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14화
“노조 쪽 동향은 어때?”
“일단 많이 갈등하는 모양이에요. 서청규 쪽 언론플레이에 잔뜩 뿔은 났는데,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겠다, 어쩐다 으르렁대는 상황이라 결심이 쉽지 않겠죠.”
“그렇겠지. 정식노조로 인정받은 것도 아니니까.”
한태윤 과장이 말했다.
“주저하는 노조를 우리가 뛰어내리라고 등 떠밀 수는 없습니다.”
“그렇죠. 그분들은 생계가 걸린 일이니 오히려 부추기면 더 주저할 겁니다.”
“우리 팀 단위로 할 수 있는 일은 더 없습니다. 관망하시죠.”
“예. 한 과장님 말씀이 맞네요.”
그때 오다혜가 사내 게시판을 보고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그녀의 시선을 의식하고 물었다.
“왜, 오 대리? 무슨 건수 있어요?”
“네. 사내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요.”
“무슨 글?”
“그게, 회장님이 직접 올리셨어요.”
“CS가?”
필래그룹 내부에서는 오너인 서청수 회장을 CS라는 이니셜로 곧잘 불렀다.
명실공히 그룹의 2인자인 서청규 사장은 CG였다.
대찬의 물음에 오다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찬은 더 말하지 않고 사내게시판에 접속했다.
제목은 ‘안타까운 필래 가족의 죽음에 대하여’였다.
척 봐도 필래유통의 택배기사였던 홍우창을 일컫는 것이다.
서청수 회장의 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이것이었다.
‘부끄럽습니다. 다 같은 필래가족이라고 하면서, 왜 과로사하는 노동자는 있어도 과로사하는 회장은 없는가.’
‘왜 노동자는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도 회장의 한 달 품삯을 못 가져가는가. 자기의 목숨을 바치고도 왜 그의 가족들은 여전히 가난에 신음하는가.’
‘회장은 필래가족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데, 왜 노동자 그 누구도 필래가족이라 말하지 않는가.’
‘제도와 실력으로 나는 여러분께 불공정거래를 강요해온 건 아닌지 생각합니다.’
‘제도와 실력의 울타리를 넘은 사랑이라야 우리가 가족일 수 있습니다.’
그걸 읽고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장님이 서청규 사장을 저격하고 나섰어.”
“CS가 이런 감성적인 글도 쓸 줄 아셨네요.”
허운의 말에 한태윤 과장이 반응했다.
“CS도 감성적으로 만들 만큼 이번 사태가 큰 기회라는 거겠죠.”
“회장님의 감수성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조 단위를 주무르는 사람 중에 감수성이 충만한 사람은 없어요.”
대찬은 한태윤 과장의 말에 공감했다.
“서청수 회장님까지 이렇게 발 벗고 나섰다면, 단순히 서청규 사장에게 생채기를 내는 선에서 그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선에서 안 그치면 어디까지 간다는 거예요?”
허운의 말에 대찬이 대답했다.
“택배사업부를 우리 쪽으로 뺏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에? 그러려면 일단 필래유통 이사회에서 택배사업부 분리를 승인해야 하는데, 그럴 리가 있을까요?”
“그림만 잘 그려지면 회장님의 힘으로 이사회를 공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
“생각보다 판돈이 많이 불어나는데.”
대찬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서청수 회장의 게시글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단순한 글 하나지만, 회장이 직접 나섰다는 건 전면전을 의미했다.
필래유통 측도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긴장했다.
유력가문의 집안싸움을 좋아하는 기자들은 열심히 말과 글을 옮겼다.
서청수 회장의 글 하나로 택배노조는 자신감을 얻었다.
법적 제재를 운운하던 서청규 사장의 압박이, 서청수 회장의 개입으로 상쇄되었다.
그들은 총파업을 결의했다.
때마침 설 연휴를 앞두고 있던 터, 타격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즈음 대찬이 총파업에 돌입한 택배노조 본부를 방문했다.
투쟁본부는 그 자체로 전장인 듯 비장한 분위기였다.
붉은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대찬은 외투의 단추를 잠그고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서청수 회장의 밀사였다.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노조위원장의 모습은 결연했다.
이번에 단단히 각오를 한 모양이었다.
대찬은 그에게 가벼운 인사를 전했다.
“아직 날도 안 풀렸는데 추위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날이 풀리면 뭐 하겠습니까. 우리 형편이 풀려야죠. 안 그러면 춘래불사춘입니다.”
“예, 그러겠죠. 저도 힘써 응원하겠습니다.”
“그런데 필래마트 직원이신데 여기까지 다 오셨습니다. 작고하신 홍우창 동지 장례식장에도 오셨단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아, 네. 필래마트도 이 사태의 당사자라서요.”
“…당사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청수 회장님께서는 필래유통 택배사업부를 필래마트 산하로 편입시킬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럼 서 회장이 자기 집안싸움을 하려고 그런 글을 써서 파업을 부추긴 겁니까?”
노조위원장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었다.
대찬은 덤덤히 대답했다.
“네. 저희 목표는 그겁니다.”
“이보쇼, 우리는 지금 밥줄 때문에 이 지랄 떨고 있어요. 그런데 그쪽은 우릴 이용해서 집안싸움을 하겠다고?”
“저도 여기에 제 밥줄이 걸려 있습니다.”
“이 밥줄이랑 그 밥줄이랑 같습니까?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말이 안 될 건 뭡니까. 서로의 이익을 위해 단결투쟁하는 건 피차 똑같습니다.”
“이봐.”
“물론 더 절실한 건 노동자 여러분이죠. 하지만 저희도 마냥 신세 편한 사람들만은 아닙니다.”
“지금 누구 신세가 더 나은지 따지러 왔습니까?”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만, 우린 같은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는 걸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같은 목표? 우리 목표는 소속이 필래유통에서 마트로 바뀌는 게 아니에요. 어느 지붕 밑에 있든 나은 처우를 받고 싶다는 거지.”
“네. 유통에서 마트로 소속이 바뀌면 확실한 처우개선을 약속드립니다.”
노조위원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댁 같은 사람들한테 한두 번 속은 줄 알아요? 양복 입은 놈들은 다 똑같아.”
“달라요.”
대찬은 짧게 대꾸하며 탁자 위에 종이 1장을 올려놓았다.
노조위원장은 그걸 흘끔 보았다.
“…이게 뭡니까?”
“회장님의 각서예요.”
“각서?”
“노조 여러분들의 요구를 100퍼센트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회장님께서 수용 가능한 부분을 최대한 보장한 각서입니다. 물론 택배사업부가 필래마트 산하로 들어갈 때의 경우지만요.”
“…….”
노조위원장은 서청수 회장의 각서를 찬찬히 살폈다.
분명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파업에 돌입해 노조는 여러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두 관철시키리란 생각은 없었다.
협상이란 100을 들이밀고 50으로 흥정하는 게임이니까.
서청수 회장이 약속한 부분은 100 중 70은 되었다.
노조원들이 모두 납득할 만했다.
노조위원장이 얌전해지자 대찬이 말했다.
“이 각서에는 별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그저 지금처럼 투쟁해주시면 됩니다. 위원장님과 노조원, 그리고 노조원이 아닌 택배기사님들의 이익을 위해서요.”
“…….”
“저희가 무슨 꿍꿍이이건 무슨 상관입니까. 저희를 마음껏 이용하십시오. 저희도 여러분의 곤궁한 처지를 이용하고 있으니까요.”
“서로를 이용하라고.”
“네. 마음뿐인 동정보다 훨씬 유용하리라 생각합니다.”
위원장은 서청수 회장의 각서를 고이 접어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일단 접수하겠다는 의사표시였다.
“그저 주먹 쥐고 계속 투쟁만 하면 된다, 이겁니까?”
“구호 하나를 더 추가해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무슨…….”
“사람 잡는 무능경영, 필래유통 자폭하라. 사람대접 유능경영, 신생회사 설립하라.”
노조위원장은 길게 침묵했다.
그러다 대찬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대찬도 가만히 노조위원장의 시선을 받았다.
“…좋아. 그렇게 하죠.”
“각서내용은 위원장님과 소수의 지도부만 공유해주십시오. 미리 공개해서 좋을 건 없으니까요.”
“이런 쪽엔 내가 그쪽보다 도사입니다. 똥오줌은 가린다고요.”
“유능한 노조위원장께서 이끄시니 반드시 결과가 좋을 겁니다.”
“그쪽에서도 최대한 지원해주셔야 합니다.”
“아무렴요. 이미 회장님까지 나섰으니 저희도 중도에 파투내기엔 글렀습니다.”
대찬은 위원장에게 깍듯이 인사를 했다.
위원장은 대찬에게 악수를 청했다.
대찬은 그의 굳은살 박인 거친 손을 꼭 붙들었다.
단결, 투쟁!
서청수 회장의 밀약을 얻은 노조 지도부는 자신의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필래유통의 택배사업부는 업무가 완전히 마비되었다.
노조가 고강도의 파업을 예고하자, 필래유통의 주가도 하락세로 접어들었다.
그러는 차에 서청수 회장은 불난 집에 자꾸 기름을 한 방울씩 깔짝깔짝 부어댔다.
언론노출을 극히 꺼리던 서청수 회장은 뉴스종합채널인 ONB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어로는 최재한을 콕 집었다.
와중에 자기 사람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물론 대찬과 가까우니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인터뷰를 끌고 갈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생방송으로 이런 거물과 단독 인터뷰를 하는 건 방송사 밥 좀 먹은 최재한으로서도 처음이었다.
“사내게시판에 직접 올리신 글부터 얘기 안 할 수 없는데요.”
“아, 네. 현실적으로 노조 구성원의 요구를 회사의 수장으로서 모두 받아들이기란 매우 곤란한 게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그러시겠죠.”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죠. 회사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노동력을 투입하는 분들을 위해 최소한의 예의는 다해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필래유통은 그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청수 회장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서청규 사장은 사적으로는 저의 아우이고, 공적으로는 우리 회사의 주요구성원입니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미진한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미진한 부분이라면 어떤 게 있습니까?”
“사람이 죽었습니다. 사람을 죽일 정도로 부려먹으면 안 되죠. 그건 서청규 사장이 아무리 저와 가까워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가까우니 지적하는 겁니다.”
“필래유통 측은 도의적인 책임은 느끼지만, 사측의 잘못은 없다고 공식입장을 발표했는데요.”
서청수 회장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인간적인 제스처였다.
“그건 명백한 언어도단입니다. 참 안타깝죠. 사람이 죽을 정도로 쥐어짜야 이익을 볼 수 있다면, 그건 누구의 잘못입니까? 저는 경영진의 무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필래유통의 경영진은 서청규 사장이지만, 필래그룹의 수장은 다름 아닌 회장님이십니다. 그 무능이란 건…….”
“네. 저도 책임을 통감합니다. 하지만 최 기자님도 아시죠? 필래그룹의 특수한 지배구조를.”
“아, 네. 선친이신 서광구 회장님께서 그룹은 회장님께 물려주셨지만, 필래유통의 경영권은 서청규 사장께 일임하셨죠.”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서 개입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택배기사님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싶습니다만.”
“마침 노조 측에서는 필래유통에 택배사업부를 분리하여 별도의 신생회사로 출범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네. 만일 그렇게 되면 저는 사재를 출연해서라도 지분을 확보해 택배사업부를 인수하겠습니다.”
서청수 회장은 노조를 지원사격하겠다는 의지를 만천하에 표명했다.
이걸로 이른바 ‘형제의 난’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아예 서청규 사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아니었으니, 형제의 난이 너무 거창하다면 형제의 국지도발 정도 되었다.
통상 재벌가의 분쟁은 진흙탕 싸움으로 치닫기 마련이었다.
대중은 그들의 꼴사나운 육탄전을 보며 팝콘이나 먹지, 누구 한쪽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있는 놈들의 아귀다툼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양상이 달랐다.
재벌이 노조를 지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말로도 모자라다.
전무하다.
그런데 서청수 회장은 노조를 지지하고 나섰다.
명분이 확실했다.
서청규 사장의 이미지는 이미 누차의 사건으로 넝마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분쟁은 명분만으로 결정되는 싸움은 아니었다.
대찬은 팔짱을 끼고 사옥 바깥을 내다봤다.
‘결국은 이사회에서 결판을 내야 해.’
택배사업부를 별도의 회사로 분리하려면 필래유통 이사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필래유통은 서청규 사장이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회사였다.
통상의 경우라면 노조의 요구가, 서청수 회장의 요구가 관철될 가능성은 제로였다.
필래마트 혁신경영팀 사무실의 한가운데에는 화이트보드가 서있었다.
거기에는 잡다한 문서들이 붙어 있었는데, 개중 필래유통 이사회의 명단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