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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25화 (224/556)

난 할 수 있어 225화

노을이 지고 있었다.

7살 어린아이에게 주변의 환경은 가혹했다.

마을 바깥은 독충과 들짐승이 들끓는 원시였고, 거기에 독충과 들짐승보다 더 악랄한 사람들이 있었다.

원톡 내부의 결속과 유대가 강한 만큼 외부의 적대감과 배타심이 강했다.

대찬은 안 좋은 상상에 마음이 더 급해졌다.

마을을 이 잡듯 뒤지던 차에 대찬은 피터와 마주쳤다.

애초에 피터와의 관계는 불편했다.

그런 피터는 대찬을 의심하고 있었다.

“줄리아가 마을 바깥에서 온 사람 때문에 자꾸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더니.”

“…….”

대찬은 종전처럼 기세 좋게 받아치지 못했다.

피터의 말이 맞을 확률이 높았다.

피터는 대찬을 쏘아보며 총 1자루를 쥐여 주었다.

M16이었다.

현역 때 쓰던 총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 예비군 훈련을 다녀온 마당이었다.

감촉이 익숙했다.

“마을 바깥을 뒤질 거야. 당신이 줄리아를 부추겨서 사달이 났으니 책임을 져야겠지.”

대찬은 총을 꽉 쥐었다.

“무작정 나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게 편하겠지만, 옳다고 생각 안 합니다. 하지만 나도 책임을 느끼니 앞장서겠습니다.”

“당신이 이 주변을 뭘 안다고 앞장서? 잠자코 따라오기나 해.”

“…그러죠.”

대찬은 불필요한 말다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적의가 가득해서 그렇지, 원론적으로 피터의 말이 옳았다.

대찬은 M16에 탄창을 끼우고 피터의 뒤를 따랐다.

모든 마라와카 마을 사람들이 마을과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여기 아이 발자국이 있어요.”

그 말에 마을사람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그의 말대로 작은 발자국이 나있었다.

발자국은 마을 바깥을 향해 이어졌다.

발자국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일동은 동시에 탄식했다.

“젠장.”

마을 바깥으로 난 길을 따라 줄리아 스스로 걸어간 게 분명했다.

대찬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한국의 소녀와 마라와카의 소녀는 같은 소녀이되, 다른 호기심을 지녔을 것이다.

한국의 소녀는 TV로, 인터넷으로, 책으로 호기심의 대부분을 해소한다.

하지만 마라와카의 소녀는 부모의 입과 자신의 눈이 아니면 호기심을 해결할 길이 없다.

호기심이 충족되지 못한 줄리아에게 대찬은 불을 댕기고 말았다.

발자국은 마을의 경계에서 간격이 급하게 좁아졌다.

망설였다는 증거다.

하지만 경계를 벗어난 순간, 간격은 규칙적이었다.

마을 밖으로 나가지 마라.

부모에게 수도 없이 들었을 금기를 서슴없이 어기게 할 정도로 대찬의 말은 달콤한 유혹이었으리라.

대찬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젠장…….’

하지만 마냥 자책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건 죄책감을 덜기 위한 순전히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찾아야 해.’

대찬은 이를 악물었다.

“자, 얼른 찾으러 가세.”

촌장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을을 벗어난 아이들을 수도 없이 봐왔던 그는 침착했다.

촌장은 횃불을 밝혔다.

그는 다른 마을 사람들의 횃불에도 불을 붙여주려고 했다.

그때 대찬이 나섰다.

“횃불을 들면 안 됩니다.”

“응?”

촌장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피터가 대찬의 가슴을 거칠게 밀쳤다.

“촌장님의 결정에 당신이 뭐라고 반대를 해?”

“횃불은 좋지 않습니다. 너무 눈에 잘 띕니다.”

“그럼 어두워지는 와중에 맨눈으로 줄리아를 찾자는 거요?”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신 이걸 쓰시죠.”

대찬은 한국에서 갖고 온 랜턴을 마을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자신의 손에도 랜턴을 든 대찬이 피터에게 말했다.

“이건 켜고 끄기 간편합니다. 혹시 다른 원톡 사람들이나 들짐승에게 위치가 포착되어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으음…….”

확실히 횃불보다 나은 선택이었다.

피터는 대찬에게 더 항의하지 않고 촌장을 바라봤다.

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횃불이 랜턴으로 바뀌었다.

피터를 선봉으로 하는 줄리아 수색대는 대찬과 민승기까지 합쳐 모두 20명가량이었다.

랜턴을 모두 켜고 가는 것보다 한 사람만 켜는 것이 좋겠다고 대찬은 제안했다.

마을사람들도 그 제안에 동의했다.

“제가 랜턴을 켜겠습니다.”

대찬은 위험을 자처했다.

줄리아의 실종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었다.

누구도 걸어가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고요 속에서 풀을 밟고 가는 발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줄리아의 발자국은 마른 땅이 시작되는 곳부터는 사라졌다.

이제부터는 아무 단서도 없다.

이 척박한 환경에서 직감과 우연만으로 줄리아를 찾아야만 했다.

밀림 한가운데서 정체 모를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대찬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그때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피터의 걸음이 멈췄다.

먼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대찬의 손을 살짝 잡았다.

대찬은 그 의미를 알았다.

얼른 랜턴을 껐다.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일행은 걸음을 멈췄다.

피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메냐 놈들이야.”

메냐는 마라와카 근방에 있는 메냐마냐의 원톡이었다.

히프마어를 쓰는 마라와카 사람들하고는 다른 원톡이었다.

대찬이 어렴풋하게 듣기로 마라와카 사람들과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상황에서 대찬이 피터에게 말했다.

“저놈들이 이 근방에 자주 출몰하나요?”

“가끔. 낯익은 목소리요. 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강도질을 일삼는 질 나쁜 놈들이지.”

“으음…….”

“총을 위협하려고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람을 쏴 죽이는 놈들이오.”

명백한 적이다.

대찬은 줄리아가 저 흉악한 자들의 손아귀에 있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았다.

“아저씨들 뭐야! 싫어!”

줄리아의 선명한 목소리가 대찬을 비롯한 마라와카 수색대들의 귀에 꽂혔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모두의 동공이 커졌다.

그러자 메냐 남자들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모르지만 무어라 겁박하는 것이 분명했다.

피터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찬 역시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애썼다.

대찬은 피터의 어깨를 잡았다.

“피터, 침착하세요. 줄리아를 구하려면 마음부터 차분히 다스려야 돼요.”

“…저놈들 앞에서 어떻게 차분할 수가 있소!”

“만일 저들이 줄리아를 순순히 놔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들이 원하는 건 돈일 테죠.”

“놈들은 한두 푼으론 만족 안 할 거야. 건수만 보이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빨아마시는 놈들이라.”

“그럼 협상보다는 전투를 선택하실 겁니까?”

피터는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치기 같은 솜씨라면 차라리 협상이 낫지. 줄리아를 죽일 순 없으니까. 줄리아는 우리 모두의 딸이오.”

“얼치기 같은 솜씨가 아니라면요?”

피터는 대찬을 노려봤다.

“사람 죽여봤소?”

“죽이는 연습은 했죠, 2년 동안.”

“…수틀리면 실탄을 서로한테 쏴야 하는 수가 있소.”

“각오는 됐습니다.”

피터는 대찬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적개심 어리던 눈빛이 다소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 어두운 곳에서 총을 난사하면, 우리가 죽지 않아도 우리 손으로 줄리아를 죽일 수도 있소.”

“방법이 있습니다.”

대찬은 피터에게 무어라 몇 마디 속닥거렸다.

피터는 대찬을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히프마어로 다른 마을사람들에게도 대찬의 제안을 전달했다.

그들 역시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대찬은 무리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살금살금, 메냐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발소리를 죽여 걸어갔다.

필요한 곳에선 몸을 숙이고 포복까지 했다.

커피를 사러 와서 낮은 포복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찬이 그렇게 무리에서 떨어지는 사이.

한 줄로 늘어섰던 마라와카 사람들도 뿔뿔이 흩어진 대형으로 바꾸었다.

최악의 경우 쌍방 간 총격전도 각오해야 한다.

뭉쳐 있다간 한 번에 봉변을 당할 것을 우려한 움직임이었다.

피터는 대열이 뿔뿔이 흩어지는 와중에도 제자리를 지켰다.

그는 대찬이 건네준 손목시계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똑딱똑딱.

초침이 두 바퀴를 돌았다.

피터는 대찬이 사라진 곳을 흘끔 쳐다봤다.

깜깜한 그곳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피터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가 외치는 말은 히프마어가 아니라 메냐어였다.

“너희가 줄리아를 데리고 있나?”

그 말에 저들끼리 웅성거리던 메냐 사람들은 일순 정적을 지켰다.

그러다 개중 한 사람이 거칠게 받아쳤다.

“마라와카 놈이냐?”

“마라와카다! 줄리아를 데리고 있냐고 물었다!”

“아, 이 귀여운 꼬마 애 이름이 줄리아인가?”

대찬은 그들의 대화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오가는 거친 목소리에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만큼은 잘 알았다.

메냐 남자가 조롱조로 건넨 질문에 피터는 으르렁거렸다.

“당장 이리 돌려보내.”

“에이, 우리가 지금까지 보호해줬으면 값은 치러야지?”

“얼마를 원해?”

메냐 남자는 이미 셈을 끝내놓고도 부러 턱을 매만지며 머뭇거렸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2만 키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2만 키나면 한화로 약 8백만 원.

한국에서야 얼마씩 갹출하면 큰돈도 아니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큰돈이다.

2만 키나를 지불한다고 저들이 줄리아를 순순히 놔주리란 보장도 없었다.

더 문제는, 저들이 궁핍할 때 생계형 납치를 저지르게 할 선례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피터로서는 2만 키나를 지불할 의사가 없었다.

“억지 부리지 마. 1천 키나까지는 사례할 용의가 있어.”

“에이, 1천 키나를 우리 넷이서 나눠가지면 남는 게 있나.”

“그 이상은 우리도 못 줘.”

피터가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메냐 남자의 목소리도 다소 성마르게 변했다.

“이 애 값어치가 그거밖에 안 돼?”

“납치가 아니라 보호라고 하지 않았나? 그 입으로?”

“에이, 왜 그럴까? 다 아는 사람이.”

메냐 남자는 줄리아의 어깨를 세게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위축되었던 줄리아의 어깨가 더 움츠러들었다.

“우리가 사람 하나 죽이는 건 밥 먹듯이 하는 거 알지? 애라고 봐줄 줄 알아?”

“알지, 네놈들 더러운 습성을.”

“그래, 그러니까 우리 쉽게 가자고. 너는 돈 주고, 나는 애 주고. 쉽잖아?”

피터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갑자기 외쳤다.

“초!”

그 말에 갑자기 어디선가 빛이 확 밝아졌다.

어딘가에서 시작된 랜턴의 빛이 그쪽을 비추었다.

어둠속에 숨어 몸값을 흥정하던 메냐의 남자들이 그 밝은 빛에 포박되었다.

놀라 커진 그들의 동공으로 랜턴의 인위적인 빛이 파고들었다.

대찬은 그 랜턴이 계속 그들을 비추도록, 미리 봐둔 나뭇가지 사이에 끼워두었다.

그리고 자신은 재빨리 랜턴에서 떨어졌다.

최대한 조용하고 빠르게 저들의 뒤로 들어갔다.

손자는 손자병법에서 말했다.

난지여음(難知如陰).

그늘처럼 적이 알기 어렵도록 고요하게.

동여뢰정(動如雷霆).

그리고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여라.

대찬은 손자의 병법을 그대로 행했다.

그늘처럼 고요하게, 벼락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대찬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

그는 피터에게 물었다.

‘줄리아를 살리기 위해 어디까지 폭력이 허용됩니까?’

‘죽여도 되오.’

대찬은 다리를 분질러도 좋다는 정도의 말을 기대했다.

피터의 대답은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기대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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