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20화
둘의 사정을 모르는 인사팀장은 태연히 면접을 이어나갔다.
“우리 회사에 지원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뭐, 우리 회사에만 지원하시진 않았겠지만…….”
“아, 네. 저에게는 꼭 필래 비바체, 특히 마트사업부에서 일해야 할 분명한 동기가 있습니다.”
“뭡니까? 말씀해보시죠.”
“저는 필래마트 수유점에서 약 1년간 파트타이머로 근무했습니다. 근무하는 동안 좋은 기억이 많이 남아 필래 비바체의 일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보다 더 결정적인 계기는…….”
맹윤주는 자신의 친할아버지인 진공청소기 할아버지의 얘기를 조리 있게 설명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당시 근무하던 수유점 점장이 자신의 롤 모델이며, 필래의 일원이 된다면 그처럼 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사자 앞에서 저렇게 뻔뻔하게 공치사 늘어놓는 것도 재주다.’
오히려 대찬이 부끄러워져 살짝 얼굴을 붉혔다.
“감사합니다.”
맹윤주는 꾸벅 인사를 올리고 면접장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고 인사팀장이 같은 인사팀 과장에게 슬쩍 물었다.
“진공청소기 손녀 어땠어?”
“음, 당차고 나름 센스도 있어 보이고, 우리 마트에서 일한 경력도 있어서 괜찮긴 한데…….”
“아무래도 학벌이 좀 걸리지?”
“네. 기본 스펙도 좀.”
인사팀장은 과장과의 대화에서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자 대찬을 바라봤다.
“조 차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평가를 보류하겠습니다. 두 분이 결정해주십시오.”
“으음…….”
“다만, 면접 과정에서 확인된 장점이 학벌 때문에 묻히는 건 부적절하다는 게 개인견해입니다.”
“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잠깐의 면접에서 확인한 모습으로 판단할지, 그래도 다년간의 노력을 증명하는 출신대학으로 판단할지 감이 안 잡히는군요.”
첫 번째 삶에서 학벌 때문에 된통 당한 기억이 있는 대찬이었다.
학벌과 학력은 엄연히 다르다.
누군가 좋은 대학을 나왔다면, 그건 준수한 학식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하지만 학벌은 좁게는 출신 학교로 파벌을 형성하거나, 넓게는 대학 간판만으로 사람을 규정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재능은 있어 보이는데, 대학 간판이 별로라는 말은 언어도단이다.
재능이 있는지를 가늠하려고 대학 간판이라는 불확실한 도구를 이용하는 것이다.
재능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 불확실한 도구는 더 필요하지 않다.
대찬은 인사팀장에게 말했다.
“모쪼록 잘 판단해주십시오. 인사팀장님의 안목을 신뢰합니다.”
“하하, 조 차장님도 결정권이 있습니다. 맘에 드시면 후한 점수를 주면 되지 않습니까?”
“저는 평가표에 아무런 의견도 적지 않을 겁니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거든요.”
“아…….”
대찬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말했다.
“인사평가기준은 팀장님께서 더 잘 아시니까 말을 더 안 보태겠습니다.”
“제가 행간을 잘 짐작해서 처리하면 되겠습니까?”
“아뇨. 그냥 팀장님 기준대로 처리해주세요. 은근한 청탁 넣고 그럴 생각 추호도 없습니다.”
대찬의 단호한 대답에 인사팀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대찬이 그렇게 말한 건 맹윤주를 위한다기보다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가뜩이나 왕차장 소리를 듣는 마당에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고쳐 매고 싶지는 않았다.
맹윤주가 합격할 자격이 된다면 자신의 입김이 없어도 충분히 합격할 것이다.
기준에 미달한다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
대찬은 맹윤주에 대한 평가표를 백지로 두었다.
“다음 면접자 들여보내세요.”
인사팀장의 말에 다음 면접자들이 들어왔다.
대찬의 눈이 빛났다.
‘잘 걸렸다.’
하얀 세단이었다.
유독 날카로운 눈매가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 날카로운 눈매는 대찬을 발견하자마자 순하게 변했다.
당황한 눈동자는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대찬은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
하얀 세단은 뒤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남들 곧잘 줄줄 외는 자기소개도 더듬거렸다.
“저, 저는 나대훈이라고 하고… 제 장점은…….”
그걸 보고 인사팀장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벌써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나대훈 씨, 질문 하나만 할까요?”
“네? 아, 넵.”
하얀 세단, 나대훈의 목소리에 군기가 잡혔다.
“운전습관은 그 사람의 인격이라는 말이 있는데, 동의하시나요?”
“저, 그게…….”
“사실 면접이란 자리는 누구나 가면을 쓰기 마련이잖아요. 돈 벌려고 지원했는데 회사에 충성을 다 바친다 하고, 항상 사표를 만지작거릴 거면서 뼈를 묻겠다 하고…….”
“…….”
“그런데 운전습관은 그게 아니잖아요. 거리낌 없는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죠. 어때요, 나대훈 씨 생각은?”
나대훈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울먹거렸다.
대찬이 말을 이었다.
“저한테 진짜 다른 데서 보면 쪽도 못 쓸 새끼라고 하셨죠? 어떠신가요, 다른 데서 보니.”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대찬은 덤덤하게 말했다.
“저한테 사과를 할 거면 잠실대교 위에서 하셨어야죠. 지금의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야말로 엎드려 절 받기죠.”
“죄송합니다…….”
“사과할 거 없다니까요. 저는 나대훈 씨를 떨어뜨릴 거고, 그럼 나대훈 씨도 저한테 그런 거짓사과하실 필요 없잖아요.”
“…….”
“여기서 비굴하게 사과하고, 돌아서면서 재수 옴 붙었다 침이나 뱉지 마십시오. 그러지 마시고, 마음을 나쁘게 쓰면 몇 배로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는 걸 생각해주세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나대훈에게 부적격 판정을 내렸다.
나대훈은 터덜터덜 힘없는 걸음으로 면접장을 떠났다.
대찬은 그에게 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인사팀장은 대찬을 흘끗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조 차장님 아시는 분들이 많이 오셨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며칠 후.
필래 비바체는 최종합격자를 발표했다.
대찬은 업무를 빙자해 인사팀을 방문했다.
대찬이 넌지시 인사팀 직원 하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저, 혹시.”
“아, 조 차장님.”
“뭐 하나만 여쭤보려고 하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혹시 이번 합격자 명단에 맹윤주 씨라고 있나요?”
“맹윤주 씨요. 잠시만요.”
명단을 훑은 직원은 대찬에게 대답했다.
“없는데요, 차장님.”
“아… 고맙습니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으며 꾸벅 인사를 하고 인사팀을 떠났다.
그날 대찬은 맹윤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맹윤주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점장님! 아, 아니지. 차장님.”
“맹윤주 씨.”
“저 불합격한 게 마음에 걸리셔서 전화까지 주셨어요? 아, 다른 이유로 전화하셨는데 제가 너무 앞서나갔나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맞습니다.”
“차장님은 어떨 땐 독사처럼 냉정하시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또 착하고 그러세요.”
“착하긴요. 마음의 짐 좀 덜려고 괜히 전화기 든 거죠.”
맹윤주는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신경 쓰지 마세요. 제 스펙 워낙 변변찮은 거 저도 잘 알아요.”
“제가 면접관으로 있으면서 마음만 먹으면 맹윤주 씨 합격시킬 수 있었어요. 그래도 그러지 못했어요. 맹윤주 씨 평가표를 그냥 공란으로 두었습니다.”
“역시 공명정대하시다니까. 비꼬는 거 아니에요. 정말 존경해요, 차장님.”
“제가 지금까지 봐온 맹윤주 씨는 다른 합격자들에 비해 손색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채용 시스템이 그걸 간파하지 못할 정도로 허술했습니다.”
“그게 어떻게 시스템 잘못이겠어요. 시스템에 맞추지 못한 제 잘못이지.”
“주저리주저리 변명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차장님도 인재를 놓친 아쉬움이 크신 거죠.”
대찬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음에 특채 기회가 있으면 꼭…….”
맹윤주는 대찬의 길어지는 말을 차단했다.
“할아버지가 차장님 뵙고 싶어 하세요. 다음에 여유 생기시면 저희 할아버지랑 막걸리나 한잔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전화 주셔서 고마워요. 이렇게 살뜰히 챙겨주시는 분이 계시니까 더 가고 싶어지네요, 비바체에.”
“낙심하지 말고 잘 준비하셔서 한 번만 더 지원해주세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네! 그럴게요.”
대찬은 전화를 끊고도 한동안 입안에 쓴맛이 맴돌았다.
‘나는 맹윤주 씨를 잘 아는데. 잘 안다는 사실이 오히려 제 입을 막더군요.’
그 사람을 잘 알기 위해서 면접을 보는데, 대찬은 맹윤주가 신입사원에 적합한 사람이란 걸 잘 알고도 그녀를 뽑지 못했다.
기분이 복잡했다.
“아, 여기.”
“선배.”
혁신경영팀 업무가 한창 바쁜 와중.
대찬은 로튼 프룻츠를 도맡은 민승기와 만났다.
커피를 좋아하는 그답게 저녁에도 술집이 아닌 카페로 불렀다.
대찬은 카페 안으로 들어오면서 웃었다.
“선배 취향은 확실히 고급이네요. 이 동네에 이렇게 세련된 카페가 있는 줄은 몰랐네요.”
“커피 맛은 더 세련됐어. 여기, 100프로 코나원두 커피거든.”
“코나요?”
“하와이산 원두야, 산미가 두드러지는. 마셔봐.”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야 소주 맛은 구분해도 커피는 전혀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런 문외한도 구별할 정도로 확 맛이 좋아야 진짜 고급이지.”
“그렇긴 해요.”
대찬은 커피를 한 모금 머금고 한참을 음미했다.
그는 싱겁게 웃으면서 말했다.
“역시 모르겠는데요.”
“신은 공평하다니까. 그래, 뭐든지 만능인 조대찬이 커피 맛이라도 몰라야지.”
“만능이긴요. 연애사업에도 꽝인데요.”
대찬의 말에 민승기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그건 안타깝게 됐다. 마음은 좀 추슬렀고?”
“네. 지금은 완전 회복했어요.”
“곧 다른 피앙세가 오겠지. 너 정도면 얼마든지 좋은 여자 사귈 수 있잖아.”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저도 이제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서.”
“1살 많은 노총각 앞에서 그런 말 하기 안 미안하냐?”
“아, 선배, 만나는 사람 있지 않았어요?”
민승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중소기업도 못 되는 유령회사 대표랑 누가 사귀어주겠냐. 낭만도 없는 30대에.”
“…제 책임인 거 같아서 죄송하네요.”
“내가 자청한 일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제 슬슬 진짜 사업을 해보려고 하는데.”
“잡아둔 아이템이라도 있으세요?”
민승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커피 잔을 들었다.
그가 내내 입을 열지 않자 참지 못한 대찬이 다시 물었다.
“말씀하세요, 아이템.”
“대답했잖아, 이거.”
민승기는 다시 커피 잔을 들어 보였다.
“커피요?”
“응. 원두를 직접 수입해볼까 해.”
“대기업들이 이미 많이 진출해 있는데, 경쟁력이 있을까요?”
“그러니 틈새시장을 노려야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고급원두를 수입할 거야. 파푸아뉴기니라고 알아?”
“인도네시아 옆에 있는 나라 아니에요?”
민승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라가 커피재배에 아주 적합하거든. 특히 자메이카에서 들여온 블루마운틴 커피가 유명해.”
“근데 그 나라 치안이나 인프라가 많이 열악하다고 들었는데…….”
대찬은 우려스러웠다.
파푸아뉴기니는 지구상 최후의 원시국가라고 불리는 나라였다.
반대로 말하자면, 현대에 당연스럽게 통용되는 것들이 통용되지 않는 나라라는 뜻.
최고의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고 있는 나라라고 하는데, 역시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개척되지 않은 나라라는 뜻이었다.
민승기는 대찬의 우려 섞인 시선을 충분히 이해했다.
“응, 열악하지, 많이. 그래서 내가 주목한 거야.”
“열악한 만큼 덜 개척됐다?”
“바로 그거야.”
“그래도 정말 괜찮겠어요? 보통 용기만으로는 안 될 텐데.”
민승기는 웃었다.
“용기로 부족하지. 만용이 필요한 사업이지.”
“만용을 부릴 만큼 사업성은 괜찮을까요?”
대찬은 민승기를 신뢰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대찬이 거듭 우려를 표할 정도면 파푸아뉴기니가 그만큼 어지간하다는 뜻이었다.
민승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판로만 뚫으면 승산이 있어. 국내 커피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어. 고급커피를 찾는 고정수요층도 갖춰져 있고.”
“파푸아뉴기니 커피는 확실히 고급커피라고 할 만한가요?”
“모든 파푸아뉴기니산이 고급이라고 할 수는 없지. 하지만 기후나 고도가 커피 재배에 최적이야. 충분한 고급커피 물량을 조달할 수 있어.”
“판로는 어떻게 뚫을 생각이세요?”
“이미 주한 파푸아뉴기니 대사관하고는 협의가 됐어. 비자발급도 끝났고, 이제 현지에 가서 부딪칠 거야.”
대찬은 여전히 완전한 신뢰를 갖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