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19화
장보고해운은 자신들의 큰손인 필래가 손해를 봐가면서 대뜸 지분을 전량 매각하자 당혹했다.
그다음으로 선박안전기술공단의 기습적인 안전검사에 더욱 당황했다.
선박안전기술공단은 그들이 보유한 낡고 낡은 선박들에 대한 운항을 모두 금지했다.
또한 일체의 불법행위들을 적발, 관련자들을 모조리 처벌했다.
대찬이 두 번째 삶으로 오면서 가질 수밖에 없게 된 특이한 책임감은, 다행히도 대학 졸업할 때의 숭례문처럼 망가지지 않았다.
서원웅이 대표가 된 후, 필래 비바체는 임원회의를 거의 실시하지 않았다.
임원회의 대신 확대임원회의라는 이름으로 회의가 열렸다.
확대임원회의는 이사급 이상인 임원에 더하여 주요 부서장들이 추가로 참여했다.
물론 이 주요 부서장에는 혁신경영팀장인 대찬도 포함되었다.
회의가 진행되는 중, 경영지원부문장인 옥문영 상무가 말했다.
“이번 상반기 공개채용은 가장 큰 규모로 실시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회사 덩치가 거의 2배가 됐으니.”
“저희 경영지원부문 인사팀에서 잘 준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아, 그리고 혁신경영팀도 인사팀과 함께 공채에 참여하시죠.”
그 말에 대찬이 즉각 반응했다.
“혁신경영팀이 공채까지 개입하는 건 무리 아닐까요?”
“무리일 것까지야. 인사팀이 주도하되, 혁신경영팀이 서포트 좀 해주라는 거예요. 인사팀장, 괜찮죠?”
“저희야 혁신팀에서 도와주면 오히려 감사하죠. 업무매뉴얼도 정비하고, 면접 때도 인력 지원해주시면 한결 수월할 겁니다.”
대표의 지시였지만 어디까지나 주무부서는 인사팀이었다.
거기에 혁신경영팀이 끼어드는 것에 대찬은 부담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인사팀에서 도리어 환영하니, 대찬도 더 사양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혁신팀은 앞서나가지 않고 충실하게 인사팀 서포트 하겠습니다.”
“그리고 면접 때 조 차장도 면접관으로 들어가줬으면 하는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대찬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필래마트가 필래 비바체로 사명을 변경하고 처음 실시하는 상반기 공개채용.
확실히 회사의 체급과 평판이 높아진 까닭인지 지원자가 많이 몰렸다.
지원자가 많다는 건 기업에서 우수한 인재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많다는 뜻이었다.
대찬으로서는 흐뭇했다.
오다혜가 정확한 수치로 일러주었다.
“전년 공채 대비 지원자 수가 120퍼센트나 늘었어요.”
“음, 택배사업부가 편입된 걸 고려하더라도 확실히 인기가 좋아졌네.”
그 말에 오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사명을 변경한 것도 영향이 있을 거예요.”
“마트에서 비바체로?”
“네. 확실히 세련됐잖아요? 마트라고 하면 어쩐지 느낌이 안 살잖아요. 소위 ‘간지’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겨우 그거 때문에 이렇게 지원자가 몰리려고.”
“에이, 모르시는 말씀이에요, 차장님. 회사 이름이 취준생한테 얼마나 큰 건데요.”
“그래요?”
오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 갓 졸업한 구직자들은 사실 헛똑똑이거든요.”
“헛똑똑이라니?”
“자기 딴에는 잘 따진다고 따지는데, 그게 의외로 수박 겉핥기예요.”
“다른 사람은 안 그런데 오 대리만 그런 거 아니야?”
대찬의 말에 오다혜는 발끈했다.
“아니거든요! 이런 애들이 태반이에요. 직무나 사내 분위기, 복지보다도 연봉하고 회사 이미지만 보고 지원한다니까요.”
“알았어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어쨌든 이렇게 지원들을 많이 해줬으니까 우리도 빈틈없는 준비로 맞아야 해요. 말 안 해도 다들 아시죠?”
“네, 차장님.”
“만전을 기합시다.”
대찬은 웃으면서 기합을 불어넣었다.
혁신경영팀은 인사팀과 함께 공채전형을 새로 설계했다.
키와 몸무게, 부모님의 직업과 자가 여부, 한자이름 등을 물어보는 기존의 입사지원 서류를 손봤다.
그것들은 모두 제대로 된 직원을 채용하는 데 아무런 필요가 없는 문항들이었다.
대신 직무에 대한 이해와 전반적인 업무처리능력을 최대한 검증할 수 있는 문항을 추가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하는데, 뒤집으면 디테일에 핵심이 있다는 말이었다.
주마간산으로 전반적인 역량을 훑어보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딜레마 상황과 자세한 지식을 묻는 항목으로 최대한 촘촘한 체를 만들었다.
서류전형에서 지원자를 거르는 일은 인사팀에서 도맡아 처리했다.
그리고 면접.
면접날 출근하는 대찬은 유독 넥타이를 매는 데 시간을 오래 할애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많이 컸다, 조대찬. 사람 고르는 위치까지 올라가고, 주제에.’
대찬은 웃으면서 이마로 흘러내린 한 가닥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대찬은 자차로 출근했다.
지난날 받은 1억 원 금일봉의 일부를 떼어 장만한 승용차였다.
주변에서는 폼 좀 나게 때깔 좋은 외제차를 뽑으라고 했다.
하지만 대찬은 국민차라고 불리는 중형 세단을 장만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강북의 자택에서 송파의 사옥까지 출근하는 데 자가용은 사실 좋은 교통수단은 아니었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그렇게 출근하고 싶었다.
복잡한 시내를 빠져나가 주차장 같은 동부간선도로를 내려갔다.
그리고 더 주차장 같은 강변북로에 진입했다.
이쯤 되니 들뜨던 대찬의 마음은 얼마 가지 못해 축 가라앉았다.
‘지옥철이 낫다.’
대찬은 삐딱하게 턱을 괸 채로 지루하게 운전했다.
그렇게 잠실대교로 진입하려던 참이었다.
한강 남쪽으로 건너가려는 차들로 그쪽 차선이 유독 붐볐다.
아직 출근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천천히 차례를 지켜 진입하려고 했다.
이제 꽉 찬 차선 끝에 이르러 잠실대교로 진입하려는 찰나.
빵!
갑자기 다짜고짜 머리를 들이미는 차를 보고 대찬은 세게 클랙슨을 울렸다.
하얀 세단이었다.
“저게 어디서 끼어들어!”
여유로운 차선으로 실컷 빠르게 달려놓고, 막바지에 이르러 강남으로 향하는 차선에 끼어든다.
대찬은 자신이 허비한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용서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앞차에 바짝 붙여 끼어들 공간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얀 세단은 몇 번씩이나 진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축구대표팀에 버금가는 빗장수비에 번번이 막혔다.
‘질서 지키는 선진문화시민이 됩시다, 제발 좀.’
대찬은 혀를 끌끌 차면서 앞차와의 간격을 더 좁혔다.
하지만 하얀 세단의 근성도 어지간했다.
그는 어떻게든 대찬의 앞을 가로막아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집요하게 끼어들기를 시도했다.
‘안 돼. 돌아가. 끼어줄 생각 없어.’
그러나 대찬도 오기가 발동해 여지를 주지 않았다.
하얀 세단의 인내심이 먼저 고갈되었다.
그는 대찬의 옆에 바짝 붙더니 창문을 내렸다.
대찬은 곁눈으로 그쪽을 흘끗 봤다.
자신과 동년배거나 약간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눈매가 유독 날카로웠다.
그는 대찬을 향해 살기등등한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닫힌 창문으로도 어렴풋하게 들릴 정도로 언성도 컸다.
대충 듣자하니 대찬은 이미 사지가 갈가리 찢겼고, 이제는 부모님이 실컷 욕보이는 중이었다.
저런 놈팡이랑 얽히면 손해만 본다고 생각하면서도, 대찬도 슬그머니 창문을 내렸다.
대찬이 창문을 열자 하얀 세단의 기세가 더욱 올랐다.
“야, 이 개새끼야! 네가 뭔데 앞길 가로막고 지랄이야!”
“끼어들면 안 되죠. 이쪽 차선에서 20분, 30분 허비한 사람들은 뭐가 됩니까?”
“잘난 선비 나셨네. 엿이나 먹어, 새끼야!”
“내가 선비면 사대부 체통 지키겠다고 그쪽 같은 버러지랑 말도 안 섞었죠.”
“너 진짜 아가리 곱게 못 놀리냐? 확 칼로 찢어버린다!”
대찬은 방 안에서 엄지만 한 바퀴벌레를 본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래도 내 아가리가 그쪽 아가리보단 고운 거 같은데…….”
“아오, 진짜 다른 데서 보면 쪽도 못 쓸 새끼가! 내가 진짜 오늘 면접만 안 늦었어도 한 따까리 하는데.”
“면접이요? 제발 그 면접이 필래 비바체 면접이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대찬은 그것으로 하얀 세단과의 대화를 종결했다.
차창을 올리는 사이.
대찬은 하얀 세단의 얼굴이 살짝 당혹하는 걸 포착했다.
하얀 세단은 다투는 사이 앞차가 공간을 허용한 틈을 타 끼어들기에 성공했다.
대찬은 끌끌 혀를 찼다.
하얀 세단은 끼어드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도로가 좀 뚫리고 속도를 내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기도 했다.
대찬 역시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돌았네. 단단히 돌았어.”
대충 상황을 마무리하고 넘기려던 대찬도 슬슬 열을 받았다.
하얀 세단은 대찬의 직장인 필래그룹 사옥까지 가는 내내 그의 앞에 있었다.
하얀 세단의 면접이 필래 비바체 면접이 아니길 바란다는 대찬의 말이 예언이 되는 듯했다.
‘너는 내가 책임지고 떨어뜨린다.’
대찬은 애써 매만진 넥타이를 거칠게 풀었다.
필래그룹은 몇 년 전부터 그룹 차원의 공채에서 각 계열사 별 채용으로 바꾸었다.
그러니 이날 면접을 보러 온 사람들은 모두 필래 비바체 신입사원 공채 응시자들이었다.
대찬이 면접장에 도착하자, 같은 차장인 인사팀장이 눈인사를 했다.
“조 차장님, 어째 오늘따라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 혹시 면접 떠안으신 게 불쾌해서 그러시는지…….”
“아뇨, 그럴 리가요. 저는 제가 오늘 면접관인 걸 하늘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예? 하늘에 감사까지야…….”
“오늘 꼭 떨어뜨릴 사람이 생겼거든요.”
인사팀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찬에게 자판기 커피를 건넸다.
“…사심으로 떨어뜨리고 그러면 안 되십니다.”
“사심은 사심인데, 이건 우리 회사를 위한 거라서요.”
대찬은 뜨거운 커피를 무심결에 휙 들이켰다가 컥컥거렸다.
이 가벼운 화상의 책임까지 하얀 세단에게 물을 작정이었다.
대찬은 면접관으로서 면접장에 자리했다.
면접관은 혁신경영팀장인 대찬과 인사팀장인 차장, 그리고 인사팀의 과장이 맡았다.
‘일단 화는 좀 삭이고.’
하얀 세단 하나 때문에 회사의 백년대계를 망칠 순 없었다.
대찬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면접에 임했다.
대찬도 한때는 면접관이 아니라 응시자였다.
젊은 나이의 출세는 여러모로 좋았지만, 개중 하나는 올챙이 적 기억이 그래도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압박면접이랍시고 응시자의 빈정을 된통 상하게 만드는 일은 얼마나 빈번한가.
쓸데없는 질문을 물고 늘어져 시간을 허비하는 건 또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인가.
응시자를 곤란하게 만드는 질문은 필요하다.
곤란한 질문에 얼마나 조리 있게 대답하는가, 그것도 채용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신공격과 곤란한 질문조차 혼동하는 기준미달 면접관들을 대찬은 숱하게 봐왔다.
최소한 응시자들로부터 그런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
대찬은 그렇게 각오를 다지고, 또 면접관들에게도 당부했다.
‘면접은 소수의 합격자, 그리고 다수의 면접에 탈락한 소비자들을 상대로 한다. 그들도 우리한테 잘 보여야 하지만, 우리도 그들한테 잘 보여야 해.’
세련되고 합리적으로 면접에 임할 것.
그리하여 우수한 인재를 채용하고, 또 잠재적 고객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
그게 면접의 목적이었다.
미담은 잔잔히 퍼지지만, 악담은 파다하게 퍼진다.
게다가 필래 비바체로 사명을 바꾸고 처음 진행하는 면접.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하니 면접관들도 응시자들만큼이나 긴장했다.
면접은 생각보다 중노동이었다.
같은 질문을 계속 반복하니 입안이 바싹 말랐다.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면접에 임하던 대찬도 점점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변했다.
그렇게 한창 지루해질 즈음, 면접자가 들어왔다.
두툼한 뭉치의 면접 평가표들을 탁탁 정리하던 대찬은 다음 면접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어?”
대찬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면접은 다섯 사람씩 들어와서 봤는데, 그들을 보고 인사팀장이 말했다.
“자, 가장 왼쪽에 앉으신 분부터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맹윤주라고 합니다. 저는…….”
맹윤주는 준비한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대찬이 수유점 점장으로 있을 때 진공청소기 할아버지를 퇴치하기 위해 채용했던 손녀.
맹윤주 역시 대찬을 발견하고 살짝 당황한 낯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