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23화
대찬은 그들에게 며칠간의 숙박비를 훌쩍 뛰어넘는 값을 지불했다.
연필이나 공책 따위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단순한 뇌물이 아니었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조금이라도 넘어보겠다는 호의였다.
젊은 부부는 대찬의 선물을 기꺼이 받았다.
둘은 충분한 편의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수도나 전기, 냉난방 등을 기대할 수 없기에 이런 문명에 익숙한 대찬은 영 불편했다.
그러나 그들의 호의에 이런 것들은 이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날 밤.
대찬은 한국에서 가져온 랜턴을 입에 물고 엎드렸다.
한국에서 홍콩으로, 홍콩에서 포트모르즈비로, 포트모르즈비에서 고로카로, 고로카에서 마라와카로.
연속된 여행에 피로가 쏟아지던 참, 민승기는 대찬을 흘끗 바라봤다.
“뭐 해?”
“히프마어 공부요.”
“엥? 그걸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 거야? 교재가 있을 리도 없는데.”
“오늘 협상 나가리 되고 젊은 사람들, 애들한테 계속 말을 걸었거든요. 그 친구들은 짧게나마 영어 좀 하더라고요. 거기서 몇 단어 받아 적어왔어요.”
“그래서 지금 그걸 공부하고 있다고?”
대찬은 민승기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입에 문 랜턴이 민승기의 눈을 직격했다.
민승기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항의했다.
“야! 눈부셔!”
“제가 그렇게 멋있어요? 하긴 공부하는 남자, 매력 있죠.”
“아니, 랜턴!”
“아, 죄송.”
대찬은 실없이 웃으면서 랜턴을 바닥에 내려놨다.
민승기는 눈을 비비고 말했다.
“해 뜨면 천천히 공부하지, 뭘 야자까지 뛰어?”
“급해요. 얼른 한 단어라도 더 익혀둬야지.”
“어차피 협상은 피터랑 할 텐데.”
“그러니까 그게 문제예요.”
“왜?”
“언제까지 그 불친절한 아저씨랑 협상할 순 없잖아요. 주민들 하나하나를 설득해야 해요.”
“그래서?”
“영어만 솰라솰라 하면 결국 대다수 주민들한테는 다가갈 수 없으니까. 원톡이 One Talk라면서요? 이쪽 말을 알아야 원톡이 되죠.”
“아이고, 잘났다. 그래도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진 마.”
“그 얘기, 고3 때 우리 엄마한테 듣고 되게 오랜만에 듣네요.”
대찬의 마지막 말을 민승기는 듣지 못했다.
이내 민승기는 쌔액쌔액 고른 숨을 뱉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랜턴의 밝기를 최소로 했다.
다음 날.
대찬은 협상장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차피 저들의 원톡이 되지 못한다면 협상은 무의미하다.
원톡이 되지 못한 상태에서 협상이 체결되는 건 오히려 위험했다.
저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 협상은 언제든지 엎어질 수 있다.
기껏 악수하고 사인하고 커피를 사가려고 하면 안면몰수하고 그런 적 없다고 하는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되면 피해를 입는 건 철저히 로튼 프룻츠와 필래 비바체였다.
우선 저들의 원톡으로 녹아들고 나서야 협상은 신뢰 위에 설 수 있었다.
대찬은 저들에게 선물로 주기로 한 옷가지들을 끌고 마을 광장으로 갔다.
광장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
대찬은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오히려 구경거리가 되는 건 그였다.
대찬은 혼자서 여러 사람을 구경했지만, 마라와카의 사람들은 여럿이서 대찬 하나를 구경했다.
얼마나 희한한 광경인가.
저 사람은 왜 이렇게 눈이 작고 째졌지?
저 사람은 왜 이렇게 머릿결이 곧지?
저 사람은 왜 이렇게 피부가 누렇지?
저 사람은 왜 저러고 있는 거지?
대찬을 보는 마라와카 사람들에게는 오만 가지 의문이 교차했다.
물끄러미 사람들을 보던 대찬이 한 사람을 가리키며 외쳤다.
“예쁘다!”
간밤에 급히 외운 히프마어였다.
대찬이 가리킨 사람은 척 봐도 아리따운 마라와카 아가씨였다.
그 말을 들은 아가씨는 피식 웃었고, 주변 사람들은 웃기다며 손뼉을 치고 폭소했다.
대찬은 갖고 온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알록달록한 원피스 한 벌을 꺼냈다.
그는 아가씨를 향해 원피스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입어! 예쁘다!”
이런 말은 조금 더 세련되게 말하고 싶었다.
대찬은 원시인 수준으로 단어만 툭툭 뱉을 수밖에 없는 히프마어 실력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 말을 들은 마라와카 여인들은 아가씨의 등을 떠밀었다.
아가씨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살금살금 대찬에게 다가갔다.
대찬은 아가씨의 몸에 원피스를 척 대보더니 엄지를 치켜세웠다.
“어울려.”
아가씨는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한국에서라면 너무 과한 색상에 촌스럽다고 할 디자인이었는데, 마라와카의 우거진 녹음 사이에서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대찬은 박수를 쳤다.
“어울려. 예뻐.”
“헤헤…….”
멀끔한 동양인 총각의 칭찬에 마라와카 아가씨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대찬은 그다음으로 펑퍼짐한 몸매의 아줌마를 가리켰다.
그녀에게는 오페라 가수에게 어울릴 법한 비즈 박힌 검은 드레스를 선보였다.
“어울려.”
대찬의 말에 아줌마는 뱃살을 출렁출렁 흔들며 다가왔다.
역시 만족하는 눈치였다.
두 번째 사람에게까지 선물이 돌아가자, 이제 다른 사람들은 대찬을 더 경계하지 않았다.
백화점 세일기간에 북적거리는 주부들처럼 대찬에게 몰려들었다.
‘내가 또 왕년의 수유점 점장이었다고.’
우르르 몰려드는 손님들을 상대하는 건 대찬의 전공이었다.
대찬은 그 북새통에서도 척척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옷을 한 벌씩 선물했다.
키가 작아 외면당하기 쉬운 아이들도 빼놓지 않았다.
‘애들이야말로 알짜지. 애들을 꼬시면 엄마, 아빠도 따라오거든.’
남자 꼬마에게는 변신 로봇 또또봇이 그려진 티셔츠.
여자 꼬마에게는 요정마법사 도미솔이 그려진 나시티.
대찬의 손은 빠르면서도 야무졌다.
거기에 급하게 외운 단어들.
어울려! 예뻐! 멋져! 귀여워!
그 4개를 고장 난 기계처럼 반복하니 마라와카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그걸 멀찍이서 지켜보던 민승기와 제이콥은 경탄의 웃음을 터트렸다.
제이콥이 혀를 내둘렀다.
“유얼 프렌드, 어메이징, 어메이징.”
“예스. 어메이징, 리얼리.”
민승기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질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열심히 옷을 나눠주던 대찬의 레이더에 피터가 보였다.
그는 한국인 둘이 들어와 함부로 마을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게 영 마뜩잖은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오색찬란한 옷들의 향연에 은근히 관심이 쏠리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대찬은 그를 보고 외쳤다.
“미스터 누무, 컴 히어.”
“어흠.”
피터는 헛기침을 하면서도 은근슬쩍 대찬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건 피터를 위한 선물이에요. 한국에서 유명한 사람을 위해 만든 옷이에요. 특별히 피터를 위해 줄게요.”
“유명한 사람?”
“네. 다른 사람이 채가기 전에 얼른 가져가세요.”
대찬은 그의 손에 붉은 티셔츠 1장을 들려주었다.
피터는 사양하지 않았다.
“어흠, 고맙소.”
“별말씀을요. 받아주셔서 고마워요, 미스터 누무.”
“이제는 피터라고 불러도 좋소.”
“고마워요, 피터.”
대찬은 씩 웃었다.
유명한 사람을 위해 만든 옷이었다니.
은근히 관심이 동한 피터는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티셔츠의 붉은색이 강렬했다.
그는 제법 만족스러운 듯 옷을 내려다보더니 휙 돌아갔다.
돌아가는 그의 등에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준비된 여성대통령! 기호 1번 박근혜.
대찬의 선물공세로 마라와카 사람들의 경계심은 다소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몇 번의 선물로 허물이 없어질 만큼 물렁한 원톡이 아니었다.
대찬은 비즈니스가 어학연수를 온 것처럼 열심히 히프마어를 연마했다.
“커피 한 포대 다른 마을 팔면 얼마?”
이 정도의 어눌한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
마라와카 사람들은 대찬의 노력이 가상해서 기꺼이 말 상대를 해주었다.
“2키나. 걸어서 모로베까지 가서 팔면 3키나.”
“2키나, 3키나. 오케이.”
모로베는 마라와카의 동쪽에 있는 지방이었다.
도로가 변변찮으니 그걸 등에 짊어지고 한참을 걸어가 파는 값이 3키나였다.
대찬은 주민들과 친분을 쌓는 동시에 비즈니스에 필요한 정보들을 수집했다.
키나는 파푸아뉴기니의 화폐단위였다.
1키나는 한화로 약 4백 원가량.
최고급이 아니라 중간품질의 커피였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2키나면 800원, 3키나면 1,200원이었다.
‘저렴해도 너무 저렴한데.’
물론 단순히 커피 값보다 수반되는 운송비용이 훨씬 많았다.
경비행기로 수도까지 나르고, 그걸 또 한국으로 들여와야 했다.
거기에 붙는 세금이나 생두를 가공하는 공임까지 고려하면 값은 몇 배로 뛸 것이다.
‘그래도 너무 싸.’
이 정도면 원톡의 불합리하고 비공식적인 제도에 발목이 잡혀도 감수할 만한 값이었다.
돈 냄새를 맡았으니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
대찬은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협상보다는 친분 쌓기에 열을 올리던 나날, 1대의 경비행기가 마라와카 비행장에 착륙했다.
멀리서부터 우우웅, 경비행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들리자 아이들은 대찬이 왔을 때처럼 우르르 비행장으로 몰려갔다.
‘누구지?’
대찬도 민승기와 함께 비행장으로 향했다.
거기서 내린 사람들은 키 크고 콧대 높고 피부가 흰 백인들이었다.
피터가 말하던 호주 바이어들인 듯했다.
그들은 피터와 악수를 하고, 주민들에게도 손인사를 했다.
그들은 익숙하게 비행장에 잔뜩 쌓인 커피 생두를 비행기에 실었다.
그러고는 촌장에게 대금을 지불했다.
주민들이 커피 포대를 비행기에 나르는 동안, 호주 바이어들은 허리에 손을 얹고 뻑뻑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대찬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양인이 여기까지 왔다면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호주 바이어는 눈빛을 벼리며 대찬에게 저벅저벅 다가왔다.
“Hey.”
“Hey.”
대찬은 손을 들며 인사에 응했다.
호주 바이어는 대찬에게 다가와 담배를 건넸다.
“Cigarette?”
“I have.”
대찬은 사양하고 자신의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자연스레 맞담배를 피우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저는 조나단 테일러라고 합니다. 조나단이라고 부르십시오. 그쪽은?”
“조대찬입니다. 편하게 초라고 부르십시오.”
“한국인입니까, 중국인입니까?”
“중국인이었다면 저를 짜오라고 소개했겠지요. 한국인입니다.”
“오케이, 초. 마라와카 사람들이랑 커피 계약을 체결하러 왔습니까?”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신한텐 별로 달가운 소식은 아니겠죠.”
“하하, 달갑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우려하는 일만 저지르지 않으신다면야.”
“우려하는 일이라뇨?”
조나단은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이곳의 커피 가격을 적정가 이상으로 사들이는 일 말입니다.”
“적정가라면 얼마입니까?”
조나단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3키나.”
“이 사람들은 그 가격에 판매하고는 있습니다만, 너무 저렴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조나단은 담배연기와 함께 한숨을 토했다.
“초, 비즈니스맨은 철저한 자본주의자가 돼야지요. 수요와 공급이 3키나에 맞아떨어집니다.”
“저도 NGO 소속은 아닙니다. 과도한 비용을 지불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철저한 자본주의자라면, 독점이 깨지고 경쟁이 붙었을 때의 가격상승을 감당할 줄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조나단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저와 경쟁을 하시겠다고요?”
“무작정 들이받을 생각은 없습니다만, 우리한테 이익이 되면 못할 것도 없지요.”
“한국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무지막지하게 경쟁한다더니, 역시 경쟁심이 투철하군요.”
대찬은 웃었다.
“한국인들은 모두 철저한 자본주의자라서요.”
“좋습니다. 저도 경쟁을 꺼리진 않지만,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군요.”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격주로 마라와카를 방문합니다. 그때도 계실까요?”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