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21화
“무턱대고 부딪치는 건 너무 무모하지 않아요?”
“응, 무모하지. 갈 길이 멀어. 우리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최대한 값을 낮춰야 해. 그래서 현지의 커피공장도 인수해야 하고, 그 전에 현지인들과의 교분도 깊게 쌓아야 해.”
“제 말이요.”
민승기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네가 필요해.”
“네? 제가요?”
“응. 내가 아무리 사방팔방 열심히 뛴다고 해도 혼자 힘으론 어림도 없어.”
너무나도 당연한 말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필래의 도움이 필요해.”
“제가 필래와 직접 협상하기를 원하세요?”
“응.”
민승기의 목소리가 너무나 당당해서 대찬은 실소를 흘렸다.
“아무리 필래가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CS나 서원웅이 우리한테 호의적이라도 어쨌든 기업은 기업이잖아요. 자선단체가 아니잖아요.”
“별 볼 일 없는 우리를 선뜻 도우려 하지 않는다는 거지?”
“네.”
민승기는 대찬을 빤히 보며 말했다.
“필래가 그렇게 나올 자격이 있을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민승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지금까지 필래가 너로 인해서 얻은 이익이 얼마야? 까놓고 말할까? 너 없으면 지금의 필래 비바체가 있을 수 있어? 애초에 필래마트 자체도 없었을 거야.”
“…….”
“모든 일을 너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건 아니지. 하지만 네가 없었으면 이만큼의 성장? 어불성설이야. 필래마트는 진즉 망하고 간판 내렸을걸.”
“제가 그렇게 말해봤자 서씨 일가가 꿈쩍이나 하겠어요?”
“이 정도도 안 도와주는 서씨 일가 곁에 네가 더 머물 이유가 있어?”
“극단적으로 말씀하시네요.”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그럴 만하니까.”
대찬은 이마를 매만졌다.
민승기는 사업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얼마 안 되는 자본을 싸들고 혈혈단신 파푸아뉴기니로 가겠다고 했다.
대찬에게 전한 말은 간단했지만, 그 말을 하기까지 그는 무수히 고뇌하고 연구했을 것이다.
민승기가 이 정도로 확신하는 사업이라면, 필래의 도움만 갖춰진다면 승산이 충분했다.
대찬은 사업을 보고 판단하지 않고 사람을 보고 판단했다.
춘추시대 패자의 반열에 오른 제나라 환공은 이렇게 말했다.
‘군주는 참 쉽고도 어려운 자리다. 유능한 재상만 찾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쉽다. 다만, 유능한 재상을 찾는 게 어려울 뿐이다.’
제나라 환공은 관포지교로 유명한 관중을 등용하여 춘추오패의 반열에 오른다.
대찬은 스스로의 안목을 신뢰했다.
민승기는 로튼 프룻츠의 유능한 재상, 관중이었다.
대찬은 잠깐 침묵하다가 민승기를 바라봤다.
“알았어요. 제가 담판 짓고 올게요.”
“좋아. 그래야 조대찬이지.”
민승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면서 웃으며 커피를 마셨다.
이번 일은 민승기의 명운이 걸린 일이기도 했지만, 대찬에게도 중요한 전환점이 될 터였다.
대찬은 서원웅을 만났다.
결연한 얼굴을 보고 서원웅도 그에게 시시한 농담을 던지지 않았다.
“용건이 있나 본데.”
“있어. 오늘은 반말로 할게.”
“매일 반말로 해도 돼. 반말을 강조하는 거 보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나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금은 필래 비바체 차장 신분으로 만나려는 게 아니라서.”
“말해봐.”
“내가 필래 비바체 차장이면서 로튼 프룻츠 대표이사 겸하고 있는 거 알지?”
서원웅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당연하지. 나도 회원이고.”
“승기 선배가 이번에 사업을 하나 진행하려고 하는데, 필래 쪽의 도움이 필요해.”
“무슨 사업인데?”
대찬은 민승기에게 들은 바를 간추려 설명했다.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길을 가시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만.”
“승기 선배가 아무리 열정을 갖고 있어도 열정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잖아. 특히 혼자서는.”
“그러니까 필래가 지원을 해줬으면 한다는 거지?”
“지원이 아니라 투자, 혹은 파트너십.”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이 좋을까?”
“나도 여러모로 생각해봤어. 가능하면 웜샤인 쪽을 움직이고 싶은데.”
서원웅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웜샤인? 웜샤인을 끼면 필연적으로 수익이 감소할 수밖에 없어. 사회적 기업이니까.”
“알아. 게다가 파푸아뉴기니면 대중한테도 생소해서 펀딩도 기대하기 어렵겠지.”
“그런데 왜……?”
대찬은 서원웅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원톡이라고 들어봤어?”
“원톡?”
“응. 파푸아뉴기니는 천 개에 달하는 부족이 860가지의 언어를 사용한대.”
“대단한데. 그래서?”
“국가에 대한 소속감은 미미하고 한 가지 언어, 그러니까 원톡(One Talk)을 공유하는 공동체끼리의 소속감이 굉장하대.”
“응.”
서원웅은 대찬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사업하러 온 외국인 역시 이 원톡에 소속되어야 해. 안 그러면 굉장히 적대적이래.”
“보통 소속감은 공통의 적을 두면서 발생하니까.”
“그러자면 비즈니스 외적인 지원이 필수야. 그 지원을 웜샤인이 공공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맡아줬으면 해. 동시에 합리적인 가격을 지불하고 서로 윈윈하는 공정무역도 타이틀로 걸고.”
서원웅은 길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대찬의 말을 듣자마자 선선히 응낙했다.
“좋아. 그렇게 할게. 내 권한 밖의 일은 내가 직접 회장님을 설득해낼게.”
“너무 순순한 거 아니야?”
서원웅은 멋쩍게 웃었다.
“그럼 너 상대로 장사라도 할 줄 알았어?”
“그래도 최소한의 비즈니스 마인드는 발휘할 줄 알았지.”
“네 앞에서 주판알 튀기는 게 도리어 손해지. 필래 비바체가, 그리고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순전히 네 헌신 덕이니까.”
대찬은 검지로 뺨을 긁적였다.
“헌신씩이나.”
“헌신 맞아. 그리고 이건 비즈니스 마인드를 발휘한 결정이기도 해. 네가 밀어붙인다면 반드시 승산이 있는 싸움이란 거니까.”
민승기가 대찬의 관중이듯, 대찬은 서원웅의 관중이었다.
서원웅은 대찬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대찬은 흡족하게 웃었다.
“이거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
“지금 보면 눈물은커녕 안구건조증 걸린 것처럼 뻑뻑한데? 대찬아, 근데 무턱대고 밀어줄 순 없는 거 알지?”
“지금 3초 만에 말 바꾸는 거야?”
“그래도 내 손에 최소한의 근거는 들려 있어야 하잖아. 회사는 내 개인소유가 아니니까. 웜샤인을 움직이고, 회장님을 움직일 최소한의 근거는 있어야 해.”
“일단 승기 선배가 파푸아뉴기니로 갈 채비를 하고 있어.”
“승기 선배는 로튼 프룻츠를 대표하는 사람이지, 필래를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야. 파트너십을 체결하려면 필래 측의 사람 역시 동행해야 해.”
이쯤 들으니 대찬은 서원웅의 말뜻을 충분히 짐작했다.
“나도 거기 가라는 뜻이지?”
“너만큼 좋은 대표자가 어디 있어. 공식적으로 필래와 로튼 프룻츠에 적을 둔 사람은 너뿐이거든.”
대찬도 은근히 바라던 일이었다.
아무리 민승기를 신뢰한다지만 결국 남이었다.
남에게 자신의 명운을 맡기는 건 대찬의 성미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필래 비바체의 혁신경영팀장으로서의 업무가 있었기에 파푸아뉴기니로 가겠다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했다.
서원웅은 그런 대찬의 마음을 예견하고도 남았다.
“필드 업도 본격적인 시공에 들어갔고, 공채도 끝났고, 택배사업부도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고, 당분간 혁신경영팀이 할 일이 많지는 않을 거야.”
“맘 놓고 떠나도 되겠지?”
“송희근 과장님이 아주 미덥지는 않아도, 현상유지는 끝내주게 잘하시잖아?”
“그런 면에선 나보다 훨씬 적임이지.”
대찬과 서원웅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서원웅의 협력을 얻은 대찬은 바로 파푸아뉴기니 사업비자를 발급받았다.
준비가 모두 끝나고, 대찬은 혁신경영팀 회의에서 툭 던지듯 말했다.
“저 내일부터 당분간 출근 안 합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허운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파푸아뉴기니로 장기출장 갑니다.”
“파, 파푸아뉴기니?”
“저 없는 동안 팀장 대행은 송 과장님이 해주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얼마 만의 최고참 노릇이냐.
송희근 과장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돌았다.
“나머지 분들은 송 과장님 잘 따라서 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해주세요.”
“네, 차장님.”
그렇게 직원들을 단속한 대찬은 바로 파푸아뉴기니로 떠났다.
동행은 민승기 하나뿐이었다.
대찬과 민승기는 공히 상기된 얼굴이었다.
미지의 영역을 개척한다는 기대감.
그리고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두려움.
더군다나 목적지가 파푸아뉴기니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대찬과 민승기는 한 사람 몫치고는 많은 짐을 꾸렸다.
누가 보면 이민이라도 간다고 생각할 터였다.
짐에는 동묘시장에서 도떼기로 구입해 열심히 세탁한 구제 의류들이 가득했다.
거기에 아이들을 위한 학용품 등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정작 체류를 위한 필수품들은 최소한만 구비했다.
현지의 ‘원톡’에 들기 위한 필사의 자구책이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민승기에게 물었다.
“마음의 준비는 다 되셨어요?”
“준비는 계속하고 있는데 자꾸 심장이 벌렁거린다.”
“지금이라도 물릴 기회를 드릴게요.”
대찬의 말에 민승기는 피식 웃었다.
“여기서 물리면 소인배밖에 더 되냐? 네가 소인배하고 오래 사귀는 타입 아닌 거 잘 알고 있거든?”
“역시 선배는 배짱이 두둑하네요.”
“네 배짱만 할까.”
민승기는 대찬의 배를 주먹으로 툭 건드렸다.
파푸아뉴기니로 가는 직항은 없었다.
대찬과 민승기의 티켓도 홍콩을 경유해 파푸아뉴기니의 수도인 포트모르즈비로 들어가는 여정이었다.
둘은 홍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벌써부터 날씨가 후텁지근했다.
대찬은 셔츠 단추 하나를 풀며 민승기에게 말했다.
“여기도 벌써 이런데, 거기는 오죽할까요.”
“미치는 거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커피 산지는 해발 2천 미터 되는 고원지대에 있으니까 여기보단 좀 나을 거야.”
대찬은 혀를 쭉 내밀고 지친 눈빛으로 말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자, 더위타령은 그만하고 나가서 맥주나 한잔하자. 야경도 좀 즐기고. 오늘 이후로 당분간 문명은 안녕이야.”
“그러시죠.”
대찬과 민승기는 번잡한 홍콩의 도심으로 향했다.
비정상적인 인구밀도 때문에 홍콩은 부동산값이 비쌌다.
식당들의 테이블은 조금이라도 많은 손님을 모시려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대찬은 와글거리는 광둥어 틈바구니에서 맥주와 강렬한 양념으로 볶은 게요리를 즐겼다.
향긋한 후추와 마늘의 향기가 대찬의 코를 자극했다.
민승기는 겉에 송골송골 이슬이 맺힌 맥주잔을 대찬에게 내밀었다.
“썩은 과일들의 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대찬은 웃으면서 챙, 잔을 부딪쳤다.
둘은 목을 뒤로 젖히고 꿀꺽꿀꺽 맥주를 들이켰다.
식도를 급랭시키는 듯한 짜릿한 기운이 속을 쓱 훑으며 내려갔다.
꿉꿉한 홍콩의 더위가 일순 가셨다.
알딸딸하게 취해서 호텔로 돌아온 둘은, 부드러운 이불의 촉감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최대한 만끽했다.
그리고 동이 틀 즈음, 포트모르즈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륙할 때는 홍콩의 빌딩 숲이 시야에서 멀어졌는데, 착륙할 때는 파푸아뉴기니의 우거진 열대가 시야에 펼쳐졌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적도의 열기가 온몸으로 쏟아졌다.
“덥다 덥다 말만 들었지.”
대찬은 열기와 맞닥뜨리는 순간 내가 왜 이 생고생을 자청했을까, 곧바로 후회했다.
그때 한 풍채 좋은 파푸아뉴기니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혹시 한국에서 오신 미스터 민 앤 미스터 초?”
“아, 맞습니다.”
민승기는 웃으면서 악수를 청했다.
남자는 유쾌하게 악수에 응하며 자기를 소개했다.
“제이콥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찬도 제이콥과 악수를 나눴다.
민승기가 웃으면서 제이콥을 소개했다.
“이분은 CIC 소속이야. 우리가 사업하는 데 도움을 주실 거야.”
“CIC요?”
“Coffee Industry Corporation. 커피산업협회. 정부 산하 기관인데, 여기서 커피 제조업체에 대한 인증, 생산과 제조공정에 대한 관리감독을 담당하고 있어.”
“아이고, 우리한테 슈퍼갑이셨군요.”
“그럼. 잘 보여야 해.”
대찬은 웃으면서 제이콥과 악수를 나눴다.
“잘 부탁드려요, 제이콥.”
“걱정 마십시오. 지금껏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커피는 유럽과 호주가 독점하다시피 했는데, 새로운 거래처를 뚫는 건 저희도 바라는 일이니까요.”
“서로 이익을 보는 건설적인 거래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제이콥은 눈을 찡긋했다.
“그걸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자, 먼 길 오셨으니 제가 식사대접을 하죠.”
“고마워요, 제이콥.”
“다 비즈니스의 일환인데요, 뭘.”
대찬과 민승기는 호텔에 짐을 풀고 제이콥의 안내를 받아 한 식당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