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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16화 (215/556)

난 할 수 있어 216화

대찬은 차분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서청규 사장이 두려우신가요? 그럼 서청수 회장님은 두렵지 않으십니까?”

“…….”

“서청수 회장과 서청규 사장의 차이는 단지 몇 살의 터울뿐만이 아닙니다. 회장과 사장의 무게는 많이 다릅니다. 저보다 이사님이 오히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아…….”

장문진의 한숨에는 고뇌가 그대로 묻어 나왔다.

“이사회에서 택배사업부 분리에 찬성표를 던지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서청규 사장을 배신한 대가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르셔야만 할 겁니다.”

“지금 협박하는 거요?”

“네, 협박입니다.”

대찬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양복 단추를 채웠다.

그는 장문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최대한 주목받지 않는 선택을 하겠다고 말씀하셨죠? 찬성표를 던지셔야 최대한 주목받지 않습니다.”

“…….”

“여론의 요구를 거스른 선택이 주목받지 않으리란 건, 산전수전 다 겪으신 이사님치고는 너무 나이브한 판단 아닙니까.”

대찬은 장문진에게 꾸벅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기러기 아빠의 꿉꿉한 냄새가 가득했던 현관을 나서니 상쾌한 공기가 대찬의 콧속으로 들어왔다.

대찬이 떠나고 장문진은 대낮에 혼자서 소주 2병을 마셨다.

안주는 말라비틀어진 멸치 몇 마리.

그렇게 소주를 다 비워갈 때쯤, 서청수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장 이사, 결정을 내렸나?”

“회장님.”

“우리 조 차장이 장 이사한테 결례를 저질렀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말이야, 조 차장 말 중에 틀린 거 하나 없어.”

“…….”

“내가 좀 뒤끝이 지독해서. 모쪼록 잘 부탁하네.”

서청수 회장은 친절한 목소리로 당부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필래그룹과 별도로 마련된 필래유통의 사옥은 택배노조의 지치지 않는 파업으로 북새통이었다.

“단결만이 살 길이요. 노동자가 살 길이요.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노조가 틀어놓은 민중가요 앰프 소리에 업무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필래유통 측은 업무방해죄로 노조를 고소해놓은 상태였다.

앰프 소리는 사옥 꼭대기의 사장실에도 희미하게 들려왔다.

서청규 사장의 노이로제가 극에 달했다.

“이 미친놈들은 언제까지 발광을 할 속셈이야!”

“이쯤 되면 지칠 만도 한데, 어째 기세가 더 오르는 양상입니다.”

사내이사 중 1명이자 서청규의 최측근인 석문주 전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런다고 어디 내가 눈 하나 깜짝할 거 같아? 저 망할 놈의 시위꾼들.”

“CS가 언론인터뷰까지 자청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오는 게 어째 불안합니다. 모험을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 양반도 이제 환갑이 넘었어. 감 떨어질 때가 됐지. 어차피 이사회든 주총이든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해.”

석문주 전무가 그 말에는 맞장구를 쳤다.

“하긴 애초에 이사회 소집권한도 우리 쪽에 있고요.”

“그래. 울타리 밖에서 숙덕공론을 하든, 오줌을 갈기든 우리 알 바가 아니란 말이야.”

“그렇기야 합니다만…….”

“약해질 거 없어. 잘 버티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야. 이것만 잘 넘기면 제대로 갚아줄 거라고. 석문주, 알았어?”

“알겠습니다.”

서청규 사장은 동석한 강대길 부사장을 바라봤다.

그는 사내이사 중에서도 표면상 서청규와 동격인 대표이사였다.

“강대길이, 너도 잘 버텨내란 말이야.”

“…….”

“어이, 강대길!”

“예? 아, 예! 사장님.”

“쯧, 너도 늙었냐? 가는귀가 먹어서는.”

강대길 부사장은 머쓱하게 웃었다.

“하하… 저도 회사 그만 다닐 때가 됐나 봅니다.”

“하긴, 강대길이도 제2의 인생 슬슬 개척해야지.”

서청규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은 건 서청규 사장뿐이었다.

금요일 퇴근시간이 다가와, 서청규 사장은 찌뿌듯한 몸을 쭉 펴면서 측근들에게 말했다.

“내일 오랜만에 필드나 한 바퀴 돌까?”

“아, 좋죠. 요즘 노조 것들 때문에 스트레스 잔뜩 받았는데, 몸 좀 풀어야겠습니다.”

“좋아. 강대길이, 너도 갈 거지?”

“아, 죄송합니다, 사장님. 내일은 딸하고 사위가 꼭 식사대접 한다고 신신당부를 해서요.”

“이야, 우리는 집에서 찬밥 취급인데, 강대길이 팔자가 제일 늘어졌다.”

“하하.”

강대길 부사장은 어색하게 웃었다.

서청규 사장은 강대길 부사장을 제외한 측근들과 주말에 골프를 치러 떠났다.

그때 강대길 부사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사장님, 대길입니다.”

“어, 사위한테 맛있는 거 얻어먹고 있어?”

“하하, 네.”

“그럼 밥이나 맛있게 먹을 일이지, 전화는 왜 했어?”

“CS 쪽 김민수 전무가 이사회 개최를 저한테 요구하더군요.”

그 말에 서청규가 얼굴을 찡그렸다.

“뭐야? 그 새끼는 갑자기 왜 이사회를 열자고 난리야?”

“그러게 말입니다. 암만 표 계산을 해봐도 그쪽에 유리할 리가 없는데.”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니야?”

“글쎄요. 지금 골프 같이 치는 석 전무가 뒤통수라도 후리는 거 아닙니까? 하하.”

그 말에 서청규가 석문주 전무를 쏘아보며 말했다.

“야, 석! 너 CS한테 돈 먹은 거 있냐?”

“돈이요? 내가 왜 그런 구린 돈을 받아요. 안 받았어요.”

“근데 갑자기 왜 이사회를 열자고 난리지?”

그 말에 석문주 전무는 골프채를 지팡이처럼 의지하며 말했다.

“슬슬 CS도 발 빼려는 모양인데요.”

“발을 빼다니?”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답이 안 나오니까. 이사회 열어서 사업부 분리 요구했다는 표시만 내고 슬쩍 발 빼려는 거죠, 뭐.”

“그럴 수도 있겠군.”

“우리한테 나쁠 건 없습니다. 이사회에서 이걸 부결시켜서 노조 쪽 김을 쫙 빼버리면 저쪽도 흐지부지될 겁니다.”

서청규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휴대폰을 귀에 가까이 갖다 대고 강대길 부사장에게 말했다.

“좋아. 이사회 받아준다고 해. 긴급이사회라고 해야 일주일 안에 개회가 가능하니까 긴급으로 해.”

“알겠습니다, 사장님.”

강대길 부사장은 전화를 끊었다.

그는 서청수 회장의 사람인 김민수 전무와 함께 있었다.

강대길 부사장은 김민수 전무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민수 전무는 미소를 머금었다.

필래유통 이사회는 긴급이사회로 소집되어 빠른 시일 안에 열렸다.

이 자리에 참여한 사내·외이사는 총원 7명 중 6명이었다.

결원은 장문진 사외이사였다.

그는 강대길 부사장에게 결정권을 위임하겠다고 전해왔다.

‘배짱 한번 형편없네.’

서청규 사장은 조소를 머금었다.

안건은 단 하나.

김민수 전무가 제기한 택배사업부 분리의 건이었다.

의장을 맡은 서청규 사장은 건성으로 이사회에 임했다.

“성원이 확인되었으므로 2014년도 긴급이사회의 개회를 선언합니다.”

땅, 땅, 땅.

서청규 사장은 의사봉을 두드렸다.

의사록을 작성하는 필래유통 직원은 하필이면 주말에 소집된 이사회에 잔뜩 부은 얼굴로 자판을 두드렸다.

서청규 사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의결할 안건은 하나입니다. 김민수 이사가 제안한 택배사업부 분리의 건.”

서청규 사장은 자신을 제외한 5명의 이사를 죽 둘러보며 말했다.

“얼른 끝냅시다. 거수로 결정합시다. 택배사업부 분리에 찬성하는 이사님들은 거수해주십시오.”

그 말에 전몽우 사외이사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저 머저리 같은 놈.’

서청규 사장은 코를 찡긋했다.

그다음으로 서청수 회장의 복심인 김민수 전무도 손을 들었다.

당연한 수순이라 서청규 사장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럼 가 2표, 부 5표로 이번 안건은 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서청규 사장이 그렇게 졸속으로 이사회를 끝내려는데, 강대길 부사장이 손을 들었다.

“택배사업부 분리에 찬성합니다.”

“야! 강대길!”

의사록을 작성하던 직원의 손이 멈칫했다.

강대길 부사장은 덤덤하게 뒷말도 이었다.

“또한 장문진 사외이사로부터 위임받은 표결권 역시 택배사업부 분리 찬성에 행사하겠습니다.”

“야, 야, 너 뭐야!”

서청규 사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강대길 부사장은 무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사회 자리에서 격식 없는 말씀은 삼가주십시오. 이걸로 가 4표, 부 3표가 되었습니다. 의장님, 선언하시죠.”

“강대길.”

“선언하십시오.”

“강대길!”

“의장님께서 표결을 선언하지 않으시니, 대표이사의 권한으로 대신 선언하겠습니다. 택배사업부 분리의 건은 가 4표, 부 3표로 가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더 논의하실 사항이 없으면 폐회를 선언합니다.”

강대길 부사장은 그렇게 선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청규 사장은 성큼성큼 다가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야! 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거 놓으십시오.”

강대길 부사장은 거칠게 서청규 사장의 손길을 뿌리쳤다.

“야, 뭐가 불만이야? 엉? 뭐가 불만인데 이따위로 굴어?”

“저보고 제2의 인생 개척하라면서요. 그래서 개척했습니다.”

서청규 사장은 육두문자를 남발하려고 했지만, 일단 꾹 참고 최대한 좋은 말로 타일렀다.

물론 그의 기준에서나 좋은 말이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결코 좋은 말은 아니었다.

“강대길, 너 이러면 진짜 국물도 없다. 화 안 낼 테니까 원래대로 돌려놔.”

“사장님.”

“어!”

“사장님 밑에서 참 오래, 많이 굴렀습니다.”

“그래, 그 덕에 부사장까지 해먹고 있잖아. 뭐가 불만이냐?”

서청규 사장의 목소리가 점점 더 고조되었다.

그의 말에 강대길 부사장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 덕에 부사장까지 해먹어요? 제가 사장님 위해서 구른 거에 비하면 헐값 아닌가요?”

“알았으니까 일단 이사회 결정 좀…….”

“이것 보십시오. 이 지경이 됐는데도 이사회 운운만 하잖습니까. 저는 이래서 사장님이 싫어요.”

“대길아, 네가 내 애인이냐? 너 왜 그래?”

“나는 당신한테 지불한 희생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했고, 서청수는 나한테 간단한 배신에 많은 대가를 약속했어요. 그뿐입니다.”

강대길 부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몸을 휙 돌렸다.

“부, 부사장님.”

석문주 전무가 그를 붙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강대길 부사장은 그의 가슴을 거칠게 밀쳤다.

서청규 사장은 넥타이를 확 풀어헤치며 황당한 시선으로 강대길 부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거 왜 저래!”

“아무래도 CS가 약을 친 것 같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강대길이가 내 밑에서 구른 게 20년이야, 20년!”

“네… 사실 그 정도면 오래 참았죠.”

“뭐야?”

서청규 사장은 석문주 전무에게 눈을 부라렸다.

“아, 아닙니다…….”

석문주 전무는 속으로 쓴 침을 삼켰다.

‘젠장. 오퍼를 넣을 거면 나한테 넣지. 나도 뒤통수 세게 때릴 자신 있는데.’

이것으로 필래유통 택배사업부는 별도의 회사로 독립되었다.

서청수 회장 측 사내이사인 김민수 전무는 강대길 부사장에게 악수를 건넸다.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저한테 감사할 것도 없어요. 그냥 피차 거래가 잘됐을 뿐입니다.”

“그래도 오래 모신 분을 저버리기 쉽지만은 않으셨을 텐데.”

김민수 전무의 말에 강대길 부사장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릇은 회장님이 더 크신 듯하군요.”

“예? 무슨 말씀…….”

“오래 모셨다는 사실이 충성심으로 직결되니까요. 서청규는 안 그렇습니다. 오래 모실수록 신세가 개 같다는 것만 깨닫게 되죠. 그래도 떨어지는 뼈다귀가 있으니 여태 참아왔지만.”

“이제는 그러실 필요가 없죠.”

“대우는 확실히 해주셔야 할 겁니다. 약속을 어기면 자폭할 겁니다. 그쪽에도 피가 튈 거예요.”

김민수 전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회장님 성품을 잘 아시잖습니까. 그러니 이렇게 결단하신 거고.”

강대길 부사장은 김민수 전무를 물끄러미 보다가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김민수 전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서청수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회장님, 뜻대로 되었습니다.”

택배사업부의 분리.

이 사실은 즉각 대내외에 공표되었다.

사옥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노조원들은 이 소식에 환호했다.

“살았다! 살았다! 살았다! 살았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방방 뛰었다.

홍우창의 영정사진을 꼭 껴안고 있던 그의 아내는 눈물을 훔쳤다.

“여보, 그래도 당신 죽음이 아주 헛되진 않았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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