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27화
“마라와카의 원톡이 되었단 말입니까?”
“네, 감사하게도.”
대찬은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한국인들은 과연 수완이 좋군요.”
“음,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총을 못 다뤘을지도 모르니까.
조나단은 대찬에게 살짝 몸을 기울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따로 비즈니스에 대해 얘기를 해봅시다.”
대찬은 자신이 나서는 대신 민승기의 등을 떠밀었다.
“선배가 조나단과 직접 교섭해주세요. 저보다는 선배가 훨씬 이쪽에 밝으니까.”
“그래도 내 옆에는 있어줘야 해. 네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게감이 확 다르니까.”
“네, 그럴게요.”
민승기는 능숙하게 조나단과의 협상에 임했다.
조나단은 실내에서 줄담배를 연신 태우며 진지하게 얘기를 나눴다.
민승기의 주장은 이미 대찬과의 끝없는 토론과 논의로 이뤄졌다.
그러니 단호하고 분명했다.
“지금처럼 3키나에 커피를 사들이는 건 저희는 반대입니다.”
“그럼 얼마를 원합니까?”
“5키나. 저희의 구매력이 합쳐지면 충분히 규모의 경제로 극복할 수 있는 가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마라와카의 주민들도 커피 생산량을 늘릴 거고요.”
조나단은 담배 연기를 흠뻑 빨아들이고는 천천히 뱉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5키나.”
“조나단이 인수하는 공장에 대해서는 일대일로 자금을 출자해서 지분을 절반씩 보유했으면 합니다.”
“그쪽의 출자가 훨씬 적어도 됩니다. 대신 51퍼센트 이상의 지분을 우리 쪽에 보장해야 합니다.”
그 말에 민승기는 고개를 저었다.
“만일 조나단이 가공공장을 볼모로 해서 우리를 겁박하면 우리는 경영의 주도권을 전혀 쥘 수 없습니다. 50퍼센트씩의 지분을 보유하는 걸로 하시죠.”
“51퍼센트.”
“50퍼센트.”
“51퍼센트.”
“50퍼센트.”
조나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미간을 좁혔다.
“모든 걸 그쪽의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요.”
“그건 조나단도 마찬가지죠.”
“이 공장은 내가 인수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쪽을 끼워주는 거예요.”
그 말에는 대찬이 나섰다.
대찬은 웃으면서 받아쳤다.
“인수하기로 되어 있다고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예?”
“저희 측 캐시도 차고 넘칩니다.”
“뭐라고요?”
“제가 공장 소유주에게 더 많은 금액을 제시하면, 그때도 조나단이 인수하기로 돼 있는 걸까요?”
“젊은 한국인 둘을 못 당해낼 정도로 내 지갑은 얇지 않습니다.”
“호주로 돌아가시거든 인터넷에 한 번 검색해보십시오. f-e-e-l-a-e. 필래. 호주에선 유명하지 않겠지만 한국에선 그렇지 않거든요.”
“…큰 회사입니까?”
대찬은 손바닥을 좍 펼쳐보였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집단입니다.”
“젠장.”
“우리가 공장 지분의 절반을 보유했다고 해서 우리의 관계를 흔들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Check and Balance, 견제와 균형을 도모할 뿐입니다.”
조나단이 담배를 빨아들이는 박자가 빨라졌다.
대찬은 말을 이었다.
“조나단은 우리한테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듯 말했지만, 우리도 조나단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자세히 말씀해보시죠.”
“필래의 자회사인 웜샤인이 이곳에 대한 인프라 확충 사업에 들어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마라와카의 원톡에서 배제될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죠.”
“으음, 확실히.”
“더 부유한 경쟁자가 이 마을에 들어와도 조나단의 입지를 지켜낼 기회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에 민승기가 말을 얹었다.
“게다가 필래는 중국과 일본 측에 강력한 유통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쪽으로의 수출 채널도 열 수 있죠.”
“그러고 보니 기회를 제공받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군요.”
조나단은 그저 숫자 따지기를 좋아할 뿐이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자질구레한 일들이야 눙치고 넘어가는 성격이었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민승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해봅시다, 민, 그리고 초.”
“잘 부탁합니다.”
로튼 프룻츠는 현지 사정에 밝은 호주의 기업가와 합자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민승기 1인 기업이었던 로튼 프룻츠는, 파푸아뉴기니 마라와카 현지에 ‘로튼 프룻츠 앤 테일러’라는 합자회사를 설립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말이 기니 약칭 ‘RF&T’로 불렀다.
조나단과 한배를 타게 된 후로 마라와카 커피협회와의 교섭은 쉬웠다.
마라와카 주민들과 언성을 높일 일이 전혀 없었다.
RF&T가 제공하는 조건을 마라와카 주민들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기존 3키나였던 AA급 원두 1포대의 가격을 5키나로 올랐다.
게다가 조나단과 대찬, 민승기가 자금을 합치니 구입량이 획기적으로 늘었다.
마라와카의 사람들은 이제 커피 자루를 짊어지고 몇 시간을 걸어 모로베까지 향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인프라 확충까지 약속받았다.
펑퍼짐한 아줌마는 이제 돼지 1마리가 아니라 10마리를 잡자고 아우성을 쳤다.
모든 게 다 잘되었다.
대찬은 이날만큼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먹고 마셨다.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닥불 앞에서 춤을 추었다.
대찬은 무릎을 모으고 앉아 즐겁게 박수를 쳤다.
그때 줄리아의 어머니, 로라가 대찬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대찬이 뒤를 돌아보자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대찬은 로라를 따라 조용한 곳으로 갔다.
“무슨 일이에요?”
“부탁이 있어요.”
대찬은 옅은 웃음을 지었다.
“말씀하세요.”
“줄리아를 포트모르즈비로 데려가주세요.”
대찬은 로라의 말뜻을 이해했다.
대찬은 줄리아에게 거푸 바깥세상에 대한 얘기를 했다.
줄리아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마을 밖으로 혼자 나갔다.
그 정도로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이 깊었다.
그걸 보고 그녀의 어머니인 로라는 수도인 포트모르즈비로라도 줄리아를 데려가 구경을 시켜 줬으면 하는 것이었다.
대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자 로라가 다급히 조건을 내걸었다.
“제가 수확한 커피는 공짜로 내드릴게요. 물론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이지만…….”
그렇게 말해도 대찬이 웃음만 짓고 있자, 로라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더 없어졌다.
“…역시 어렵겠죠?”
“예, 어렵죠.”
“그렇죠…….”
로라는 단념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대찬은 더 활짝 웃었다.
“포트모르즈비만 가서는 줄리아의 궁금증이 채워지지 않을 겁니다.”
“네?”
“줄리아가 궁금해하는 바깥세상은 수도에 없을 겁니다. 바다 밖에 있겠지요.”
“그렇겠죠…….”
로라의 목소리는 더 무기력해졌다.
이곳, 마라와카에 사는 사람들은 일평생 마을 바깥으로 나가는 법이 없다.
그건 몇천 년 전이건, 몇만 년 전이건 이곳에 정착한 선조 때부터 그러했다.
여기서 나는 작물을 취하고, 여기서 사는 짐승을 잡아 연명했다.
마라와카 사람들에게 마라와카 마을만이 세계였으며, 그 경계 바깥으로 나간 사람은 수 세기를 통틀어 극소수였다.
수도인 포트모르즈비에 가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모험이다.
그러나 대찬의 말대로 포트모르즈비 역시 바깥세상은 아니었다.
씁쓸한 현실에 로라는 옷깃만 매만졌다.
대찬은 로라가 내내 우울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로라, 내가 부탁 하나만 할게요.”
“부탁이라뇨……?”
“제가 줄리아에게 한국 여행을 시켜줘도 될까요?”
그 말에 로라는 즉답하지 못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대찬은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로라가 대찬에게 말했다.
“저는 줄리아를 한국으로 보낼 정도의 돈은 없어요.”
“네, 로라는 그렇죠. 경비는 전액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줄리아의 마음에 불을 지핀 건 저예요. 책임을 져야죠.”
“그래도…….”
“그리고 우린 원톡이잖아요? 줄리아는 저한테도 조카 같은 아이예요.”
“초…….”
대찬은 로라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이는 물론 줄리아를 위한 결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비즈니스를 위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줄리아는 마라와카 사람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런 줄리아를 잘 대우하면, 그만큼 대찬을 향한 마라와카 사람들의 신뢰도 깊어질 것이다.
그 신뢰를 깊어지게 하는 값으로 여자아이 한 사람분의 여행경비쯤이야 푼돈이었다.
로라에게서 이 소식을 들은 줄리아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 줄리아를 보니 대찬의 기분도 덩달아 좋았다.
2주 넘게 마라와카에 있었다.
이제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대찬은 줄리아의 손을 꼭 잡고 마라와카 사람들과 헤어졌다.
그는 촌장과 포옹하고, 피터와 악수를 나눴다.
피터는 섭섭한 목소리로 말했다.
“볼일 다 봤다고 나중에 코빼기도 안 보이면 원톡에서 쫓아낼 거요.”
“하하, 그럴 리가요. 원톡의 조건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들르겠습니다.”
“…고맙소.”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대찬은 피터에게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피터도 잠깐 웃음기 어린 얼굴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에 피터 웃는 것까지 봤으니 이제 소원이 더 없습니다.”
대찬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작별인사를 던져놓고 경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경비행기는 마라와카 비행장에서 이륙했다.
손을 흔드는 마라와카 주민들이 점으로 보일 때까지 대찬은 창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줄리아는 눈을 크게 뜨고 대찬에게 말했다.
“초, 느낌이 이상해!”
“나도 그래, 줄리아.”
대찬은 웃으면서 줄리아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고로카를 거쳐 포트모르즈비에 착륙한 대찬은 민승기와 헤어졌다.
민승기는 대찬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서 CIC 쪽이랑 여러 가지 승인 관련해서 업무 좀 더 처리하고 들어갈게.”
“조나단 쪽하고도 몇 번 접선해야 하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질구레한 행정절차니까 내가 충분히 할 수 있어.”
“선배만 두고 떠나기 너무 죄송스러운걸요.”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죄송스러운 표정이나 짓고 나서 그런 얘기를 해라.”
“하하! 어차피 줄리아 여권하고 비자발급 건 때문에 저도 더 머물러야 해요. 그동안 저도 업무 좀 도울게요.”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됐어. 여권하고 비자나 잘 챙겨. 어차피 나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너까지 나서면 그동안 줄리아는 뭐 하면서 시간 보내냐.”
“정말 괜찮아요?”
“한 번만 더 물으면 안 괜찮을 거 같으니까 더 묻지 마.”
“분부대로 합죠.”
민승기는 대찬에게 찌릿 눈총을 쏘고 무릎을 살짝 접었다.
그가 줄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줄리아, 한국에서 좋은 시간 보내고 와.”
“고마워요, 민.”
줄리아는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대찬은 민승기와 헤어졌다.
민승기의 배려 덕분에 망중한을 즐겼다.
물론 치안이 좋지 않은 상황 덕에 자유로운 여행은 불가능했다.
대신 오랜만에 마라와카에 있는 내내 긴장되었던 몸과 마음을 푹 쉬게 했다.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고단했을 줄리아에게도 달콤한 휴식이었다.
대찬은 줄리아와 호텔에 머물면서 간단한 한국어와 영어를 알려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대찬과 줄리아의 귀국 편은 대찬의 출국 편과 마찬가지로 홍콩을 경유하는 것이었다.
수도인 포트모르즈비의 풍경만으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줄리아는, 홍콩에 도착하자 입을 쩍 벌렸다.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마라와카의 자연도 예쁘지만, 홍콩의 도시도 예쁘지?”
“너무 아름다워. 마라와카보다 훨씬 예쁘고 멋있어.”
“자연에서만 살았던 사람은 도시가 그렇게 보이겠지. 도시에서만 살던 사람은 그 반대고.”
한국행 비행기로의 환승을 위해 홍콩에서 잠깐 머물렀다.
하지만 줄리아가 받은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닌 듯했다.
그렇게 짧은 레이오버로 홍콩의 맛만 잠깐 본 대찬은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대기했다.
7살의 어린 몸은 한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지쳐버렸다.
어느새 줄리아는 대찬의 허벅지를 베고 쌔근쌔근 잠이 들었다.
대찬 역시 파푸아뉴기니를 떠나자마자 긴장이 풀렸다.
참아왔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그렇게 대찬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혹여 도둑맞을까 캐리어를 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잠과 뜬눈의 경계를 아슬아슬 줄타기하던 무렵, 대찬은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