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09화
대찬은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비적비적 서원웅의 집무실로 향했다.
서원웅의 조치를 위에서 굽어다보고 있던 것은 대찬뿐만이 아니었다.
“저 녀석이 언제 저렇게 컸지?”
필래그룹 사옥은 5층 천장까지는 가운데가 뻥 뚫린 구조였다.
서청수 회장은 5층 난간에서 뒷짐을 진 채로 상황을 모두 지켜봤다.
상황을 주도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그의 얼굴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슬슬 발톱이 나오는구나.”
서청수 회장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띤 채 자리를 떴다.
서원웅과 대찬은 상인 대표 3명과 마주앉았다.
일단 순순히 서원웅을 따라오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성질이 가장 급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눈 가리고 아웅 할 생각은 마쇼. 그런 얄팍한 속셈에 넘어갈 우리가 아니니까.”
서원웅은 정제된 어투로 말했다.
“저희도 최대한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자 급한 성질의 남자가 탁자를 쾅 내리쳤다.
“사업을 백지화하라니까요!”
“그럴 순 없습니다.”
서원웅의 단호한 태도에 남자의 성질이 더 급해졌다.
“이건 우리의 생계가 걸린 일이야! 그쪽이 그렇게 떼를 쓴다고 우리가 그냥 물러설 거 같아?”
“똑같은 말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뭐야?”
“저희도 저희의 생계를 필드 업에 걸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떼를 쓴다고 해도 저희 역시 그냥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서원웅은 전례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입에 거품 물고 백지화만 외치실 거면 계속 그렇게 하십시오. 선생님은 아무것도 얻어 가실 수 없을 겁니다.”
“윽…….”
서원웅은 사업 백지화 요구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단호했다.
그는 백지화 요구는 협상에 임할 성의 자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서원웅이 명백히 선을 긋자 대찬이 나섰다.
대찬은 가방끈이 가장 긴 상인에게 말했다.
상인들이 웅성거리며 대표자를 뽑을 때, ‘저이가 고원대 나왔잖아’ 하는 소리를 들었던 참이었다.
대찬은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구, 고원대 나오셨다고요.”
“에?”
“저도 고원대 나왔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선배님을 다 뵙습니다.”
“아, 그, 그래요?”
가방끈이 긴 남자는 엉겁결에 대찬의 손을 잡았다.
대찬이 웃으면서 다른 손으로 남자의 손을 덮었다.
“자리가 좀 뭣하긴 하지만, 선배님이라고 하시니 반가운 마음은 똑같네요.”
“허, 허허, 나도 뭐 후배님 만나니 기분이 좋네요.”
“여기까지 찾아오신 선배님 고충이야 오죽하시겠습니까.”
“으음…….”
“그래도 선배님도 저도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 방안을 궁리해야죠.”
“그, 그렇기야…….”
“백지화는 아무래도 어려운 거, 선배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으, 으응…….”
자꾸 선배님, 선배님 하며 친한 척을 해대니 가방끈 긴 남자는 매몰차게 대찬을 떨쳐내지 못했다.
“여기 서 전무님도 고원대 나왔어요. 같은 고원대 출신끼리 야박하게 하겠습니까. 저희도 최선을 다할 테니 선배님도 백지화 요구만큼은 거둬주십시오. 그게 합리적이잖습니까.”
“…그렇지.”
일단 사업 전면 백지화 요구는 거둬들여졌다.
이제는 실제적인 보상방안을 논의하면 되었다.
기실 까놓고 말해서 기업 입장에서 보상방안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보상’이라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게 그들의 입장.
하지만 이대로 상인들의 주장을 무시하면 지역 정가가 들끓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정치세력의 협조를 얻어야 가능한 사업이었다.
그러니 내키지 않아도 보상이라는 낱말을 발음해야만 했다.
상인들에게는 상인들의 입장이 있었다.
그들은 필드 업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한다고 판단했고, 필래에 절실한 정치세력을 압박하여 사업을 무산시키고자 했다.
필래는 자본주의 사회의 정당한 논리로, 상인들은 민주주의 사회의 합법적인 위력으로 맞섰다.
강 대 강의 치킨게임으로 치달으면 필래와 상인들 양측에 모두 손해였다.
필래 역시 얼마간의 적절한 보상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급한 성질의 남자를 잠시 무마시키고, 가방끈 긴 남자를 선후배의 정으로 진정시킨 대찬과 서원웅은 다음 타깃인 가장 고령인 상인에게로 옮겨갔다.
서원웅이 대찬을 보며 뻔히 다 아는 걸 굳이 물었다.
“조 차장, 상인분들 지원할 방안은 충분히 논의하고 있나?”
“네, 전무님.”
대찬은 간단히 대답하고 고령의 상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 혹시 손주분이 계십니까?”
“응? 어… 있지. 손자 하나, 손녀 하나.”
“학교 다니죠?”
“으응…….”
그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대찬은 고액예금자와 상담하는 은행원처럼 친절하게 말했다.
“저희가 이번에 지역상인들의 학생 자녀를 위한 장학금을 지급하려고 합니다. 선생님의 손자, 손녀분도 대상이 되겠네요.”
“…그래?”
대찬은 고개를 끄덕이곤 급한 성질의 남자를 바라봤다.
“선생님께서도 자녀가 있으신가요?”
“…있어요.”
“그럼 선생님도 저희 회사에서 제공하는 장학금과 학용품 지원, 그리고 각종 장학 프로그램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어, 얼만데요?”
“정확한 액수는 더 논의를 해봐야겠습니다만, 최대 2천만 원까지 지원할 생각입니다.”
대찬은 ‘최대’라는 말은 가급적 빨리 발음했다.
상인 대표들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지자 서원웅이 대찬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주변 도로를 정비하는 데 기꺼이 자금을 기탁할 것이고, 저희 필드 업의 매장에 입점할 의사를 가지신 분은 우선적으로 고려하겠습니다. 기타 방안도 상인 여러분과 추가적으로 논의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으음…….”
대찬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회사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물러나시고 차후 논의를 이어가시죠.”
“그, 그럴까?”
“예. 다음에는 머리띠하고 북만 좀 어떻게 해주시면… 하하, 다음 논의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 하면서 해보시죠.”
“나는 파전에 막걸리가 좋은데.”
고령의 상인에게 대찬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파전에 막걸리, 좋죠. 벌써 침 나옵니다.”
분위기는 어느새 부드러워졌다.
대찬은 그들을 사옥 밖까지 깍듯이 배웅했다.
그렇게 상인들은 각자의 생업이 이어지는 곳으로 흩어졌다.
대찬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요령이 없으신 분들이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쇠도 뜨거울 때 치라고 했다.
그들이 최대의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는 오늘뿐이었다.
이렇게 하나로 뭉쳐 거센 기세로 필래그룹의 사옥을 뚫고 들어왔을 때,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했어야만 했다.
이제부터 협상은 지지부진할 것이고, 필래그룹은 상인들을 각개격파할 것이다.
결속의 접착력은 점점 떨어지고, 지친 상인들은 필래의 제안에 사인할 수밖에 없을 터.
기세가 올랐을 때 밀어붙여야 한다는 건 굳이 옛날의 고사를 들먹일 것도 없이, 신군부에 맞서 맥없이 해산했던 80년의 서울역 회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상인들을 배웅하고 다시 사옥으로 들어오는 대찬에게 서원웅이 말했다.
“이걸로 대충 해결은 됐겠지?”
“급한 불은 껐지만 안심하긴 일러요.”
“…그래?”
서원웅은 내심 자신이 보여준 담력과 박력으로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대찬이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니 다시 긴장의 끈을 조였다.
대찬은 하도 굽실거리느라 뻐근한 허리를 짚으며 말했다.
“저분들은 아마추어예요.”
“아마추어?”
“그냥 진짜 필드 업 때문에 생계가 걱정돼서 오신 분들이에요.”
“그럼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단 말이야?”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분들의 조직력이야 모래알이지만, 무슨 협회 무슨 협회 하는 곳에서는 쉽게 물러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사실 그쪽이 훨씬 무서운 상대죠.”
대찬의 첫 번째 삶, 대외협력팀의 직원으로 이런 이들을 숱하게 상대했다.
이런 이들과의 협상에서 명분이나 논리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결국 그들의 입맛을 만족시킬 정도의 보상만이 그들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
요구의 정도가 너무 높다면 결국 회사 측에서도 여러 가지 압박수단을 고려한다.
그러면 협상에서 남는 건 당근과 채찍뿐.
필래 쪽에서는 충분한 당근을 준비했지만, 그게 그들의 입맛에 맞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쪽의 자비심만을 기대하고 있을 순 없죠. 이쪽에서도 가동할 수 있는 채널은 모두 가동해야 해요.”
“응. 그룹 CR팀도 열심히 움직이는 거 같더라.”
“저도 비선 CR팀으로 할 일은 해야겠어요.”
“비선이라니.”
대찬은 서원웅에게 웃음을 보였다.
심형수는 지역의 유지였다.
그냥 유지도 아니고, 시의원을 역임하고 각종 단체의 전·현직 장이었다.
그가 대찬을 위해, 필래를 위해 움직여준다면 더없이 든든했다.
최소한 하남시 경계 안에서는 그랬다.
확 기부해버릴까 보다, 충동적으로 말하던 심형수를 대찬이 만류한 것도 그랬다.
온통 시커먼 속내는 아니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가 하남시 안에서 필래의 민원을 들어줄 존재로 남아있기를 바라는 속셈이 있었다.
그 돈을 다 기부해버리면 심형수는 그저 옛날의 명성만 남은 껍데기에 불과하니까.
대찬은 주말에 심형수를 만나러 갔다.
목적이 분명한 방문이었다.
그즈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심형수는 묘한 웃음으로 그를 반겼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이놈아, 내가 네놈 시커먼 속내를 모를까봐?”
“아직 아무 말씀도 안 드렸는데요.”
“네놈 덜 떨어진 웃음에서 시커먼 국물이 뚝뚝 떨어진다, 이놈아.”
대찬은 웃음을 머금었다.
“힘 좀 보태주시죠.”
“이젠 숫제 당당하게 나오고?”
“필드 업의 입점이 모든 상인들께 이익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오히려 지역상권에 보탬이 될 겁니다. 유동인구가…….”
“에잇, 시끄러워! 설교하려고 여기 왔어?”
“자꾸 저를 사탄 취급 하시니까 억울해서 말이 많아지는 거 아닙니까.”
심형수는 아래턱을 삐죽 내밀었다.
“사탄은 사탄이지. 착한 척은 있는 대로 하면서 간교하고…….”
“제가 어르신 때문에 갖은 모욕을 다 참았는데, 어르신까지 이러시깁니까?”
“알았어. 그냥 용건만 얼른 끝내고 설렁탕이나 먹으러 가자고. 내가 힘 좀 써달라는 거지?”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히 상인조합이나 소상공인 협회의 수뇌부가 지역 정치인들을 압박할 겁니다.”
“그래, 뻔한 수순이지.”
“그분들의 정당한 위력행사를 비난할 뜻은 없지만, 저희도 거기에 대한 방패는 세워둬야 하니까요.”
“그 방패로 생각해둔 게 나고?”
“네. 인망이 두터우시니 크고 두꺼운 방패가 되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심형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할 생각은 없어. 그쪽 필래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웅얼대지는 않을 거란 말이야.”
“저희도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적인 타협이 가능하게끔 해주시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좋아, 그렇게 하지. 입은 은혜가 있으니. 난 또 빚지고 못 사는 성격이시거든.”
“호연지기가 남다르십니다.”
심형수는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렁탕이나 먹으러 가자고.”
“네. 차로 모시겠습니다.”
“요새 숙자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안 와서 외식이 잦아졌어.”
대찬과 심형수는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 헤어졌다.
설렁탕 한 그릇의 위력은 대단했다.
상인조합과 소상공인협회는 지역 정가에 조직된 압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도의원이니 시의원이니 하는 사람들은 겉으로 그들을 달래면서도 정작 그들의 비원을 행동으로 옮겨주지는 않았다.
심형수의 속닥거림이 그들의 압력을 상쇄하는 까닭이었다.
거기에 필래그룹 CR팀 전력의 상당부분이 하남에서 상주하다시피 한 것도 보탬이 되었다.
결국 필래그룹은 예상한 범위 내에서의 출혈만으로 필드 업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시공을 맡은 필래건설의 로고가 그려진 건축시트가 드넓은 필드 업 부지를 성곽처럼 둘러쌌다.
이동수 부사장은 굳이 주요 임직원을 대동하고 건설현장을 시찰했다.
소식을 들은 옥문영 상무는 오만상을 찡그렸다.
“늙어서 주책이야, 주책. 가서 뒷짐 지고 손가락질 하는 사진 찍어오려고 그러지.”
그런 옥문영 상무를 보고 대찬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시면서 선글라스는 왜 챙기시는데요?”
“햇볕 따가워서 그런다, 햇볕!”
“그럼 햇볕 따가우니까 저도…….”
대찬도 웃으면서 서랍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눈치를 설설 살피던 송희근 과장도 슬그머니 서랍에서 선글라스를 꼈다.
그걸 본 옥문영 상무가 한마디 쏘아댔다.
“송 과장은 선글라스 왜 챙겨?”
“예? 저도 건설현장에…….”
“송 과장은 명단에 없는데? 남아서 일이나 해.”
“예? 어, 어째서……!”
송희근 과장이 당황하자 허운이 웃으면서 굳이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주요 임직원 시찰이잖아요. 과장님은 주. 요. 임직원이 아니라서 못 가시는 거죠, 뭐.”
“…….”
송희근 과장의 얼굴이 푹 익은 무처럼 힘이 쭉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