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난 할 수 있어-218화 (217/556)

난 할 수 있어 218화

“그때는 허세 좀 부리느라.”

“얘기해봐요. 조 차장처럼 바쁜 사람이 그저 맥주가 땡겨서 날 만나러 오진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대찬은 즉답을 내놓지 않고 맥주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목구멍이 따끔거릴 정도로 마셨다.

그는 윗입술에 살짝 묻은 맥주 거품을 손등으로 슥 닦고 말했다.

“조만간 공식적으로 노조위원장께서 파업 종료 선언을 하시겠죠.”

“그럴 겁니다.”

“그 자리에서, 필래마트 산하에 들어가게 되어 기쁘다는 말씀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노조위원장은 대찬의 말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서청수 회장이 나중에 딴소리 못하도록 못을 박아달란 말이군요. 조 차장님 몫은 확실히 챙기겠다?”

“하하, 이게 왜 제 몫입니까. 우리 필래마트 몫이죠.”

노조위원장은 대찬이 그랬듯 즉답을 주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대찬은 침을 삼켰다.

탕, 노조위원장은 맥주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 몇 마디 보태는 거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게 하죠. 나도 조 차장 같은 양복쟁이들하고 일하고 싶으니까.”

“감사합니다, 위원장님.”

“감사할 거 없어요. 나도 좋은 사람하고 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자, 건배나.”

대찬과 노조위원장은 경쾌하게 잔을 부딪쳤다.

이틀 후, 필래유통 택배노조는 공식적으로 파업을 종료했다.

노조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동지 여러분, 우리는 오늘부로 파업을 종료합니다. 항상 파업을 거둘 때마다 씁쓸했습니다. 번번이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쳐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노조원들은 집중해서 노조위원장의 말을 들었다.

이런 저런 구호가 적힌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만 요란했다.

“하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오늘은 우리의 투쟁이 명백한 결실을 맺었습니다!”

“와아아아아―!”

“홍우창 동지의 죽음과 우리의 피땀 어린 희생으로 이룩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우리만의 공이 아님을 여러분도 잘 알 것입니다.”

노조원들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항상 재벌과 투쟁했지만, 이번만큼은 서청수 회장의 용단을 높이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

“맞아요!”

노조원들은 기본적으로 재벌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호응하는 목소리는 간헐적이었지만 최소한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다.

“우리는 필래유통의 지옥 같은 압제의 사슬을 끊고 필래마트로 갑니다. 일터다운 일터, 사람다운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자, 우리 구호 외치고 공식 해산하겠습니다. 제가 선창할 테니 따라해주십시오.”

“네에!”

“가자! 필래마트로!”

“가자! 필래마트로!”

“살자! 사람답게!”

“살자! 사람답게!”

“가자! 필래마트로! 살자! 사람답게!”

“가자! 필래마트로! 살자! 사람답게!”

노조는 환호성과 함께 파업을 종료했다.

서청수 회장은 택배사업부를 필래마트에게 넘겨주었다.

대찬이 노조위원장에게 은근히 건넨 청탁 덕분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필래마트에 넘겨줄 생각이었는지.

둘 중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택배사업부는 필래마트가 자회사로 두기에는 덩치가 만만치 않았다.

필래마트는 사명을 필래 비바체로 변경했다.

비바체(Vivace)는 ‘아주 빠르게’ 혹은 ‘생기 있게’를 의미하는 음악용어다.

사명을 새로 정하는데 필래물류, 필래로지스틱스 따위가 거론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필래 비바체로 결정되었다.

필래 비바체는 필래마트 사업부와 필래택배 사업부의 양대 축으로 재편되었다.

서청수 회장은 이참에 서원웅을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서원웅은 필래마트 사업부장에 도진석 상무를 전무로 승진시켜 임명했다.

이를 두고 혁신경영팀에서도 쑥덕공론이 오갔다.

“나는 옥 상무님이 승진할 줄 알았더니만.”

송희근 과장의 말에 허운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옥 상무님이 도 전무님만큼 대형할인점 업무에 익숙하진 않으시니까요.”

“그래도 라인이 있는데? 대표님도 도 전무 밑에 있어봐서 감정이 그리 좋은 게 아닐 텐데.”

그 말에 홍은주가 슬쩍 말을 얹었다.

“그게 경영자 마인드죠. 자기랑 친하다고, 술 좀 잘 따른다고 턱턱 감투 씌우는 건 소인배 마인드니까.”

“지금 나더러 소인배라는 거야?”

“아뇨. 전임 이동수 부사장님 얘기한 건데…….”

송희근 과장은 홍은주에게 눈총을 쏘며 어흠, 헛기침을 했다.

필래택배 사업부장에는 경쟁 택배업체의 상무 출신을 스카우트했다.

이사회에서 반란표를 냈던 장문진 필래유통 사외이사는 약속대로 필래지주 전문위원에 선임되었다.

물론 그의 딸인 장성채 역시 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의 사무실에 인턴으로 들어갔다.

결정적으로 서청규 사장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한 강대길 필래유통 부사장 역시 합당한 보상을 받았다.

강대길 부사장은 필래호텔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서원웅은 서청수 회장과의 식사자리에서 의문을 제기했다.

“회장님, 강대길 부사장이 우리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기는 했지만 어쨌든 오랫동안 함께했던 사람을 배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중용하느냐고?”

“예. 신뢰가 안 가지 않습니까?”

서청수 회장은 씩 웃었다.

“자고로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항복한 장수를 대우하지 않고 대업을 이룬 영웅은 없었다. 칭기즈칸이 제베를 크게 썼듯이.”

“…그렇군요.”

그렇게 모든 것이 순리대로 돌아갔다.

구 필래마트, 현 필래 비바체는 택배사업부를 꿀꺽 삼키고 필래그룹의 핵심 계열사 반열에 올랐다.

게다가 택배사업부가 지닌 물류인프라를 통해 훨씬 더 신속하고 효율적인 유통업무가 가능해졌으니, 필래 비바체의 발전은 이름처럼 빠르고 생기 넘칠 것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필래 비바체의 주가는 폭등했다.

비바체 주식 2,300주를 지닌 대찬의 기분도 덩달아 기꺼워졌다.

택배노동자들과의 약속도 준수되었다.

필래 비바체는 최대한의 효율을 위해 시설 자동화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거기서 얻어진 편익을 택배노동자들을 위해 상당부분 투입하기로 했다.

택배사업부가 손에 들어왔으니 입을 싹 닦아버리자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물류인프라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 있다는 구실로 서원웅은 그 의견을 묵살했다.

대찬은 주말에 시간을 내서 교외의 납골당을 찾았다.

홍우창의 유골이 안치된 곳이었다.

파업이 끝난 주말에는 동료들과 노조원들의 방문으로 북새통을 이뤘던 납골당이었다.

2주, 3주가 지나자 한산해졌다.

대찬이 방문한 시간에는 그를 찾은 이가 아무도 없었다.

원래 가장 낮고 값싼 자리에 안치되었던 그는, 필래 비바체 측의 배상이 이뤄짐에 따라 눈높이의 적당한 자리로 옮겨졌다.

가장 낮고 값싼 자리는 또 다른 이가 안치되어 있었다.

대찬은 우두커니 서서 홍우창의 유골함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의 자리에는 유골함과 그가 평생을 함께한 아내, 아내와 함께 낳고 기른 삼남매와 찍은 사진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사진 속의 홍우창은 활짝 웃고 있었다.

저 웃는 얼굴의 뒤에는 죽음을 몰고 온 고단한 노동의 삶이 감춰져 있었으리라.

대찬은 착잡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선생님의 죽음을 저는 이용했습니다.

사실 도의적인 슬픔은 느끼지만, 저는 선생님의 죽음이 억장이 무너질 정도로 슬프지 않습니다.

오늘 선생님을 찾아온 것도 제 마음을 가볍게 하려는 목적뿐입니다.

누가 선생님의 죽음에 가슴이 사무칠까요.

서청수 회장이 그럴까요.

노조위원장이 그럴까요.

서원웅이 그럴까요.

저들이, 그리고 제가 웃는 건 선생님의 억울함이 한 꺼풀 벗겨진 까닭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득을 취한 까닭입니다.

죄송합니다. 드릴 건 돈밖에 없군요.

편히 쉬십시오.

대찬은 유골함과 그의 사이를 가로막은 유리문을 손으로 문지르다가 돌아갔다.

유리문에는 대찬의 지문이 남았다.

“차장님, 택배사업부가 대표님께 올릴 현황보고 및 경영계획서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택배사업부 소속의 차장이 직접 찾아와 대찬에게 두툼한 보고서를 전달했다.

대찬과 같은 차장이었지만, 그는 택배사업부에서 20년이나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경력은 대찬이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혁신경영팀에 직접 찾아와 보고서를 건넸다.

‘이메일로 보내셔도 되는데.’

대찬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런 말은 건방지기 짝이 없다.

혁신경영팀은 필래 비바체의 중추였다.

모든 보고서와 기획서, 기안서는 혁신경영팀을 거쳐 경영지원부문장인 옥문영 상무에게 전달된다.

그러니 국회로 치자면 혁신경영팀은 법제사법위원회와 마찬가지다.

법제사법위원회, 줄여서 법사위는 각 상임위원회에서 올라오는 모든 법안을 검토하고 심사한다.

거기서 법안을 깔고 통과시키지 않으면 그대로 무산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마찬가지로 혁신경영팀에서 보고서를 반려하거나, 다시 만드는 수준의 수정을 요구하면 부서에서 공들인 수고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러니 대찬이 차장에 불과해도 다른 부서의 선임자들이 찾아와 굽실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삶의 이 나이였다면 어깨가 으쓱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으쓱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것보다도 부담이 더 컸다.

대찬은 최대한 친절하게 겸손하게 그 보고서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잘 검토해서 대표님께 올리겠습니다.”

“모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대찬은 택배사업부가 올린 경영계획서를 만질 엄두도 내지 않았다.

계획서를 작성한 직원들은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고, 대찬은 문외한이었다.

무식한 자의 망나니칼춤만큼 꼴사납고 두려운 건 없다.

대찬은 보고서를 훑기만 하고 그대로 상부에 전달할 요량이었다.

그러다 그의 눈에 들어온 대목이 있었다.

-타사 주식 보유 현황 및 향후 운용관리 계획

서청수 회장은 택배사업부를 인수하면서, 필래유통이 보유한 물류 및 운송업체의 주식 중 사업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추려 함께 사들였다.

보고서에는 그 주식들에 대한 세목이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가진 주식들이 꽤 되네.’

대충 내역을 훑던 대찬의 시선이 한 군데 머물렀다.

-장보고해운 22.8퍼센트.

‘장보고해운?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곰곰이 기억을 더듬던 대찬의 눈이 커졌다.

그의 시선이 급히 달력으로 향했다.

2014년 3월.

한 달 후면 2014년 4월.

국가적인 참사는 그 날짜마저 기억이 또렷했다.

대찬은 택배사업부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보고서를 건넸던 차장이 전화를 받았다.

“저 혁신팀 조 차장입니다.”

“아, 예! 조 차장님! 무슨 문제라도…….”

택배사업부의 차장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보고서에 문제는 없는데, 한 가지만 부탁드리려고요.”

“예.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장보고해운에 대한 지분을 우리가 꼭 가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해운 쪽에서 메리트가 있을 거 같아서 저희가 지분투자를 했습니다만, 사실 해상운송 쪽은 저희가 크게 관여하는 분야는 아니라서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장보고해운에 대한 지분을 전량 매각하는 걸 대표님께 권고해도 문제는 없습니까?”

“예,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대찬은 전화를 끊고 보고서의 그 부분을 수정하고 바로 대표에게 올렸다.

전자결재를 올리지 않고 대찬이 직접 대표실을 찾아갔다.

서원웅이 그를 맞았다.

“조 차장, 무슨 일로?”

“택배사업부에서 경영계획서 올려서 직접 가져다드리러 왔습니다.”

서원웅은 싱겁게 웃었다.

“굳이 이렇게 찾아올 것까지야.”

“여기 관련된 건의사항이 있어서요.”

“건의사항? 이런 유의 보고서 올릴 때는 항상 혁신경영팀장이 의견 작성할 수 있는 공란이 있잖아. 그걸 이용하지.”

“좀 급해요.”

대찬의 표정이 농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원웅도 살짝 얼굴을 굳혔다.

“말해봐.”

“장보고해운 보유지분을 전량 매각하고, 선박안전기술공단에 장보고해운에 대한 대대적인 안전검사를 의뢰해주세요.”

“그게 그렇게 급한 일이야?”

“네. 그래도 대표님 정도 되는 분이 의뢰해야 그쪽도 움직일 거 같거든요.”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렇게 처리할게.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

“그게, 조금 특이한 책임감 때문이에요.”

“특이한 책임감?”

“…말로는 설명을 못해요.”

“…그래.”

서원웅은 대찬의 부탁을 최우선적으로 처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