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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24화 (223/556)

난 할 수 있어 224화

“아마도요. 아시다시피 원톡에 들어가려고 무진장 애쓰고 있거든요.”

“하긴, 하루 이틀 만에 되는 일은 아니죠. 그럼 그때 다시 방문할 때까지 이 사람들과 원톡을 형성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잘 모르겠군요. 한국 속담에 만 피트 물속은 알아도 한 피트 사람 속은 모른다고.”

그 말에 조나단은 허리를 젖히고 웃었다.

정말 웃겨서 웃는 건지, 아니면 비웃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하하, 재밌군요. 맞는 말씀이죠. 자, 그럼 이렇게 할까요?”

“뭘 말입니까?”

“제가 다음번 마라와카에 방문했을 때, 초가 이곳 사람들의 원톡에 들어간다면 저와 협업하시죠.”

“협업이라뇨?”

“저는 마라와카 근처의 생두 가공공장을 인수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저와 협업해서 현지 공장을 함께 인수하시죠.”

“음?”

“그럼 비용을 훨씬 절감할 수 있을 테니. 생두 역시 경쟁이 아니라 함께 같은 가격에 구입하시고요.”

대찬은 담배 한 모금을 머금으며 말했다.

“마치 조나단 당신과 협업하고 싶으면 원톡부터 들라는 둥 꽤 권위적으로 나오시는군요.”

“하하, 권위적이라니.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말씀하시는 내용은 저도 좋고 조나단도 좋은 거 아닙니까?”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죠. 하지만 초가 원톡에 들어가는 건 필수적이라서요.”

“그 생각은 저도 처음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조나단은 어련하실까,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초가 원톡에 못 들어가면 마라와카 사람들과 거래 자체를 트지 못할 겁니다.”

“일단 다음번에 와서 말씀 나누시죠. 조나단이 굳이 숙제를 주지 않아도 저는 마라와카 원톡에 들 테니까요.”

그때 피터가 와서 조나단에게 말했다.

“조나단, 다 끝났습니다.”

“아, 수고했습니다. 여기, 대금.”

조나단이 주는 돈을 피터는 공손하게 받았다.

과연 조나단은 마라와카의 원톡에 들어간 듯했다.

잠깐 쉬던 경비행기의 프로펠러가 다시 돌아갔다.

조나단은 웃으면서 대찬에게 손을 흔들었다.

“틴나 왕감와 무냐.”

“오케이. 틴나 왕감와 무냐.”

대찬이 같은 말로 받아치자 조나단은 살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가 피터에게 물었다.

“저 사람, 마라와카에 온 지 며칠 됐습니까?”

그렇게 묻는 말은 히프마어였다.

대찬이 그 말에 대신 대답했다.

“세븐 유야.”

“오우, 놀랍군요. 아마 다음번에 당신과 기쁘게 악수할 수 있겠습니다.”

조나단은 웃으면서 마라와카를 떠났다.

그러자 민승기가 대찬에게 슬쩍 물었다.

“틴나 왕… 어쩌구, 저 사람이 뭐라고 한 거야?”

“씨유, 다시 보재요.”

“그걸 알아들었어?”

“내가 일주일 동안 피똥 쌌는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아요?”

“독종.”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대찬은 밤에 민승기와 둘러앉았다.

제이콥은 사흘째 되는 날, 자신이 굳이 필요 없겠다면서 수도인 포트모르즈비로 돌아갔다.

민승기와 이곳의 주식인 고구마를 나눠먹었다.

대찬이 고구마를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조나단이란 사람하고의 협업, 어떻게 생각하세요?”

“음, 나쁘진 않지. 그 사람 말이 틀리진 않아. 굳이 그 사람하고 경쟁해서 생두 가격을 필요 이상으로 지불할 필요는 없잖아.”

“네, 그렇죠. 다만, 3키나는 너무 저렴해요. 웜샤인은 공정무역 쪽으로 어필할 생각이던데.”

민승기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좋은 생각은 아니야. 공정무역 자체가 마냥 좋기만 한 게 아니니까.”

“…예, 그렇죠.”

“통용되는 가격이 괜히 형성된 게 아니야. 여긴 시장이 없어. 100퍼센트 자급자족이지.”

“공정무역이랍시고 통용되는 가격을 훨씬 뛰어넘어 지불하면 이 고구마 농장도 전부 커피 농장으로 바뀌겠죠.”

“응. 그러면 도로도 불편한 이곳에서 발품을 팔아 비싼 값으로 식량을 들여와야 해.”

“그럼 식량 가격이 교란되고, 마라와카의 경제 생태계 자체가 엉망이 되겠죠.”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공정무역이 허울만 좋은 생색내기가 될 수도 있어.”

“우리도 최대한 생두 가격을 낮게 책정해야 한국에서 이문을 남길 수 있고요.”

“맞아.”

“으음… 하지만 마냥 이런 방식으로는 이들의 전적인 호감을 살 수가 없어요. 합리적인 가격에만 바탕을 둔 계약관계는 쉽게 뒤집힐 거예요.”

민승기도 팔짱을 끼고 대찬의 말에 공감했다.

“그렇지.”

“웜샤인은 인프라 구축 쪽으로 초점을 맞추도록 해야겠어요.”

“인프라? 도로라도 놓게 하려고?”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 화장실도 변변치 않잖아요. 공중위생에 화장실은 필수예요.”

“그렇지.”

“재래식 화장실이나마 설치를 해놓으면 공중위생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우리로서도 큰돈이 드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그것으로는 웜샤인이 이윤을 남길 수가 없잖아?”

“생두 수입 등으로 발생하는 이윤을 웜샤인과 공유하면 돼요. 또 웜샤인에서 운영하는 홀몸노인 커피숍에 생두를 무상제공하는 방법도 있고요.”

민승기는 납득했다.

“좋아. 그 방향으로 해보자고.”

“일단 웜샤인 쪽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니까요.”

“그건 그래.”

대찬과 민승기는 식어가는 고구마를 먹으면서 허기를 채웠다.

대찬이 파푸아뉴기니로 떠난 지 2주째.

필래 비바체 우편실에서 혁신경영팀으로 편지 1통을 전달했다.

편지에는 활을 겨누고 있는 원주민이 그려진 우표가 붙어 있었다.

편지를 받은 홍은주가 직원들에게 말했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온 편진데요?”

“뭐? 그럼 조 차장님이 보내신 건가?”

“그런 거 같아요.”

그 말에 직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우르르 홍은주에게 몰려갔다.

좀체 그런 일에 호들갑 떠는 일이 없는 한태윤 과장도 슬그머니 그쪽으로 다가갔다.

허운이 홍은주를 채근했다.

“홍 주임, 얼른 편지 뜯어봐요.”

“아, 예.”

홍은주가 편지를 뜯자 사진 몇 장이 동봉되어 있었다.

그걸 본 오다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누구야?”

사진 속의 남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머리도 길게 기르고 있었다.

오다혜가 찜찜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조 차장님?”

허운도 그걸 보고 경악했다.

“말도 안 돼! 나의 조대찬이 이럴 리가 없어!”

“피부도 완전 새까맣게 탔네요. 윽, 저 패션은 뭐야? 꼬질꼬질해…….”

은근히 대찬의 잘난 외모를 선망하던 여직원들은 유채경부터 홍은주까지 가릴 거 없이 살짝 실망한 눈치였다.

그걸 보고 허운이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었다.

“거봐, 조 차장님보다 내가 더 잘생긴 거 같지 않아?”

“허 과장님이 저기 가면 더 추해지실걸요.”

홍은주가 낯빛 하나 안 바뀌고 따갑게 쏘자 허운은 얼굴을 붉혔다.

홍은주를 꾸짖을 수 없어 애먼 마누라 유채경에게 투정을 부렸다.

“유 대리! 당신 남편이 당하고 있는데 왜 가만히 있어?”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허운 과장님?”

“유채경 너마저…….”

그때 부문장실에 있던 옥문영 상무가 밖으로 나왔다.

“뭐야,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

“조 차장님한테서 편지가 와서요.”

“조대찬이한테 편지가 왔어? 이리 줘봐.”

홍은주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건넨 편지를 옥문영의 솥뚜껑 같은 손이 받았다.

홍은주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읽힐 예정이었던 대찬의 편지는 옥문영 상무의 낮은 동굴 목소리로 읽혔다.

“안녕들 하신가요. 조대찬입니다. 장기간 출근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입니다.”

죄송한 줄은 아는군.

옥문영 상무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저는 파푸아뉴기니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들고 사무실로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건 제가 대표이사로 있는 로튼 프룻츠에도 희소식이지만, 필래 비바체에도 좋은 소식입니다. 마라와카의 고원에서 생산된 커피는 반드시 소비자들의 좋은 평가를 받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렇게 죽 편지를 읽던 옥문영 상무의 목소리는 막바지에 이르러 파르르 떨렸다.

“이 편지는 아마 송 과장님 이하 팀원들끼리만 읽으시겠죠? 옥문영 상무님 밑에서 모두들 고생이 많으십니다. 조금만 더 고생하세요. 이만 줄입니다.”

그걸 읽은 옥문영 상무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이런 쌍놈의 새끼가! 오기만 해봐라! 묵사발 만들어버릴라니까! 혁신경영팀은 잘 들어! 조대찬이 말대로 해줄게. 조금만 더 고생들 하라고!”

한태윤 과장은 대찬의 속뜻을 눈치챘다.

옥문영 상무에게 저걸 읽힌다.

옥문영 상무가 눈을 불을 켜게 만든다.

혁신경영팀을 닦달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물렁한 송희근 과장 밑에서도 팀이 잘 돌아가게 만든다.

그런 의도.

어차피 대찬이 돌아올 즈음이면 옥문영 상무의 이 분노도 잦아들어 있을 것이다.

한태윤 과장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여우 같은 인간.’

사진 속에서 수염을 기른 채 환하게 웃는 대찬이 한없이 얄밉게 보였다.

대찬은 어느덧 마라와카 주민에 반쯤은 동화되었다.

매일 고구마로 때우는 일상에도 익숙해졌다.

민승기가 무의식적으로 맥주, 김치찌개, 삼겹살 운운할 때 조금 괴로운 거 말고는 참을 만했다.

특히 대찬이 머무는 집의 막내딸, 줄리아하고의 관계가 돈독했다.

줄리아는 대찬을 잘 따랐다.

그녀의 아버지가 가끔 질투 섞인 말을 툴툴거릴 정도였다.

대찬도 자연스레 줄리아에게 더 정이 갔다.

미니 선풍기부터 시작해서 랜턴, 인형 따위를 선물했다.

줄리아는 그것들을 받고 환하게 웃었다.

대찬과 줄리아는 영어와 히프마어, 그리고 손짓과 몸짓을 섞어 대화했다.

“초, 마을 바깥에는 이런 게 많아?”

“응, 많지. 마을 바깥은 아니고 배나 비행기를 타고 멀리 멀리 가야 해.”

“나도 가고 싶어.”

대찬은 줄리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줄리아는 강아지처럼 눈을 살짝 감으며 대찬의 손길을 느꼈다.

대찬은 줄리아의 투정 어린 말에 웃으며 말했다.

“줄리아가 다음에 크면, 엄마처럼 크면 갈 수 있을 거야. 지금 가기에는 너무 어려.”

“거짓말! 우리 엄마한테 물어봤어. 엄마도 여태 멀리 멀리 못 나가봤다고 했단 말이야.”

대찬은 난감하게 웃었다.

“줄리아가 나중에 엄마만큼 크면 꼭 데려갈게. 내가 살던 곳으로.”

“그것도 거짓말이야. 커피만 사고 떠날 거잖아. 다 들었어.”

대찬은 뜨끔했다.

거짓을 들킨 자의 말은 졸렬하다.

예, 아니오, 시원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소문의 출처부터 캔다.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

“그게 뭐가 중요해!”

줄리아는 벌써부터 총명했다.

대찬을 완전히 코너에 몰아넣었다.

재벌회장도 구워삶던 언변이 7살 꼬마에게 덜컥 막혔다.

대찬이 우물쭈물하자 줄리아는 찌릿 눈빛을 쐈다.

“됐어! 초랑 안 놀아!”

그러고는 아장아장한 걸음을 최대한 신경질적으로 내디디며 사라졌다.

“나중에 한국으로 안 부르면 절교당하겠는데.”

대찬은 머쓱하게 웃으면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줄리아는 쿵쿵 일부러 소리 나게 걸으면서 집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볼에는 잔뜩 바람이 들어갔다.

‘어른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어린 마음이 어리석은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줄리아는 잔뜩 심통 난 걸음을 일생일대 가장 먼 거리로 옮겼다.

몇 시간 후, 줄리아의 어머니인 로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어머니이자 여자의 육감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게 물었다.

“줄리아 봤어요?”

“또 그 초인가 추인가 하는 한국 놈한테 가 있겠지. 몰라.”

“…그래도 이렇게 오랫동안 가 있진 않았는데. 나 잠깐 초한테 다녀올게요.”

“그놈, 사람 꼬드기는 재주가 있는 거 같으니까 홀라당 넘어가지 말라고.”

“말을 해도, 꼭.”

실없는 농담에 로라는 어정쩡한 웃음을 지었다.

로라는 대찬을 찾아갔다.

대찬은 손수 만든 꼬깃꼬깃한 단어장을 누워서 읽고 있었다.

그는 로라를 발견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여기 줄리아 안 왔어요?”

“어… 아뇨. 제 방에서 나간 지 한참 됐는데요.”

그 말에 로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대찬 역시 본능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줄리아가 사라졌다.

그 소식은 빠르게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갔다.

같은 원톡에 대한 유대감이 가족과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손녀처럼, 딸처럼, 조카처럼 애지중지하던 줄리아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설마 내가 한 말 때문에…….’

대찬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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