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12화
“하지만 오늘 서원웅 전무의 발언은 부적절했습니다. 인내할 줄도 알아야 하는데요.”
“백주야,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웃자. 시비는 청규가 먼저 걸었어. 참는 놈이 병신이지.”
“하지만 굳이 서청규 사장을 도발해서 좋을 건 없습니다.”
장백주 실장이 굳이 산통을 깨는 건 심리적인 이유였다.
서원웅이 서원웅처럼 안 보였다.
말투, 태도, 표정.
조대찬의 카피본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서원웅을 지지하는 입장은 장백주 실장이나 대찬이나 같았다.
하지만 이미 여러 번 대찬과 어긋났던 그였다.
집 밖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우보다 집 안에서 똑똑 새는 빗물이 더 유해하고 신경 쓰이는 법이었다.
장백주 실장에게 대찬은 똑똑 새는 빗물이었다.
그러니 대찬을 닮아가는 서원웅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속내를 서청수 회장이 알 리 없었다.
“야, 장백주, 언제부터 유머감각이 그렇게 없어졌어? 웃고 살자.”
“…예, 회장님.”
가볍게 장백주 실장의 눈치 없음을 꼬집은 서청수 회장은, 얼굴에서 한동안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서청수 회장이 순간 얼굴을 뻣뻣하게 굳혔다.
“이제 때가 왔어.”
“예? 때라뇨?”
“조만간 전면전이야. 서청규와의 전면전.”
그 말에 왕윤수 사장의 얼굴도 굳었다.
“부담이 많이 따를 텐데요.”
“지금까지 오래 참았어. 청규 그 자식이 승학이를 믿고 날뛰는 걸 어쩔 수 없이 참아왔지만.”
“이제는 서원웅 전무가 떳떳하게 입신했으니…….”
서청수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학이도 마냥 제 삼촌을 감싸고돌지만은 못할 거야. 그러는 순간 후계구도는 원웅이 쪽으로 확 쏠리니까.”
“…서청규 사장이 쉽게 제압될까요?”
서청수 사장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돼지를 잡으려면 온몸에 피가 튀는 건 각오해야지. 시간을 더 지체하면 더 큰 출혈을 감수해야 해.”
“그럼 선제적으로…….”
“아니. 일단 청규가 스스로 기우뚱할 때를 기다린다.”
서청수 회장은 주먹을 꼭 쥐었다 폈다.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간다.
주요 임원들만 참여했던 사장단회의에서의 일화가 필래그룹 전체로 퍼졌다.
서원웅의 일명 ‘삼촌 때리기’가 대찬의 귀에도 들어갔다.
둘이 독대하는 자리에서 대찬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대표님, 의외로 독한 구석이 있으십니다?”
“그건 너무 책임회피 아닙니까, 조 차장?”
“책임회피라뇨?”
“난 원래 순진무구했는데, 조 차장이랑 같이 있으니까 그 독한 물이 들어버린 거잖아요. 썩은 과일 옆에 있는 신선한 과일이 썩듯이.”
“너무 둔하신 거 아닙니까? 대표님 썩은 과일 되신 건 백만 년도 더 됐는데.”
둘은 서로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서원웅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찬에게 말했다.
“사장단회의 끝나고 회장님 잠깐 뵙고 왔는데.”
“네.”
“필드 업을 하남에만 지을 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추진하는 게 어떨까 하시던데.”
“그래요? 아직 필드 업 하남도 잘될지 안 될지 모르는 판인데…….”
“이 사업 자체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계시더라고.”
대찬은 흐흐 웃었다.
“그러시려면 회장님께서 필래마트를 더 밀어주셔야죠. 사실 우리 회사 단독으로는 하남 하나만으로도 벅차잖아요.”
“그렇지. 회장님도 그럴 용의가 있으시긴 한데…….”
“자금조달 방법이 뾰족하지가 않죠?”
대찬이 정확히 맥을 짚자 서원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가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은 한계에 달했고, 그룹 차원에서 나서기에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많으니까.”
“채무보증을 해주면 좋은데, 그건 불법으로 규정돼 있고요.”
서원웅은 이마를 살짝 짚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법망을 피해갈 수 있는 꼼수가 하나 있어요.”
“응?”
대찬의 말에 서원웅의 눈이 조금 커졌다.
“TRS를 이용하면 돼요. 채무보증하고 비슷한데, 채무보증이 아닌.”
“TRS……?”
서원웅에게 낯설었다.
TRS라면 무전기를 말하는 건가?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서원웅은 쉽게 입술을 떼지 못했다.
대찬이 부연설명을 했다.
“총수익스와프라는 건데요. 지금 우리 회사의 상황으로 얘기하면, 필래마트는 회사채를 발행해서 모 금융회사로부터 현금을 받고요.”
“응.”
“모 금융회사는 그룹 본사인 필래지주와 TRS 계약을 체결합니다. 필래지주는 필래마트에 대한 모든 현금흐름을 책임집니다. 이익이든 손실이든 필래지주가 가져가죠.”
“그럼 금융사는?”
“손실에 대한 위험부담을 없애고 안전하게 이자를 받아갈 수 있죠.”
서원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거의 채무보증이랑 똑같은데, 불법이 아니라고?”
“네.”
대찬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대찬의 첫 번째 삶이 종언을 고하던 2019년까지도 TRS를 통한 계열사 지원은 불법이 아니었다.
이런 방식은 첫 번째 삶의 2014년, 이즈음부터 스멀스멀 대기업들에 의해 시도되려고 하던 참.
그러한 연유로 대찬은 자신 있게 서원웅에게 권유했다.
서원웅은 이런 방안을 서청수 회장에게 직접 보고했다.
서청수 회장은 그걸 듣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조대찬이는 어디서 이런 꼼수를 단지에서 곶감 빼먹듯 찾아오지?”
“그러게요. 저도 놀랐어요.”
“좋아. 재무팀에서 한 번 더 검토해보고, 탈이 없겠다 싶으면 필래마트 확실히 밀어주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서청수 회장은 웃음을 흘렸다.
“내가 마트를 밀어주는 이유가 뭔지는 대충 알고 있지?”
“예? 이유라뇨……?”
“모르는 척하기는. 우리 회사 유통의 중심을 필래유통에서 필래마트로 옮겨놔야 해.”
서원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제가 몇 년 노력한다고 해서 될까요?”
“어렵겠지만 최대한 되는 데까지 해봐. 이 정도로 밀어줬으면 성과를 보여야지.”
“…알겠습니다.”
“너한테 해줄 만큼 해줬다. 필래마트 대표로서의 임기는 어쩌면 너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일지도 몰라.”
“알고 있습니다.”
서원웅도 서청수 회장의 말뜻을 잘 알았다.
서자인 서원웅이 필래의 대권을 이어받으려면 압도적인 경영능력을 입증해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적장자로서의 정통성을 갖추고, 뒷배를 거느린 서승학을 이길 수 있다.
서승학은 서원웅보다 1차 시기를 먼저 뛰었다.
불량한 언행으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다.
그가 대표를 맡았던 필래푸드와 필래기획의 성적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필래푸드 대표 시절.
간편식 제품들을 야심차게 출시했다.
그러나 가격 대비 처참한 양과 맛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그 제품들은 홍보모델을 했던 모 연예인의 이름을 본뜬, ‘가격에 비해 맛과 양이 형편없다.’는 뜻의 신조어만 창조해냈다.
그걸 유일한 유산으로 남겨놓고 씁쓸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필래기획 대표 시절.
여자 모델이 국방의 의무 축하해, 이제 정신 좀 차리겠구나, 운운하며 케이크를 사주는 CF가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경영능력은 아직 더 성장이 필요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적어도 서원웅이 경영능력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다는 뜻이었다.
서원웅은 각오를 다졌다.
전력으로 밀어줄 테니 필래유통을 찍어 눌러라.
그게 서청수 회장이 부여한 임무였다.
대찬이 제시한 TRS을 이용한 방법으로, 필래마트에 서청수 회장발 자금이 유입되었다.
필래마트는 부천과 청주에 새로운 필드 업을 건설할 계획을 수립했다.
대찬의 혁신경영팀은 서원웅이 서청수 회장으로부터 부여받은 필래유통 잠식을 위해 골몰했다.
필래유통은 단일 계열사로는 필래그룹에서 가장 컸다.
백화점·택배·편의점·홈쇼핑·면세점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별도로 상당한 부동산을 운영하는 자회사를 두고 있었다.
필래마트가 대형할인점, SSM, 그리고 테마파크를 접목한 쇼핑몰을 출범시켰다고는 해도 여전히 필래유통에 대적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 공룡을 어떻게 잡아먹는담.”
허운은 펜으로 이마를 톡톡 건드리며 고심했다.
한태윤 과장이 대찬에게 말했다.
“어떤 사업부를 건드리든 녹록하지는 않을 겁니다.”
“네, 그렇죠. 우리 목적은 필래유통을 무너뜨리는 게 아닙니다. 제 살 깎아먹기 식의 전술은 성공해도 회사 전체에 막대한 손해를 안길 겁니다.”
대찬의 말에 김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회장님도 바라진 않으실 거예요.”
“그렇다면 결국 우리 스스로 강해져서 필래유통에 우위를 점하란 건데…….”
송희근 과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말이야 쉽지.”
대찬은 김빠진 분위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급할 거 없어요. 일단 우리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됩니다.”
“마냥 우리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그렇지요…….”
대찬은 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네. 우리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죠. 결국 필래유통이 우리를 도와줘야 합니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십니까? 필래유통이 우릴 돕다뇨……?”
“서청규 사장의 경영스타일은 굉장히 마초적이고 터프하기로 정평이 났잖아요.”
대찬의 말에 송희근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필래유통에서 오래 근무했으니 대찬만큼 잘 알았다.
“어휴, 장난 아니죠.”
“그렇게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해 채찍질을 하는 경영 스타일이 효율적일지는 몰라도, 항상 탈이 나기 마련이거든요.”
그 말에 역시 필래유통 출신인 한태윤 과장도 공감했다.
“사건사고가 많기는 했죠. 임신한 백화점 직원 강제로 출근시켰다가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나고.”
“편의점 매출이 떨어졌을 때, 전국 점장들 모아다가 반말로 호통을 치고.”
“심지어 점장들 대부분은 직원도 아닌데 말이죠.”
한태윤 과장과 대찬은 탁구를 치듯 서청규 사장의 전력을 하나씩 거론했다.
“언젠가는 총력근무체제를 선언한다면서 장기간 고강도 노동을 주문하기도 했죠.”
“그때가 저 신입사원일 때인데, 아주 죽을 뻔했습니다. 그때 여럿 사표 썼죠.”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판국이니 탈이 나도 언젠가는 탈이 날 겁니다. 그때까지는 우리 할 일에 집중하자고요.”
대찬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서청규 사장의 필래유통은 언젠가 반드시 삐거덕거릴 것이라 확신했다.
대찬의 첫 번째 삶에서도 서청규 사장의 필래유통은 사건사고의 연속이었다.
그때까지 서청규 체제가 공고했던 건, 그가 필래유통에 뻗치고 있는 압도적인 지배력 덕분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삶의 서청규 사장은 그때만큼 강건하지 못하다.
필래마트의 급성장으로 유통분야에서의 독보적인 지위가 흔들렸다.
서원웅이 대두하면서 서청규 계열의 임원들 중에서도 갈등하는 치들이 많아졌다.
콘크리트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찬은 그 균열이 더 넓어지는 순간 파고들 작정이었다.
그 균열은 생각보다 이른 시일에 터졌다.
균열의 시작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의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시작되었다.
자식 셋을 모두 독립시킨 중년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퇴근한 남편을 아내가 맞았다.
가벼운 타박은 일상이었다.
“아유, 일찍 일찍 좀 다니면 안 돼요? 밥상 두 번 차리기 힘들어.”
“아, 누군 일찍 안 들어오고 싶나? 그리고 밥상 차릴 거 없어.”
“왜? 밥 먹어야지.”
남편은 고린내 나는 양말을 빨래통에 던지며 대답했다.
“힘든 날에는 밥맛도 없어. 나 바로 잘 테니 거실에서 테레비 좀 보다 들어와.”
“아이구, 발이라도 씻고 자!”
남편은 아내의 말을 들을 여유도 없이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아내는 내가 못 살아! 타박하면서도 남편의 즉각적인 수면을 방해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음소거한 채로 수목드라마를 챙겨 보다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러 들어갔다.
남편은 방에 들어간 자세 그대로였다.
아침이 돼도 자세는 바뀌지 않았다.
오죽 피곤했으면 저럴까.
“여보, 출근해야지.”
아내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며 남편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툭.
남편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여보.”
아내는 양손으로 남편의 어깨를 매만졌다.
체온이 식어 미지근하고 뻣뻣했다.
“여보!”
아내는 절규했다.
소식은 바로 대찬의 귀에 들어갔다.
김산호가 대찬에게 보고했다.
“택배 쪽에서 이슈가 터졌어요.”
“무슨?”
“택배기사 한 분이 과로사하셨어요. 자다가 돌아가셨다고.”
대찬은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