 없이 일만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파푸아뉴기니와 호주를 다섯 번이나 오갔다고 했다.

소주가 그리워 미치겠다는 민승기에게 대찬은 술을 사주었다.

“선배, 고생 많았어요.”

“역시 실전은 힘들다.”

“그래도 노력이 빛을 발할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민승기는 대찬이 따라주는 잔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잘될 거 같아.”

“그런데 일을 혼자 하기에는 너무 무리 아니에요?”

“무리야. 무급으로 후배들 부려먹는 것도 못할 짓이고.”

“정식으로 직원을 채용하는 게 어떠세요?”

민승기는 짠, 대찬과 잔을 부딪치고 시원하게 소주를 죽 들이켰다.

크으, 소리를 내며 간단한 안주를 집어먹고 그가 말했다.

“직원 뽑아야지. 근데 우리 형편에 고급인재는 어려워. 줄 돈이 없거든. 일손만 좀 거들어줄 정도라면 괜찮겠는데.”

“영어 못해도 괜찮아요?”

“간단한 회화랑 사전 보고 더듬더듬 번역만 할 줄 알면 돼. 왜, 아는 사람 있어?”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성실하고 일처리 야무진 친구를 하나 알아서요.”

“그런 사람 있으면 진즉 소개해줬어야지.”

“월급 250은 보장해주셔야 돼요.”

“250은 어렵고 230.”

대찬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에이, 좀 팍팍 쓰시지.”

“이게 내 개인소유 회사인 줄 알아? 당신도 여기 대표이사야. 한 푼이 아깝다고.”

“그럼 야근수당은 확실히 챙겨준다고 해주세요.”

“그건 당연하지.”

“좋아요. 잠깐만요.”

대찬은 시계를 흘끗 봤다.

10시 30분.

잠들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다.

대찬은 맹윤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맹윤주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조 차장님.”

“아, 맹윤주 씨, 혹시 주무시고 계셨어요?”

“아뇨. 마트 일 끝나고 집에 가던 길이었어요.”

“혹시 직장 바꿀 생각 없어요?”

“네? 갑자기 무슨…….”

대찬은 민승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시끌벅적한 식당 밖으로 나왔다.

대찬이 맹윤주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대찬에게는 그저 직원 1명을 채용하는 일이지만, 맹윤주에게는 인생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였다.

“급여는 230, 야근수당은 무조건 지급할 거고요.”

“그 정도면 더 나은 사람을 뽑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기본적인 영어는 해도 막 능숙하진 않은데.”

“아뇨. 맹윤주 씨가 적임이에요.”

“그런가요?”

“네. 필래 비바체 면접관일 때는 내 소유의 회사가 아니라서 부득이 개입하지 못했지만, 로튼 프룻츠는 내 회사예요. 저는 맹윤주 씨를 잘 아는 만큼 자신 있게 맹윤주 씨를 채용하고 싶습니다.”

그 말을 들은 맹윤주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조 차장님. 아니, 지금은 조 대표님이라고 해야 맞나요?”

“하하, 좋은 쪽으로 부르세요. 내일 시간 되세요?”

“네! 돼요, 대표님!”

대찬은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했다.

“그럼 내일 바로 사무실로 와서 민승기 대표님이랑 면접 보시죠.”

“설마 떨어뜨리시진 않으시겠죠……?”

“음, 보자마자 민 대표님 얼굴에 침만 안 뱉으시면요.”

“감사합니다, 조 대표님!”

다음 날.

맹윤주는 민승기 앞에서 면접을 봤다.

이미 민승기도 대찬을 신뢰하는 만큼 자질구레한 걸 가지고 시간을 끌지 않았다.

맹윤주는 즉석에서 로튼 프룻츠의 첫 번째 직원이 되었다.

들리는 후문으로는 다행히 민승기와 맹윤주의 손발이 잘 맞는다고 했다.

대찬은 소개팅 주선자처럼 민승기와 맹윤주를 따로 만나 파트너의 의견을 물었다.

민승기는 대찬의 질문에 박수부터 쳤다.

“엄청 대단해. 뭐 영어가 좀 부족하긴 하지만, 일하면서는 체감 못할 정도로 자기 몫 톡톡히 해낸다니까.”

“그래요? 제가 잘 추천했죠?”

“추천은 잘했다만 너무 늦었어! 이런 인재를 꽁꽁 숨겼다가 왜 이제 내놓는 건데?”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좋으시면 좋은 말씀만 하세요.”

“마음 같아선 내 월급 절반 뚝 떼어서 주고 싶을 정도라니까.”

“그럼 그렇게 하시지.”

“만난 김에 뼈해장국이나 한 그릇 하고 갈래?”

“…….”

물론 민승기 월급의 절반을 뚝 떼어 받지는 못했지만, 맹윤주 역시 로튼 프룻츠에서의 근무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신이 나서 말했다.

“정말 일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정말 일한다는 느낌? 그게 뭐예요?”

“조 대표님은 항상 정말 일하고 있으셔서 모르시는 거예요. 산소로 호흡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 귀한 줄 모르는 사람처럼.”

“맹윤주 씨가 필래마트에서 일할 때에는 뭐 가짜로 일했나요?”

맹윤주는 대찬에게 눈을 흘기면서 툴툴거렸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제가 공들인 만큼 회사가 발전하는 모습이 눈에 보여요. 거기서 오는 보람이란 게 너무 뿌듯하다니까요.”

“아, 그 느낌. 짜릿하죠.”

대찬이 공감하자 맹윤주는 더 활짝 웃었다.

“네! 밤에는 영어공부도 틈틈이 하고 있어요. 정말 회사의 일원이 됐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루가 다르게 느낀다니까요.”

“맹윤주 씨는 모든 사장님의 워너비네요.”

“민 대표님도 제 노력을 알아주셔서 더 감사한 거 있죠. 저, 그저께부로 과장 됐어요.”

“오, 맹 과장님.”

물론 과장이라고 다 같은 과장이 아니다.

로튼 프룻츠는 당분간 민승기와 맹윤주, 2인 체제를 기본으로, 거기에 대찬이 0.5인 몫으로 가세하는 형태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따지자면 아르바이트생 하나 두고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와 매한가지.

과장직함은 명함용 껍데기에 불과했다.

맹윤주는 머쓱한 듯 웃었다.

“직함만 과장이란 건 저도 알아요. 그래도 신분이 주는 뿌듯한 게 있잖아요?”

“그렇죠. 한 계단만 오르면 저랑 동급이네요? 차장.”

“우리 회사에서는 대표님이시잖아요? 지금 놀리시는 거죠?”

“로튼 프룻츠에서도 한 계단만 오르면 저랑 동급인 건 똑같죠, 뭐. 민 선배 다음으로 나, 그다음 맹 과장이니까.”

“긴장하시는 게 좋을걸요? 제가 언제 대표님 자리 뺏을지 몰라요.”

“아이구, 목 닦아놓고 있겠습니다.”

대찬은 진정으로 일을 즐기는 맹윤주를 보고 덩달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대찬은 평일에는 필래 비바체 혁신경영팀장으로서 일하고, 퇴근 후 밤과 주말에는 로튼 프룻츠 공동대표로서 일했다.

물론 몸이 고됐다.

하지만 맹윤주의 말마따나 정말 일한다는 느낌은 없던 힘도 솟게 했다.

로튼 프룻츠의 일은 필래 비바체에서의 일과는 또 다른 차원이었다.

필래 비바체에서 대찬의 활약은 혁혁했다.

하지만 아무리 대찬의 능력이 대단해도 무수한 필래 직원의 일원일 뿐이었다.

일개미보다는 신세가 조금 나은 병정개미였다.

턱이 아무리 강한 병정개미라도 병정개미일 뿐이다.

병정개미는 여왕을 위해 기꺼이 목숨 바쳐 산화한다.

그가 얼마나 많은 적을 물어죽이고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지 여왕개미는 알지도 못한다.

알지 못할뿐더러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그 병정개미의 빈자리는 또 다른 병정개미에 의해 채워질 것이기에.

그러나 로튼 프룻츠에서 대찬은 병정개미가 아니었다.

베짱이였다.

베짱이는 개미가 일하는 사이 배짱을 튕기며 놀고먹다가 죽는 ‘배’짱이가 아니다.

열심히 베를 짠다고 하여 ‘베’짱이다.

베짱이는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경영한다.

포악한 베짱이는 작은 곤충들을 잡아먹는다.

굶주리면 동족을 잡아먹는 것도 불사한다.

그렇게 투쟁적인 삶을 영위한다.

인간의 종류가 개미와 베짱이밖에 없다면, 대찬은 개미가 아니라 베짱이가 되고 싶었다.

로튼 프룻츠는 베짱이로서의 첫걸음이었다.

대찬은 즐겁게 격무를 즐겼다.

첫 번째 삶의 지옥 같은 격무가 아니었다.

마음 맞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을 했다.

필래의 도움을 얻긴 했지만, 바닥에서부터 새 사업을 시작하는 일은 고되고도 즐거웠다.

맹윤주가 출근하지 않는 주말.

대찬과 민승기, 두 공동대표는 점심쯤 출근해서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대찬의 사업 관련 메모들을 검토하던 민승기가 대찬에게 물었다.

“우리 회사 이메일을 새로 파라고?”

“네, 그렇게 해야 해요.”

“직원이라고 해봤자 맹 과장까지 겨우 3명인데 굳이 번거롭게 뭐 하러? 그냥 네빌론 이메일 쓰지.”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번거롭긴 해도 우리 도메인을 가지는 게 좋아요. 명함 건넬 때 무게감부터 다르니까.”

“무게감?”

“네. 명함에 이메일 적혀 있잖아요. 골뱅이 뒤에 네빌론 닷컴 적혀 있는 거랑 로튼 프룻츠 닷컴 적혀 있는 거랑은 천지차이니까요.”

“후자로 해야 그래도 적당히 규모 있고 내실 있는 회사로 보인다는 거지?”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서 꽤 거금 들여서 홈페이지도 세련되게 만들어놓은 거고요.”

“음, 확실히 맞는 말이야.”

“그리고 영영 우리 셋이서 이 회사 꾸려나갈 거 아니잖아요? 미래의 수많은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도메인 하나쯤은 갖고 있어야죠.”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그것도 맞는 말이야.”

사업은 착착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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