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17화
소식은 대찬에게도 즉각 알려졌다.
예상하던 바였기에 오두방정을 떨지는 않았다.
혁신경영팀 팀원들은 기뻐했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남았다.
한태윤 과장이 말했다.
“이사회를 통과하긴 했지만, 택배사업부를 우리가 인수해야 이 싸움은 끝이 납니다.”
“그러려면 필래유통 주총에서 매각을 승인해야 하죠?”
“예. 이사회는 회장님과 조 차장님의 개인기로 돌파했지만, 주총은 얘기가 다릅니다.”
“네, 얘기가 다르죠.”
대찬은 한태윤 과장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필래유통의 지분은 서청규 사장의 보유분이 압도적이었다.
그는 필래유통 지분의 16.8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의 아들인 서승진 필래유통 부장이 5.5퍼센트를 보유했다.
또 서청규 사장의 부인이 운영하는 재단이 4.2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도합 26퍼센트를 상회하는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은 필래유통 지분의 2.4퍼센트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외에 서청수 회장의 우호지분으로 분류할 만한 지분은 필래지주의 7.8퍼센트, 필래 컬처인더스트리의 1.0퍼센트, 필래제과의 1.6퍼센트 정도였다.
필래지주의 보유분이 많기는 해도 다 합쳐봤자 서청규 사장 개인의 보유분에도 미치지 못했다.
나머지는 기타 사모펀드와 소액주주들이었다.
하지만 필래그룹은 주총에서 승부를 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주총에서 서청규 사장을 꺾을 지분을 확보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려면 지분 확보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 정도 지분이 확보되면 서청규를 아예 필래유통에서 내쫓고 필래유통을 접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청수 회장에게 그럴 여유도 의지도 없었다.
그의 목표는 택배사업부뿐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출혈 없는 빠른 해결을 원했다.
그는 서청규 사장과의 일대일 협상을 원했다.
“얼굴 보고 당사자끼리 딱 해결하는 게 좋긴 한데…….”
서청수 회장은 사옥 바깥에 드문드문 진을 친 기자들을 바라봤다.
본인이 직접 움직이면 시끌벅적해질 것이다.
서원웅을 비롯한 주요 임원들도 몇몇 언론들이 마크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언론이 따르면 서청규 사장의 괜한 자존심을 건드릴 염려가 있었다.
서청규 사장이 원수 같은 형님에게 굴복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는 꼴이 된다.
역시 불필요한 감정소모를 최대한 줄이려면 비밀협상이어야만 했다.
‘써먹었던 밀사를 다시 써야겠군.’
서청수 회장은 대찬을 필래유통 사옥으로 보냈다.
대찬은 이런 중요한 협상을 겨우 차장급을 보내서 되겠느냐고 말했지만, 서청수 회장은 그를 고집했다.
“어차피 조 차장이 흥정할 일은 없어. 내가 택배사업부 인수에 지불할 금액은 정해져 있으니까. 그저 말만 옮기면 되는 거야.”
“회장님 뜻이 그러시다니 더 토 달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조 차장이 어디 그냥 차장이야? 왕차장님이시라면서?”
진짜 왕한테 왕차장 소리를 들으니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대찬은 헛기침을 하며 얼른 대화를 종결했다.
“다녀오겠습니다.”
대찬은 택시를 잡고 필래유통 사옥으로 갔다.
대찬은 필래유통 사옥 후문에 멈췄다.
정문에는 한껏 사기가 오른 노조원들이 북과 꽹과리를 치고 있었다.
노조위원장과 안면이 있었으니 괜한 인사치레는 하고 싶지 않았다.
대찬은 사옥으로 들어가는 후문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감회가 남달랐다.
필래유통 사옥은 대찬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건물이었다.
첫 번째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건물이었고, 두 번째 삶에서도 몇 년간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지금껏 대찬은 내내 필래유통의 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지금의 대찬은 서청규의 상투를 틀어쥐고 필래유통 사옥으로 들어갔다.
대찬은 바로 사장실로 에스코트되었다.
대찬을 사장실까지 에스코트하는 직원은 낯이 익었다.
대찬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사표 내라니까 안 냈네?”
“…….”
유백기였다.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대찬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유백기는 현재 대외협력팀 대리.
외부요인을 응대하는 일 역시 그의 몫이었다.
“…조… 님.”
“뭐라고?”
유백기는 이를 악물었다.
“조 차장님, 따라오시죠. 사장실로 모시겠습니다.”
“아, 예, 유 대리님.”
1층에서 승강기를 타고 사옥 꼭대기의 사장실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이 유백기에게는 한세월이었다.
대찬은 승강기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유백기에게 말을 걸었다.
“요즘 일은 할 만해요?”
“…조용히 가시죠.”
“대외협력팀 직원이 그러면 안 되는데. 상대가 조용히 있어도 어색하지 않게 말도 건네고, 재롱도 떠는 게 그쪽 업무 아닌가?”
“으윽…….”
승강기는 사장실이 있는 꼭대기층에 멈췄다.
대찬은 얼굴에 언뜻언뜻 비치던 웃음기를 거두었다.
“다신 보지 말자니까. 빨리 사표 써요. 안 그러면 진짜 나중에 후회해요.”
대찬은 유백기의 에스코트를 거절하고 사장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개새끼…….’
유백기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악물었다.
대찬은 사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청규를 향해 꾸벅 직각으로 허리를 꺾었다.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안녕 못해.”
서청규 사장은 불친절하게 인사를 받고 눈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대찬은 소파에 착석했다.
사태가 극한까지 치달았다.
필래유통 측도 빠른 해결을 원했다.
양자는 서로 비슷한 견적을 갖고 있었다.
서로 가격만 맞춰보고 사인하면 그만이었다.
대찬이 단독으로 협상에 임할 수 있는 것도 이미 견적이 다 뽑힌 덕택이었다.
대찬과 서청규 사장은 단둘이 마주앉았다.
서청규 사장은 다리를 꼰 채로 경멸 어린 시선을 대찬에게 뿌렸다.
“많이 컸군.”
“네. 저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사장님.”
“신입연수 때 싸가지 없게 고개 치켜든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대찬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건방졌습니다. 늦게나마 사과드립니다.”
“그러는 게 더 건방진 거야. 알아? 사과할 마음이 한 톨도 없는 주제에.”
“사장님, 저는 그저 회장님의 심부름꾼으로 왔을 뿐입니다.”
서청규 사장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표정으로 대찬을 노려봤다.
“택배사업부를 매각하라고.”
“네. 그게 서로 깔끔한 해결을 위해 합리적입니다.”
“나는 상처를 너무 깊게 입었는데, 그게 어떻게 깔끔한 해결이 되지? 내가 한 방 먹었으면 그쪽도 한 방 먹어야지?”
“1차전은 사장님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2차전을 기약하시죠.”
“정 떨어지는 말 하는 데는 선수군.”
“사장님과 감정싸움도, 기싸움도 할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이 자리 자체가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내가 만약 매각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건가?”
대찬은 딱딱하게 대꾸했다.
“이미 노조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매각하지 않으시면 택배사업부는 파탄지경에 이를 겁니다.”
“파탄지경에 이르든 어떻든 내 회사야.”
“그렇게 되면 소액주주들도 매각에 나서지 않는 사장님을 원망하겠죠. 그 전에 대주주인 사모펀드들도 가만히 안 있을 거고요. 그럼 사장님의 경영권마저 위협받으실 텐데요.”
“노조가 그렇게 끈질기리라 보나? 하루살이들이야. 며칠 지나면 시들해질걸.”
“그런 판단 때문에 사태가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건방진……!”
대찬은 손을 공손하게 모으며 말했다.
“사장님께 경영자로서의 합리적인 마인드가 남아있으리라 믿습니다. 저희가 값을 후려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제 값을 치를 겁니다.”
“택배 사업은 알짜야. 절대 손해 볼 수가 없는 사업부지. 그걸 인수하려면 필래마트 기둥뿌리는 뽑아야 수지가 맞지.”
“알짜니까 회장님도, 저희 회사도 이런 수고를 들여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서청규 사장은 대찬의 시선을 외면하며 물었다.
“얼마를 제시할 건가?”
“회장님께선 7천2백억을 제시하셨습니다.”
“…….”
“나쁘지 않은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네 까짓 게 뭘 안다고 나쁘지 않다고 운운해? 네가 경영을 알아?”
“인신공격은 그쯤 하시고 대답을 주시죠.”
서청규 사장은 석문주 전무를 불러들였다.
“석문주, 저쪽에서 7천2백억 불렀어.”
“안 됩니다. 8천억 밑으로는 넘길 수 없습니다.”
대찬은 천억이 왔다 갔다 하는 교섭에 머리가 띵했다.
대찬은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단호하게 말했다.
“7천2백억이 회장님께서 제시한 마지노선입니다. 다만, 필요하다면 이 건에 대해서 대외적으로 사장님을 비난하는 일체의 움직임을 중단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겨우 그 정도가 8백억 어치가 될 거 같나?”
“제가 알기로는 아직 유춘기 차관과의 장학금 부정수급 건을 회장님께서 쥐고 계신 걸로 압니다만.”
대찬이 서청규 사장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자 그가 와락 화를 냈다.
“몇 년 전 얘기를 아직도 들먹이고 있어!”
“사장님의 이미지가 최악으로 치달은 이때, 이 건까지 터지면 골치가 많이 아프실 텐데요.”
이에 석문주 전무가 말했다.
“조 차장이라고 했나? 우리도 7천5백억은 받아야 돼. 그렇지 않으면 경영능력이 도마 위에 오른다고.”
“으음…….”
“그 밑이면 우리도 다른 입찰자를 찾는 수밖에 없어.”
대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강성노조 리스크가 터진 급매물을 제값 주고 살 회사가 얼마나 있을까 싶습니다만.”
“그렇게 배를 튕겨도 7천5백억 밑으로는 안 돼.”
“…그러시다면 회장님께 여쭙고 오겠습니다. 저한테 결정권은 없으니까요.”
대찬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서청수 회장과의 직통라인이 열려 있었다.
“회장님, 저쪽에서 7천5백억은 받아야겠다고 합니다.”
“뭐? 그럼 당장 사인하지, 뭐 하는 거야? 내가 7천6백억 부르라고 했잖아? 그게 우리 자문사 결론이었다니까.”
“그래도 에누리의 여지가 있는 거 같아서 처음에 7천2백억 불렀습니다.”
그 말에 서청수 회장이 실소를 터트렸다.
“지금 시장에서 콩나물 사는 줄 알아? 참 나, 이걸 배짱이라고 해야 하나, 만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럼 7천5백억에 우선 합의해두겠습니다.”
“남은 백억으로 까까 사먹으라고 할 수도 없고. 허허, 잘했어.”
대찬은 서청규 사장과 7천5백억에 분리된 택배사업부를 인수하기로 잠정합의했다.
이 잠정합의안은 실제 계약으로 이어졌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택배사업부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필래지주 산하의 자회사로 둘 것인가.
아니면 자회사든 사업부든 필래마트의 산하로 둘 것인가.
만일 필래지주의 산하로 들어간다면, 서청규 사장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필래마트로서는 실익을 얻었다고 보기 힘들어진다.
보람이 있으려면 택배사업부가 필래마트의 산하로 들어와야 한다.
하지만 서청수 회장이 그렇게 결단하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서승학의 뒷배였던 서청규 사장을 한껏 찌그러뜨렸다.
서승학과 서원웅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고 택배사업부를 일부러 필래마트에게 넘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찬은 택배사업부의 매각 막바지에 이르러 마지막 기세를 태우는 노조위원장과 만났다.
“축하드립니다, 위원장님. 저도 자축할 일이고요.”
“아,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 차장님.”
“위원장님이 더 고생 많으셨죠.”
둘은 첫 만남보다 훨씬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눴다.
“어디 가서 호프라도 한잔하면 좋겠는데.”
“아, 아직 파업 철회 안 하신 거 아니었어요?”
“투쟁은 끝났죠. 지금 남아서 꽥꽥거리는 사람은 축제를 즐기는 거예요.”
대찬은 싱긋 웃었다.
“축제에서까지 위원장님의 영도하에 일사불란할 필요는 없겠죠.”
“위원장님 영도라고 하니까 내가 다른 위원장 같잖아요? 지금 빨갱이라고 돌려 까는 겁니까?”
“아이고, 그럴 리가요. 제가 아무리 신자유주의에 목줄이 채워진 신세라지만.”
“시시콜콜한 얘기는 목이라도 축이면서 하죠. 요 앞에 닭 잘 튀기는 집 있어요.”
“예, 가시죠.”
대찬과 노조위원장은 각자 맥주 1,000cc를 먹을 때까지 그야말로 시시콜콜한 잡담만 나눴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노조위원장의 눈빛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런데 우리 조 차장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 땀내 나는 아저씨를 보러 왔을까요?”
“꼭 무슨 바람이 불어야 뵙겠어요. 우리는 같은 목표를 두고 투쟁하던 동지 아닙니까? 동지.”
“서로를 이용만 하면 그만이라고 한 건 그쪽 아니에요?”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