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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10화 (209/556)

난 할 수 있어 210화

“자, 그럼 가볼까?”

이동수 부사장은 무려 20명에 달하는 임직원을 거느리고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대찬은 차장 직급으로는 유일하게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동수 부사장을 위시해 서원웅 전무와 옥문영 상무를 비롯한 임원진.

그리고 관계 부서의 부·팀장들.

거기에 조대찬 차장이 몇 대의 세단에 나눠 타고 하남 필드 업 건설현장으로 향했다.

그 대열에는 마케팅팀의 대리 1명이 포함되었다.

아마추어 사진가로, 개인전까지 연 경력이 있는 직원이었다.

이동수 부사장은 머리에는 안전모를 쓰고, 눈에는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꼈다.

그리고 옥문영 상무가 예언했던 대로 건설현장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굳이 안 해도 될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그의 눈동자는 저 아마추어 사진가 출신의 대리가 자기를 잘 찍고 있나 부단히 감시했다.

선글라스를 안 꼈으면 추하단 소리가 절로 나올 동공 운동이었다.

‘참 좋기도 하시겠다.’

그를 뒤에서 지켜보는 대찬은, 사진이 예쁘게 나오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주었다.

이동수 부사장에게는 어지간히 소중한 추억인 듯했다.

그는 그때 찍힌 수백여 장의 사진 중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 1장을 큰 사이즈로 뽑았다.

그리고 고르고 고른 액자에 끼워 대표실에 걸어 두었다.

‘내가 신입사원 때 말이야…….’로 시작하는 일장연설을 건설노동자에게 건네고 있을 때 찍힌 사진이었다.

그의 비서가 대표실에 들어갈 때마다, 이동수 부사장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멀찍이 서서 흐뭇하게 자신의 사진만 지켜보고 있더란 후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사진은 대표실에 오래 걸려 있지 못했다.

해가 바뀌어 2014년.

필래마트의 수장은 이동수 부사장에서 서원웅 전무로 교체되었다.

이동수 부사장은 필래그룹을 떠났다.

한 중소 주류업체의 사외이사로 선임되었다는 후문이었다.

그는 떠나면서 각별했던 사람들과 따로 인사를 나눴다.

악연이든 선연이든 대찬과의 관계가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동수 부사장은 그와 악수를 나눴다.

“조 차장, 고맙고 미안하네.”

“별말씀을요.”

“자네 덕에 대표 명함도 파보고 그랬는데. 자네 등에 칼 꽂기도 하고 그래서 미안해. 떠나는 마당에 후회가 되는구만.”

대찬은 웃으면서 할 말은 했다.

“떠나시는 마당이 아니라 조금 빨리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허허, 참…….”

“대표님과의 인연은 잘 간직하겠습니다. 부디 다른 회사 가셔서도 잘 지내십시오.”

“그래. 자네도 꼭 승승장구하길 바라네, 지금처럼.”

대찬은 웃으면서 이동수 전 부사장을 전송했다.

공석이 된 필래마트의 대표이사로는 서원웅 전무가 선임되었다.

진급은 없이 대표이사로만 선임되었다.

그는 대표이사로 선임되기 전, 대찬을 따로 불렀다.

“대찬아.”

“회사에서 대찬아, 가 뭡니까. 조 차장이라고 해주세요.”

“대찬아.”

“그래, 왜! 원웅아.”

서원웅은 웃으면서 대찬의 손을 꼭 잡았다.

대찬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야, 뭐야! 징그럽게!”

“왜, 손도 못 잡아?”

“나 솔로 된 지 한참이라도 남자한테 반할 정도로 궁하진 않거든? 일단 이거 놓고 얘기하자.”

“매몰차긴.”

“징그럽긴!”

서원웅은 소리 없이 웃고는 말했다.

“감개무량해서 그래. 너 아니면 내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나 있었겠어?”

“그런 마인드 위험해. 올라갈 길이 구만 린데, 벌써부터 히죽거리면 어떡해.”

“그래도 잠깐은 괜찮잖아?”

대찬도 편한 웃음을 보였다.

“그래, 축하한다. 고생 많았어, 여기까지. 앞으로 더 고생해야겠지만.”

“고생은 네가 더 했지. 그래서 말인데, 나 좀 더 도와줘라.”

“안 그래도 충분히 돕고 있잖아.”

“충분히 돕기에는 차장 직급이 너무 갑갑하지 않아?”

“어?”

서원웅은 더 활짝 웃었다.

“이번에 이사 하자.”

“뭐? 이사?”

서원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나 대표이사로 가면서 너도 이사로 가는 거야.”

“나 이제 서른둘이야. 이사는 안 돼.”

뜻밖의 단호한 거절에 서원웅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안 될 거 뭐 있어? 네가 지금까지 해낸 걸로만 치면 이사도 모자라.”

“싫어.”

“시, 싫어……?”

“그래, 싫다.”

서원웅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회사에는 임원을 목표로 달리는 직원들이 한 트럭이었다.

만약 그들에게 서원웅이 같은 제안을 했다면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손가락을 자르라면 자르는 사람도 태반일 터.

그런데 대찬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옛날 중국의 요 임금에게 왕이 되라고 제안을 받은 선비가 강물에 귀를 씻었다는 고사를 떠올리게 했다.

서원웅은 못마땅한 듯 팔짱을 끼며 물었다.

“뭐야, 뭐가 그렇게 싫은데?”

“도둑고양이는 당장 눈앞에 생선이 있으면 잽싸게 채가겠지. 근데 생선가게 고양이는 안 그래.”

“너는 생선가게 고양이라고?”

“임원까지 올라가는 게 정해진 수순이라고 하면 너무 건방진 생각인가?”

대찬의 말에 서원웅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절대.”

“그래. 당장 진급에 목매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렇게 하는 편이 너한테도, 나한테도 좋아. 모난 돌이 정 맞으니까.”

“그래도 내가 너를 끌어주려면 지금이 가장 적기야. 이후로는 현실적인 부담이 따를 거야.”

대찬은 피식 웃었다.

“됐네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올라갈 거야.”

“알았어. 진급은 그럼 일단 보류할게. 대신 회장님께 증여받기로 한 주식 중에 2천 주는 너한테로 돌릴 거야. 이건 진짜 거절하면 죽는다.”

필래마트의 주식은 한 주당 10만 원을 헤아렸다.

2천 주면 2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대찬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야, 아무리 그래도 인사치레로 2천 주는…….”

“됐어. 막지 마. 네가 회사에 가져다준 이익에 비하면 발톱의 때만큼도 안 돼.”

“허…….”

대찬은 이것만큼은 쉽사리 안 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단호히 거절하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었다.

그동안 원 없이 사업을 벌이고 업무를 주도했지만, 기실 떨어지는 돈푼은 다른 월급쟁이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대찬은 쉽게 거절하지 못하고 대신 침만 꼴딱 삼켰다.

서원웅은 이 상황에 단단히 재미를 들인 듯했다.

시종 당당하던 대찬의 동공이 흔들리는 장면을 구경하는 건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서원웅은 계속 말했다.

“주식은 당장 처분하기에는 눈치가 보이니까, 솔직히 그림의 떡이야.”

“…….”

“회장님이 그걸 염려하셔서 우리 조 차장한테만 비정기상여금으로 1억 지급하셨어.”

“뭐?”

억, 억.

억의 향연에 대찬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동안 큰돈을 주무르면서 첫 번째 삶의 수전노 근성이 조금은 사라졌다고 자신했다.

‘전혀 아니었어…….’

대찬은 땀을 삐질 흘렸다.

“야,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건 내가 결정한 거 아니야. 회장님이 말씀하신 거야. 안 받으면 오히려 결례다?”

“…….”

“나 너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못 왔어. 반대로 생각해봐. 주식 2억 원어치랑 현금 1억으로 이 자리.”

서원웅은 자신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이 필래마트 대표 자리 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불공정거래야? 네가 얼마나 밑지는 장사냐구.”

“내가 판 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재미 본 쪽에서 이 정도는 헐값이라고 생각한다니까. 그러니까 받아둬.”

대찬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건 거절하기 힘드네. 여러 가지 의미로.”

“이 정도는 돼야 부려먹는 회장님도 너희 부모님께 면이 좀 서지.”

“아주 배려가 넘치시는 회장님이시네.”

서원웅은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진급은 없어도 보직이동은 있을 거야.”

“설마 또 폐점위기 매장 점장으로 보내는 건 아니지?”

“아니야. 이번에 조직을 대폭 개편하려고. 네 보직이동도 거기에 따른 거야.”

대찬은 손을 앞으로 모으며 물었다.

“어떻게?”

“전략기획실을 인사팀, 대외협력팀, 법무팀 등등 다른 부서와 합쳐서 경영지원부문으로 개편할 거야.”

“경영지원부문.”

“응. 그리고 부문장에는 옥문영 상무님을 선임할 거고.”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문 산하의 조직은 어떻게 되는데?”

“팀제로 개편할 거야. 전반적으로 비대한 조직을 축소하는 데 주안점을 뒀어.”

“그럼 내 보직은……?”

“혁신경영팀장.”

“혁신경영팀장…….”

대찬은 서원웅이 새로 부여한 자신의 보직을 발음했다.

말이야 좋은데, 무슨 일을 하는지 확 와닿지 않았다.

“뭐 하는 자리야?”

“말이 좀 애매하지?”

“응. 그런 느낌이 좀 있네.”

“일부러 그렇게 지었어.”

“어? 왜?”

서원웅은 웃으면서 말했다.

“혁신경영팀은 프리 롤(Free Role)이야. 역할이 어떨지는 전적으로 팀의 역량에 달려 있어.”

“시험도 원래 문항 없이 ‘아는 대로 쓰시오.’ 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 알지?”

“알지. 그러니까 너한테 맡기는 거 아니야.”

대찬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믿음은 고맙지만, 부담이 안 될 순 없어.”

“기존 전략기획실의 잡다한 사무는 전략기획관리팀에서 맡을 거야.”

“그건 좋네.”

“혁신경영팀은 사업과 경영의 모든 분야에 자유롭게 간섭하고, 가능하다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권한도 부여받을 거야.”

“자칫 잘못하면 다른 부서들한테 못된 시어머니로 찍힐지도 몰라.”

“그러라고 만든 자리야. 만만한 시누이가 되면 안 돼. 무서운 시어머니가 돼야 하지.”

대찬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그러려면 확실한 권한이 있어야 해. 단순히 간섭할 수 있는 정도면 찬밥 신세 되기 딱 좋다고.”

“응. 그래서 확실한 권한을 주려고.”

“어떤……?”

“혁신경영팀이 관여하는 모든 보고서, 기획서에는 팀장의 의견을 직통으로 전달할 수 있는 공란을 의무적으로 두어야 한다.”

“그건 좀 먹히겠는데.”

“그렇지? 평소에도 네가 나한테 비공식적으로 직접 의견을 전달하긴 하지만, 이게 공식화되면 다른 부서에서도 혁신경영팀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살짝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나 하나 때문에 시스템을 바꾸는 건 좀 무리지 않을까?”

“꼭 너 하나 때문만은 아니야. 네 후임으로 다른 누가 팀장이 되더라도 이 제도는 유지할 거야.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한 조치야.”

“어째 임원으로 승진하는 것보다 더 눈에 띄는 거 같은데. 조삼모사야.”

“네가 임원이 되든, 안 되든 부문제로의 변화와 혁신경영팀의 설치는 이미 우리 그룹 경영연구소에서도 제안했던 내용이야.”

대찬은 서원웅을 흘끗 바라봤다.

“그래?”

“응. 떠나시는 이동수 대표님 때보다 내가 취임하고 해내는 게 모양새가 좋아 여태 유보했던 것뿐이야. 그러니까 너무 특별대우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

“알았어. 내가 너무 콧대 높게 굴었네.”

“네가 이 정도는 맡아줘야 나도 자신 있게 앞만 보지.”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2천 주의 주식과 1억 원의 현금, 그리고 전폭적인 권한.

잠깐의 대화 사이에 대찬에게 주어진 것들이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청빈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이라도, 돈을 받으면 남에게 베풀 수 있으니 좋아할 것이다.

대찬의 가족들은 혁신경영팀장의 책임과 권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대찬이 쉽게 풀어 설명해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회사의 내부자가 아닌 까닭이었다.

‘그냥 임원 되겠다고 하지, 그랬니.’

그 정도의 감상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돈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어머니의 동공이 커졌다.

“뭐? 주식을 2억 원어치나 줬어? 거기에 현금을 1억이나 얹어줘?”

“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무슨 바람이 불긴. 그치들이 보통 치들이니. 손해 보는 짓을 사서 하겠냐구. 떳떳이 받아.”

“받기야 떳떳하게 받았죠. 그래도 워낙 큰돈이니까.”

“그러게 말이다. 그렇게 몇 번만 더 당기면 금방 부자 되겠는걸?”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요행 너무 바라면 안 돼요. 나무에 머리 박고 죽은 토끼를 우연히 잡은 농부가 나무만 쳐다보고 있다가 굶어 죽었다는 말도 모르세요?”

“시끄러워. 농담에 시시콜콜 다큐로 받아치고 있어. 밥이나 먹어!”

대찬은 실실 웃으면서 밥술을 떴다.

식사를 하던 중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택배가 많이 왔던데.”

“아, 맞아. 얘 앞으로 많이 왔어.”

어머니의 말에 대찬이 숟가락을 내려놨다.

“뭐가 왔어요?”

“응. 한 트럭이 와서 베란다에 쌓아놨다. 직접 확인해봐. 1억에 눈이 멀어서 까먹어버렸네.”

“밥 다 먹고 확인할게요.”

대찬은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베란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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