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228화 (227/556)

난 할 수 있어 228화

“조 차장님 아니세요?”

“음?”

대찬이 무의식적으로 입가를 슥 닦으며 눈을 떴다.

“맞네, 조 차장님. 안녕하세요?”

“아, 윤이영 씨.”

윤이영이었다.

대찬은 홍콩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대기실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기막힌 우연보다, 당장의 졸음 때문에 목소리가 굼떴다.

옆에 두었던 생수로 잠을 쫓고 나서야 그가 윤이영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보시다시피…….”

대찬은 눈짓으로 줄리아를 넌지시 바라봤다.

“아, 네.”

윤이영은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연스레 대찬의 옆에 앉았다.

대찬과도 안면이 있는 매니저가 나란히 앉으려고 했다.

그런데 윤이영이 급한 손짓으로 그를 멀찍이 내쫓았다.

매니저는 시무룩한 얼굴로 떨어져 앉았다.

윤이영이 대찬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홍콩에는 어쩐 일이세요?”

“아, 홍콩에 볼일이 있던 건 아니고, 파푸아뉴기니 다녀오는 길에 경유하는 겁니다.”

“파푸아뉴기니요? 거기야말로 어쩐 일로…….”

대찬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오지에 있는 커피농장 생두 수입 건으로 좀 오래 체류했어요.”

“그러고 보니 조 차장님 얼굴이 좀 타신 거 같네요.”

“맞아요. 하도 땡볕에 있다 보니……. 복구되려면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왜요, 조금 탄 피부도 멋있으신데요.”

“그, 그런가요?”

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윤이영은 줄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 아이는…….”

“아, 제가 머물던 마을에 사는 친군데요. 이번 기회에 제가 한국여행을 좀 시켜주기로 했습니다.”

“정말요? 많이 친해지셨나봐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많은 일이 있었죠. 근데 윤이영 씨는 홍콩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아, 광고 촬영차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에요.”

“멋있네요.”

“이게 다 조 차장님 덕분이에요.”

그 말에 대찬은 실없이 웃었다.

“그게 왜 제 덕분이에요? 윤이영 씨가 잘나셔서 그런 건데.”

“필래마트 광고 찍고 나서 갑자기 여기저기서 광고 문의가 들어왔거든요. 조 차장님 덕분에 살림 폈다니까요.”

“저희가 윤이영 씨 같은 특급 CF모델을 처음에 싼값으로 잘 잡은 거죠. 저희가 윤이영 씨 등쳐먹은 건데요?”

윤이영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찬을 빤히 보다가 푸하, 웃음을 터트렸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농담 하지 마세요. 진짜 같으니까.”

“진짠데…….”

“그래요? 그럼 저 등쳐먹었으니까 저도 조 차장님 한번 등쳐먹을래요.”

“어떻게 등쳐드시게요?”

“한국에서 밥 한번 사주세요.”

“밥 한 끼 사드리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남들 시선도 있고.”

“있고?”

“줄리아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는 이 친구랑 꼭 붙어 있어야 해서요.”

그 말에 윤이영이 조목조목 반박했다.

“줄리아도 한국 오면 밥부터 먹여야 할 거 아녜요. 거기에 줄리아까지 있으면 우리가 무슨 이상한 사이라고 오해 살 일도 없겠네요. 오히려 잘됐어요.”

“그, 그렇긴 한데.”

윤이영은 대찬에게 장난식으로 눈을 흘겼다.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제가 언제 싫다고 했습니까.”

“그럼 한국 가서 저랑 식사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밥 한 끼 하자고 줄기차게 요구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더 사양하는 것도 이쯤 되면 결례였다.

대찬도 윤이영과의 식사를 꺼리지는 않았다.

다만, 윤이영을 생각해서 사양했다.

그런데 본인이 줄곧 괜찮다고 하니 대찬도 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조 차장님하고 밥 한번 먹기 정말 어렵네요.”

“윤이영 씨가 연예인이 아니었으면 이미 여러 번 먹었을 겁니다.”

윤이영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때 줄리아가 부스스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러자 윤이영이 줄리아와 눈을 맞추며 인사했다.

“헬로.”

“헬로.”

줄리아는 히, 웃으면서 인사하곤 대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테완냐 틴나.”

“줄리아가 뭐라고 하는 거예요?”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좋은 눈이래요. 윤이영 씨 눈이 예뻐서 그런가봐요.”

“어머, 너 사람 볼 줄 안다.”

윤이영과 줄리아는 말은 통하지 않지만 서로를 보고 웃으면서 마음을 교환했다.

대찬은 두 여자의 웃음을 역시 웃으면서 바라봤다.

마라와카에서부터 여러 번 비행기를 탔다.

7살 줄리아는 벌써 비행이 질려버린 눈치였다.

한국에 내려 대찬, 윤이영, 줄리아는 식당으로 갔다.

물론 그 와중에 매니저에게는 그대로 집에 가서 쉬시라는 윤이영의 당부가 있었다.

대찬이 윤이영에게 물었다.

“뭘 먹이면 좋을까요? 된장찌개? 김치찌개? 아니면 짜장면이 좋으려나…….”

윤이영은 대찬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지금 파푸아뉴기니에서 온 7살짜리한테 된장찌개를 먹이시겠다고요?”

“…안 되나요.”

“안 되죠, 그럼!”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거 아닌가요…….”

되도 않는 변명에 윤이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조 차장님한테 이렇게 미련한 구석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죄송합니다.”

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줄리아 치아는 튼튼하죠?”

“네, 아마.”

“그럼 삼겹살 먹어요. 된장찌개 같은 건 나중에 줄리아 식성 고려해서 먹이자고요. 나중에 애 낳으면 고생 좀 하시겠어요.”

“…….”

그렇게 대찬을 쏘아붙인 윤이영은 줄리아의 손을 잡고 저만치 앞서갔다.

산전수전 겪으며 줄리아에게 공을 들였던 게 윤이영의 웃음 한 번으로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윤이영은 별실이 있는 고깃집으로 대찬과 줄리아를 데려갔다.

윤이영은 손끝이 야무졌다.

줄리아가 싫어할 만한 김치, 양념게장 같은 건 멀찍이 대찬 쪽으로 치워버렸다.

‘둘 다 좋아하는 거지만, 어째 찬밥 취급 당하는 거 같네.’

대찬은 멋쩍게 빈 젓가락을 쪽 빨았다.

그리고 줄리아가 좋아할 만한 단호박샐러드나 콘치즈 같은 걸 앞에 갖다놨다.

그리고 고기를 줄리아의 작은 입에 맞춰 잘게 잘라 접시에 담아주었다.

윤이영은 대찬에게 말했다.

“꼭꼭 씹어먹으라고 전해주세요.”

“아, 네…….”

대찬이 전달해주자 줄리아는 맑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단란한 식사를 마치고 계산할 차례였다.

대찬은 자신이 산다고 했으니 자신의 신용카드를 사장에게 내밀려고 했다.

그때 잽싸게 윤이영이 자신의 카드를 내밀었다.

결국 윤이영이 밥을 샀다.

대찬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사기로 했잖아요?”

“그 전에 제가 먼저 사기로 했던 걸 깜빡했어요.”

“누가 먼저 사는 게 뭐 중요하다고…….”

“중요하죠, 그럼. 이렇게 해야 다음 식사약속 거절 못하실 거 아니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꼭 제가 나쁜 놈 같잖아요.”

“그러게 제가 식사하자고 할 때 바로 하셨으면 얼마나 좋아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다음에 꼭 대접하겠습니다.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럼 다음에 약속 잡게 연락처 좀 주실래요?”

“네, 그러죠.”

대찬은 윤이영의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해주었다.

윤이영은 통화버튼을 눌러 대찬에게도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대찬은 윤이영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말했다.

“보통 연예인분들은 개인 연락처 공개하기 꺼리지 않으시나요?”

“제가 A급 배우도 아니고, 조 차장님이 인터넷에 제 번호 올릴 분도 아니신데 왜 꺼리겠어요.”

“왜요, 윤이영 씨보다 나은 배우가 얼마나 된다고요.”

“사탕발림에 능하시네요.”

“섭섭하네요. 저도 윤이영 씨 팬이거든요.”

윤이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제 팬이시라고요?”

“그럼요. 아니면 제가 왜 꿋꿋이 윤이영 씨를 추천했겠어요. 저, 윤이영 씨 나온 영화 다 봤어요.”

두 번째 삶에서는 아니지만 첫 번째 삶에서는 그랬다.

윤이영이 나오는 영화는 대부분 볼만했으니까.

볼만하지 않더라도 윤이영의 연기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충분한 영화들이었으니까.

대찬은 윤이영과 헤어졌다.

줄리아는 언니랑 더 있고 싶다고 했지만 스케줄이 있었다.

“줄리아한테 돌아가기 전에 꼭 다시 보자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조 차장님, 식사 약속 절대 잊지 마세요.”

“그럼요. 잘 들어가세요. 아, 그리고.”

“네?”

“혹시 영화 ‘소풍가는 날’ 캐스팅 들어오면 좀 미심쩍어도 하세요.”

대찬은 첫 번째 삶에서 윤이영이 모 매체와 했던 인터뷰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즈음 이미 당당한 국민배우 반열에 올라선 뒤였다.

인터뷰어는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윤이영은 영화 ‘소풍가는 날’의 캐스팅을 거절한 걸 꼽았다.

‘소풍가는 날’은 당대의 로맨스 걸작으로 꼽혔다.

작품성과 흥행 2가지를 모두 거머쥔 영화였다.

혹시 두 번째 삶에서는 캐스팅이 들어오지 않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대찬은 밥을 얻어먹은 작은 보답으로 그렇게 말을 건넸다.

대찬의 말에 윤이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걸 어떻게……?”

“알음알음 들었어요. 저도 문외한이지만 좋은 영화 같던 걸요?”

“조 차장님의 알음알음은 참 넓고 깊네요…….”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꼭 윤이영 씨가 주인공을 연기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팬으로서 개인적인 소망이에요.”

“팬으로서…….”

대찬은 웃으면서 줄리아와 함께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윤이영도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배시시 웃었다.

‘내 팬이라고……?’

그녀는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윤이영과 헤어진 대찬은 줄리아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와중.

줄리아는 차창에 눈을 갖다 대다시피 했다.

휙휙 지나가는 서울의 빌딩 숲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누구나 짜증을 내는 극심한 러시아워의 교통체증도 아이에게는 즐거운 눈요깃거리였다.

서울의 낯선 풍경을 감상하는 줄리아를 본 대찬은 푸근하게 웃었다.

뽀로로에 집중한 자식을 보고 안심하며 설거지에 열중하는 주부의 마음이었다.

그때 카똑, 대찬의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을 해보니 윤이영이었다.

-오늘 즐거웠어요. 안녕히 들어가세요.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이영 씨 보고 나서 줄리아가 절 보는 눈빛이 조금 싸늘해졌네요.

-역시 미인을 알아보네요. ^^

-^^;

-다음에 봐요. 줄리아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다음에 봬요.

윤이영은 대찬의 메시지를 여러 번 곱씹고는 웃으면서 휴대폰을 꼭 끌어안았다.

대찬은 줄리아를 집으로 데려갔다.

미리 연락을 받은 부모님은 줄리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줄리아는 모든 게 낯설었다.

낯설음은 2가지 감정으로 다가온다.

공포 혹은 호기심.

다행히도 줄리아의 낯설음은 호기심으로 다가왔다.

대찬은 부모님에게 자신이 출근한 시간 동안 줄리아를 부탁했다.

부모님은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다.

“화진이는 아직 어리고, 너희는 다 컸고 적적하던 차였다. 그런데 말이 안 통해서 어쩐다니?”

“이거, 제가 만들어놓은 단어장이거든요. 이거랑 간단한 영어단어로 소통하면 돼요.”

대찬은 단어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행주걸레에 가까운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부모님은 그걸 신줏단지처럼 받아들었다.

대찬은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죄송해요. 덜컥 데려와서 불편 끼쳐드렸어요.”

“아니다. 내가 또 언제 이런 귀여운 애를 돌보겠어. 네가 국제결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감사해요.”

대찬은 웃으면서 줄리아에게도 말했다.

“줄리아, 앞으로 7시 전에는 올 테니까 여기 아저씨, 아줌마 말씀 잘 듣고 있어.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좋은 거 많이 보고.”

“응.”

대찬은 어머니에게 슬쩍 봉투를 건넸다.

“이거 줄리아랑 놀면서 써주세요.”

“여기서 세어 봐도 되지?”

“세어보실 거 없어요. 100만 원이에요.”

“이렇게까지 큰돈 필요 없다, 얘.”

“그래도 이 정도는 있어야 저도 면이 서죠. 주말 지나서 우리 측 웜샤인 직원들이랑 같이 고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 어색하지 않을까?”

“현지인을 코디네이터로 고용해서 말은 잘 통할 거예요.”

“그럼 다행이구나.”

다행히 부모님의 긍정적인 반응 덕에 대찬은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