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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11화 (210/556)

난 할 수 있어 211화

어머니의 말대로 베란다에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뭐지…….’

대찬은 하나하나 송장을 확인했다.

한우선물세트.

자연산송이버섯.

고가의 화장품.

건전복.

백화점상품권.

발신인은 하나같이 부·차장급의, 승진에 목마른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태블릿PC나 콘서트티켓 등 젊은 대찬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고민의 기색이 역력한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이 양반들이 진짜…….”

“왜, 그래도 마음들이 갸륵하잖아. 저 정도는 받아도 괜찮지 않아?”

어머니의 말에 대찬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대찬은 선물을 보내온 직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었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모두 반송해 버렸다.

부모님은 못내 아쉬운 듯했지만, 대찬은 그런 기색 하나 없이 그대로 되돌려 보냈다.

그걸 보고 어머니는 팔짱을 끼고 툴툴거렸다.

“도로 물릴 거면 이름은 왜 적어놓니? 마음만 받겠다, 뭐 그런 거야?”

“아뇨. 이 사람들은 승진하려면 남들보다 2배, 3배는 잘해야 할 거예요. 안 그러면 얄짤 없을 테니까.”

“아이고, 무서워라.”

대찬은 이름들이 적힌 쪽지를 서랍 한 구석에 보관했다.

서원웅이 필래마트의 대표이사 전무가 되고, 대찬 역시 혁신경영팀 차장으로 보직을 옮긴 그다음 날.

사옥 입구에서 출입증을 찍고 안으로 들어가 사무실까지 이르는 길.

대찬은 그 짧은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혁신경영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들이 그를 반겼다.

송희근 과장, 한태윤 과장, 허운 과장, 유채경 대리, 김산호 대리, 오다혜 대리, 홍은주 주임.

전략기획실의 직원들이 그대로 혁신경영팀의 인원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팀보다는 덩치가 제법 되었다.

대찬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송희근 과장이 웃으면서 반겼다.

“어어, 우리 왕차장님 오셨네.”

“왕차장이라뇨? 저 조 씬데요.”

대찬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하자 송희근 과장은 씩 웃었다.

“에이,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뭘요?”

“이미 사내 인트라넷이며 구내식당이며 얘기가 파다한데, 정작 당사자는 모르세요?”

“엥?”

대찬이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허운이 끼어들었다.

“누가 요즘 조대찬 차장님을 조 차장이라고 불러요? 왕차장님이라고 하지.”

“별로 좋게는 안 들리는데.”

“듣기에 따라서 좋을 수도 있고, 안 좋을 수도 있죠. 실세 차장이란 건데.”

“별로 달라진 것도 없는데 호들갑들은…….”

“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당사자는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겠죠.”

대찬은 싱겁게 웃으면서 퉁을 놨다.

“당사자 아닌 사람들이 그럴 거는 또 뭔데?”

“태양은 어지러운 줄 모르지만, 그 주변에 도는 수금지화목토천해명은 어지러워서 멀미를 한다니까요.”

“명왕성이 행성에서 빠진 지가 언젠데 거기 끼워넣어?”

“행성 아니어도 공전은 한다고요. 행성도 못 되는 명왕성 같은 과장, 대리들은 취급도 안 해준다, 이겁니까?”

“허운 전매특허 우기기 나왔다.”

대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권태로운 손짓으로 허운을 물리쳤다.

허운의 말은 가벼웠지만, 그가 전하는 상황은 무거웠다.

대찬도 겉으로는 간단히 일축했지만, 속으로는 큰 부담을 느꼈다.

서원웅이 대표에 오른 이상 대찬의 힘은 보통의 임원 그 이상이 될 게 뻔했다.

회사가 시스템만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 까닭이었다.

‘왕차장’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그저 기쁘다고 즐기고 있으면, 손에 들린 칼은 남이 아니라 내 목을 찌르게 될 것이다.

서원웅은 대부분의 임원들에게 ‘재계약 의사 없음’을 통보했다.

서원웅이 대표로 취임하자마자 첫 번째로 단행한 건이었다.

필래마트는 기업의 규모에 비해 임원이 지나치게 많았다.

월드몰로부터 100퍼센트 고용승계를 약속한 영향도 있었다.

게다가 옥문영 상무처럼 유배 오듯 전보된 임원들도 있었다.

임원회의라도 하는 날에는 시장통이 따로 없었다.

그러니 임원을 줄이는 건 자연스러운 과제였다.

회사를 부문제로 바꾸는 것부터가 인원감축의 짙은 징후였다.

부서를 축소 개편하면 불필요한 인력이 내쳐지는 건 당연한 수순.

즉, 무언의 경고였다.

필래마트의 조직은 세 부문으로 개편되었다.

옥문영 상무가 부문장으로 선임된 경영지원부문.

한때 대찬의 상사였던 도진석 상무가 부문장을 맡은 영업부문.

영업부문은 기존의 매입부, 영업부, 해외영업부, 마케팅팀 등을 통합하여 만들었다.

대찬은 도진석 상무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좋지만은 않았지만, 나쁜 인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다른 임원들보다는 유능한 사람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지역사업부문이었다.

여기에는 서원웅이 본부장으로 있던 북부영업본부 등 전국 각지의 영업본부들이 속해 있었다.

대찬이 아는 걸 당사자인 임원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진즉 마음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최진갑 상무를 비롯해 박 전무, 무슨 상무, 무슨 이사.

기존의 임원들은 한 번에 쓸려나갔다.

대찬은 이 과정에서 서원웅이 자신의 손을 빌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약한 구석이 있는 그였다.

인간백정 노릇은 대찬에게 부탁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서원웅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임원들이 대표실을 들락날락거렸다.

들어갈 때는 임원이었다가 나올 때는 전 임원이 되었다.

순식간에 고액 연봉자들이 나가떨어졌다.

이로써 필래마트 내에 서원웅의 권위에 도전하는 존재는 없게 되었다.

경영지원부문장인 옥문영 상무는 말할 것도 없는 대찬과 서원웅의 사람이었다.

영업부문장인 도진석 상무는 월드몰 출신이었다.

주변의 월드몰 출신 동료들이 나가떨어지는 걸 봤으니 방종하지 못할 것이다.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였다.

별수 없이 서원웅에게 적극 협조해야만 했다.

지역사업부문장인 김 모 상무는 사람 자체가 무골호인인 데다, 딱히 야망도 없는 사람이었다.

서원웅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서원웅 대표를 받치는 3명의 부문장이 이런 상황이고, 그 밑에서 대찬이 중심을 꽉 잡고 있었으니 서원웅은 이제 경영만 잘하면 되었다.

그룹 차원에서 서원웅이 데뷔전을 치른 건 신년 사장단회의였다.

이름은 사장단회의였지만 그룹 계열사의 대표이사들과 주요 임원들이 참여하는 자리였으니, 직급이 전무인 서원웅도 자격이 되었다.

서원웅은 사장단회의에 참석하기 전, 대찬과 간단한 티타임을 가졌다.

대찬이 그에게 해줄 말은 많지 않았다.

“잘하고 오세요.”

“그럴게.”

서원웅 역시 대답할 말이 길지 않았다.

서원웅은 웃으며 대뜸 대찬에게 악수를 청했다.

대찬은 웃으며 서원웅의 손을 꼭 붙들었다.

서원웅의 손바닥에 땀이 살짝 배어 나왔다.

사장단회의는 여느 때처럼 서청수 회장이 주도했다.

하지만 표정만큼은 평소와 달리 유독 흐뭇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냈다.

그 까닭을 아는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은 불편한 듯 입술을 씰룩였다.

서청규 사장의 측근인 곽동성 필래식품 사장도 어흠, 헛기침을 했다.

서승학 필래기획 사장은 저 둘보다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진 않았다.

그는 불쾌한 표정이었다.

서씨의 젊은 피가 자신을 제외하고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 못내 견디기 힘든 모양.

서청수 회장은 둘의 심술궂은 표정을 보고 웃었다.

시선이 자연스레 서원웅 쪽으로 향했다.

서청규, 서승학, 저 밉상 둘을 보다가 서원웅의 살짝 긴장한 얼굴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서원웅도 마냥 외로운 백로는 아니었다.

서승학을 지원하는 서청규만큼은 아니지만 우군은 있었다.

서청운 필래 컬처인더스트리 사장은 서원웅의 계열로 분류되었다.

기실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항간은 그를 서원웅의 파벌로 규정했다.

조대찬 차장은 서원웅 전무의 막역지우이자 최측근.

서청수 회장이 그의 누나와 서청운 사장의 아들을 이어줬다.

그러니 당연히 서원웅 계열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서청운 사장은 처음엔 세간의 평가가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서원웅이 점점 그럴듯한 면모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걸 본 서청운 사장은 서원웅에게 마음을 주었다.

저 망나니 서승학이 대권을 잡으면 회사가 크게 휘청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서청운 사장은 둘째 형인 서청규보다 맏형인 서청수를 더 의지하고 있었다.

서청수 회장이 후계구도를 정립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서원웅에게 마음을 더 주고 있었다.

서청운 사장 역시 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사장단 앞에서 연설을 늘어놓았다.

“올해, 2014년은 필래그룹이 한 차원 도약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여러 계열사의 공이 크지만, 특히 필래마트가 괄목할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서청규와 서승학의 무리는 서청수 회장의 노골적인 띄우기가 불편했다.

물론 불편하라고 하는 소리니 서청수 회장은 개의치 않았다.

“우리는 지금껏 유통관련 사업을 필래유통 한 곳에만 의존했으나, 필래마트는 고속성장과 사업 다변화를 통해 우리 유통채널의 쌍두마차로 거듭났습니다.”

“…….”

“앞으로도 필래마트가 혁신경영, 창의경영으로 필래유통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건설적인 경쟁을 이어나가주길 바랍니다.”

‘건설적인’이라는 전제를 달았지만, 그건 수사에 불과할 뿐이었다.

필래마트가 필래유통의 기둥뿌리를 갉아먹어주기를 바라는 서청수 회장의 속내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청수 회장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필래마트 서원웅 대표가 우리 사장단 가족에게 한 말씀 올리도록 하지. 첫 만남이니까.”

서청수 회장은 서원웅을 연단으로 올렸다.

서원웅은 잠깐 긴장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 청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서원웅이 연단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신임 필래마트 대표 서원웅 전무입니다.”

서원웅의 인사말에 대부분의 계열사 대표들이 박수로 환영했지만, 서청규 계열의 몇몇은 뜨뜻미지근하게 반응했다.

서청수 회장이 뒤에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다.

그런데도 반응이 뜨뜻미지근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서청규의 사람들이란 뜻이었다.

서청수 회장은 그 면면을 확실히 뇌리에 각인시켰다.

그 정도의 여유는 없는 서원웅은 또박또박 인사만 이어갔다.

“많이 부족합니다만, 당당한 필래의 한 축으로 성장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선배님들의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서원웅이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숙이자, 삐딱한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왔다.

박수를 치려던 계열사 대표들은 그 목소리에 멈칫했다.

“지도편달이라니, 각자 자기 회사 돌보기도 어려운 사람들이 지도편달 할 여유가 어디 있어? 거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

서청규 사장이었다.

그 말에 서원웅은 덤덤히 받아쳤다.

“서청규 사장님은 모든 계열사 대표님들을 그렇게 잘 아시나요?”

“뭐야?”

“서청규 사장님은 본인 회사 돌보는 것만으로도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다른 분들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도 자기 회사 하나 건사하기 급급한 사람의 지도편달은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일순 서청규 사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볍게 찍어 누르려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도리어 뻣뻣이 모가지를 치켜든다.

저 망할 놈의 조카 같지도 않은 조카!

서원웅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본인 회사를 돌보시고도 여유가 있으신 유능한 선배님의 지도편달을 부탁드립니다.”

서원웅은 우회적으로 서청규를 무능한 선배님으로 규정했다.

그 말에 서청수 회장을 따르는 대표들은 풉, 웃음이 튀어 나왔다.

그에 서청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야! 너 싸가지 없이 이따위로 나올 거야?”

“반말하지 마십시오. 사장단회의입니다. 저는 지금 사장님과 동등한 입장으로 여기에 섰습니다. 그런 사람한테 반말이라니, 누가 더 싸가지 없습니까?”

그 말에 서청규 계열의 대표들이 일어나 항의했다.

오가는 고성에도 서원웅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뒤편에 앉은 서승학은 다리를 꼰 채로 이 상황을 불만 가득한 얼굴로 관조했다.

사장단회의는 그렇게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유야무야 끝났다.

서청수 회장은 김태준 필래지주 사장, 왕윤수 필래지주 사장, 장백주 비서실장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놓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폭소했다.

“푸하하! 청규 놈, 눈알 벌게지는 거 봤어? 귓불 벌게지는 거 봤어? 아주 그냥 된통 당했어!”

“회장님께서 이렇게 유쾌하게 웃으시는 건 오랜만입니다.”

“유쾌하지. 유쾌하고말고! 원웅이 고 녀석이 언제 이렇게 컸을까? 당찬 녀석이 됐어.”

서청수 회장이 기분 좋게 웃는 와중에 장백주 실장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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