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13화
“안 좋은 소식이네.”
송희근 과장이 김산호에게 물었다.
“근데 택배기사는 특수고용노동자들 아니야? 본인이 일감을 알아서 조절할 수 있을 텐데.”
“노조 측에서는 필래유통 택배사업부 쪽에서 과도한 물량을 강요하고, 하차시간을 앞당기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하던데요.”
“노조도 있어?”
“법외노조라 회사 쪽에서는 당연히 교섭상대로 인정은 안 하지만, 일단 조직은 갖춰져 있어요.”
대찬은 착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유통 쪽에서는 어떻게 조치하겠대?”
“아직 공식입장은 안 나왔는데, 관계자가 한 언론하고 통화한 내용은 보도됐어요.”
“그 대단하신 관계자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
“예상하시는 대로예요. 본인이 노동량을 조절하지 못해 생긴 비극이다. 안타깝지만 사측의 책임은 없다.”
“아주 지극히 서청규 사장님다우신 말씀이네.”
“노조 측에서 반발할 건 당연한 수순이겠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 말에 허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타깝게 돌아가신 마당에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그렇지만, 우리로서도 움직일 여지가 생긴 거 같은데요.”
“서청규 사장의 스타일대로라면 적반하장으로 나올 거야. 고소하고 난리도 아니겠지.”
대찬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노조 측은 즉각 규탄성명을 발표하고 처우를 개선하라며 요구하고 나섰다.
파업도 불사하겠다는 모양새였다.
“앞으로 우리는 유통 택배사업부 쪽 이슈를 최우선으로 합니다. 홍 주임, 오 대리.”
대찬이 홍은주와 오다혜를 부르자 둘이 대답했다.
“네.”
“저쪽에서 넘어오는 정보 바로바로 업데이트해줘요. 그리고 송희근 과장님.”
“네.”
“과장님, 유통 쪽에 빨대 좀 있죠?”
“빨대라고 하기는 좀 뭐하고, 친분 있는 사람들이 있죠.”
대찬은 법인카드를 송희근 과장에게 찔러주었다.
“이걸로 한우든 다금바리든 사먹이면서 유통 쪽 대응전략 좀 알아봐주세요.”
“아이고, 그건 또 제가 전문이죠.”
“한 과장님, 허 과장, 김 대리는 계속 기존 업무 봐주시고요. 다 같이 하던 걸 세 분이 하시기에 조금 무리가 있지만, 최대한 노력해주십시오.”
한태윤 과장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허 과장, 김 대리랑 잘 해보겠습니다.”
“일단 뭐가 됐든 필래 노동자가 돌아가셨으니 인간적인 예의는 표해야겠죠. 송 과장님은 저랑 같이 문상 가시죠.”
“아, 예. 바로 채비하겠습니다.”
대찬은 애용하던 붉은색 넥타이를 풀고 검은색 넥타이로 바꿔 착용했다.
그리고 벗어두었던 양복 재킷을 걸치고 송희근 과장과 함께 필래그룹 사옥을 나섰다.
그런데 밖으로 나가다가 누군가와 딱 마주쳤다.
대찬은 그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대표님.”
“아, 조 차장.”
서원웅이었다.
대찬은 그 역시 검은 넥타이를 착용한 걸 확인했다.
“혹시 문상 가십니까?”
“조 차장도 검은 넥타이 찬 걸 보니 같이 가면 되겠네요.”
“그러시죠.”
대찬은 옅은 웃음을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액션이 좋아졌는데.’
대찬은 송희근 과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송 과장님까지 굳이 안 가셔도 될 거 같습니다.”
“아, 예…….”
송희근 과장은 입맛을 쩝 다시고 물러났다.
대찬과 서원웅은 함께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는 택배기사의 빈소가 마련됐다는 신촌의 병원으로 향했다.
대찬은 차 안에서 넥타이를 살짝 끄르며 말했다.
“대표님도 들어서 아시죠.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그러게. 지금 우리 조문도 순수하지만은 않지만, 그분의 죽음 자체는 안타깝게 여겨야지.”
“유통 쪽에서 조문을 올까요?”
서원웅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아마 높으신 분을 보내진 않을 거 같은데.”
서원웅도 제법 도가 텄는지,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택배사업부의 모 차장이 와서 영정에 절을 올리고, 유가족의 욕받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무슨 낯짝으로 여길 오는 거야, 엉? 뭐? 회사에서는 책임이 없어? 그게 말이야!”
“인간적인 예의를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에라!”
“진심으로 명복을 빕니다.”
차장은 영혼 없는 얼굴로 ‘명복을 빕니다’만 반복했다.
대찬과 서원웅은 드잡이가 한창일 때 빈소 안으로 들어갔다.
국화를 올리고, 절을 올리고서 유가족의 손을 잡았다.
대찬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도 필래에서 왔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대찬의 손을 잡은 유가족이 휙 뿌리쳤다.
눈빛도 돌변했다.
“지금 누구 놀리려고 이래요?”
“저희는 필래유통이 아니라 필래마트 직원입니다. 이분은 필래마트 대표인 서원웅 전무고요.”
“마트든 유통이든 필래라면 치가 떨리니까 당장 꺼져요.”
“저희는.”
대찬은 빈소 한 구석에 있는 스크린을 흘끔 봤다.
그러고 보니 고인의 이름도 모르고 찾아왔다.
“저희는 홍우창 씨의 죽음에 회사의 책임이 명백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그 말에 유가족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저희는 홍우창 씨가 근무하던 필래유통과는 다른 계열사지만, 저희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돕고 싶습니다.”
“…….”
“일단 잠깐 저희한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경황이 없으신 줄은 압니다만…….”
유가족은 대찬의 요구에 순순히 응했다.
대찬은 유가족의 어깨를 살짝 감싸며 빈소에 따로 마련된 작은 별실로 향했다.
그 장면을 누군가의 카메라가 촬영하고 있었다.
“조대찬, 내가 아주 자기 전속 기자인 줄 알지. 나도 이제 짬밥 먹을 만큼 먹은 기자인데 말이야.”
최재한이 툴툴거렸다.
그러자 그 옆의 촬영기자가 빈정댔다.
“그래도 선배 친구분 덕에 좋은 건수 많이 건졌잖아요. 이번에도 그림이 꽤 괜찮은데요? 나 몰라라 하는 필래유통, 책임 다하겠다는 필래마트.”
“너는 도대체 누구 후배냐?”
“특종의 노예가 돼야 한다는 건 선배가 하신 말씀 아니에요?”
“그림이나 제대로 잡아!”
최재한은 못마땅한 듯 퉁을 놨다.
그는 사진이 입수되자마자 관록 있는 안목으로 척 A컷을 골라내고, 바로 기사를 작성해 업로드 했다.
-[현장]‘면피’하려는 유통·‘책임’지려는 마트… 필래의 엇박자, 그 이유는?
최재한은 능숙하게 타다닥 타자를 친 지 20분 만에 기사를 송고했다.
인터넷 기사에는 유가족의 어깨를 감싼 대찬의 뒷모습과, 착잡한 표정이 역력한 서원웅의 얼굴이 잘 담겼다.
대찬과 서원웅은 그 자리에서 유가족을 성심껏 위로했다.
서원웅은 그들에게 약속했다.
“저희는 홍우창 씨가 근무하던 유통과는 별개의 계열사입니다. 그렇기에 운신의 폭이 한정적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도울 수 있는 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기운 차리십시오.”
“…모쪼록 잘 부탁드려요.”
유가족 역시 필래마트 측의 성의 있는 태도에는 부드럽게 대했다.
이 소식은 즉시 서청규 사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플레이야?”
“분명한 월권행위입니다, 사장님.”
서청규 사장은 당연히 분노했다.
그리고 그의 측근들 역시 필래마트의 영역침범에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사장단회의에서의 앙금이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서청규 사장은 붉은 기운이 목까지 번졌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필래마트 대표실에 전화를 걸었다.
“네, 대표실입니다.”
“야! 당장 서원웅이 바꿔!”
“누, 누구십니까?”
“서청규다! 빨리 바꿔!”
서청규의 채근에 서원웅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사장님.”
“너 미쳤냐?”
대뜸 튀어나오는 거친 언사에도 서원웅은 차분하게 응대했다.
예상하던 수순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뭔데 내 직원 장례식장에 가서 지랄 똥을 싸놓냐고.”
“아… 필래유통에서 홍우창 씨는 직원이 아니라 자영업자라고 발표했는데, 사장님은 직원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말장난하지 마. 죽여버릴 테니까.”
“협박하시는 거예요?”
“너, 지금 영웅놀이 하면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너는 그냥 서자야. 알아? 네가 서청수 씨를 타고났든 어쨌든 천출이라고. 천출이면 천출답게 굴어.”
“네. 조언 고맙습니다.”
서원웅은 뚝 전화를 끊었다.
일방적으로 통화를 차단당한 서청규 사장은 눈알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뚜뚜뚜, 통화 중이었다.
“이 미친놈이……!”
서원웅은 서청규의 전화를 끊자마자 대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조 차장입니다.”
“아, 나 서원웅인데, 녹음파일 보내줄 테니까 바로 언론에 풀어.”
“서청규 사장님은 한번 꼭지가 돌면 천지분간 못하는 게 탈이라니까요. 알겠습니다.”
대찬은 전화를 끊고 최재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기자님, 녹음파일 하나 줄게요.”
“녹음파일? 누군데?”
“서청규. 제목은 이거 어때요? 인면수심 서청규, 필래마트에 적반하장 욕설 파문.”
“야, 너 기자 하지 그랬냐? 인면수심은 너무 공격적이니까 빼고 그대로 올려줄게.”
“번번이 고맙네.”
“뭘, 개미와 진딧물이지. 나도 네 똥꼬에서 단물 잘 빨아먹고 있다.”
“너는 기자 때려치워야겠다. 언어생활이 그렇게 저질이래서야.”
최재한은 대꾸하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기사가 올라왔다.
최재한이 말했듯, 대찬이 제안한 표제에서 인면수심만 뺀 제목이었다.
서청규 사장의 거친 언어는 그대로 전파를 탔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사람들은 자극적인 목소리에 집중했다.
대화만 들으면 필래유통은 일방적인 가해자요, 필래마트는 일방적인 피해자였다.
필래마트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필래유통은 여론의 직격탄을 맞았다.
서청규 사장의 측근은 이 직격탄에 위축되었다.
“사장님, 일단 한 발 물러나시죠.”
“야! 여기서 발 빼면 내 체면이 뭐가 돼?”
“이러다가 진짜 파업이라도 들어가면 차질이 큽니다.”
“할 거면 하라고 해!”
“사장님…….”
측근의 간곡한 요청에 서청규 사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숨을 쌕쌕 뱉으며 심기를 다스리고는 말했다.
“알았어. 일단 대응은 자제하도록 해. 홍우창인지 뭔지 하는 놈한테는 적당히 위로금 쥐여 줘. 산재는 안 돼. 알지?”
“예, 물론이죠. 알겠습니다.”
필래유통은 거친 대응을 자제하면서 홍우창의 유가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위로금이랍시고 건넨 쪼잔한 금액은 안 주느니만 못했다.
유가족의 항의는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필래유통은 대외적인 대응은 자제하면서도 내부의 단속은 매우 엄격히 했다.
소속 택배기사들에게 일괄적으로 문자메시지가 전송되었다.
-부적절한 집단행동 금지, 문제 발생 시 회사와 우선 협의, 미준수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음.
택배기사들은 이에 분노했지만, ‘법적 제재’ 4글자에 쉽사리 집단행동에 나서지 못했다.
거기에 은근한 언론플레이에도 착수했다.
‘너희만 기자 있는 줄 알아? 나도 있어.’
필래유통은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흘렸다.
-택배기사 연봉 ‘6천만 원’ 육박… 생계 힘들다는 주장은 ‘거짓’
-택배기사 과로?… “업무량은 택배기사 마음대로”
-‘억대연봉’ 택배기사 500명 넘어
주로 사측의 입장을 옹위하는 경제지들이 이런 종류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택배기사가 결코 약자가 아님을 강조해 필래유통이 가해자라는 프레임을 파훼하겠다는 전략.
대찬은 그걸 보고 쩝, 입맛을 다셨다.
“이렇게 나올 줄은 알았지만 너무 치졸하다. 그치?”
“그러게요. 유류비, 통신비에 차량 할부금도 다달이 나가고, 위탁영업소에서도 기본 10퍼센트에서 악착같은 곳은 30퍼센트까지 수수료 떼어가니까.”
“그렇지. 다 떼고 나면 평균 6천이 나올 수가 없지. 자기들 말로 자영업자라며? 6천은 자영업자의 매출이지, 순수익이 아니야.”
“네. 억대연봉 택배기사가 있다는 걸 새삼 기사로 쓰는 것도 그래요. 택배기사는 연에 1억 벌면 안 되나? 열심히 일하면 벌 수도 있지.”
김산호의 말에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택배기사 연봉 문제를 물고 늘어질 필요는 없어. 핵심은 필래유통 측의 갑질과 부당한 압력행사니까.”
“혹여 일이 잘 풀려서 우리가 택배사업부를 인수하더라도 연봉을 계속 강조하면 우리도 인건비를 올려주는 수밖에 없잖아요.”
“얼씨구, 벌써 거기까지 갔어?”
“그래서 ‘혹여’라고 하잖아요.”
김산호는 어정쩡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