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08화
비즈니스적으로 부적절했고, 인간적으로도 부적절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자네 표정관리하느라 애 많이 쓰는구만. 좋아해도 돼.”
“제 입장에서야 기쁘지만, 마냥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럼 도로 물려?”
심형수가 픽 웃으면서 위세를 부리니 대찬은 멋쩍게 웃었다.
“아, 아닙니다…….”
“나도 제대로 된 대리인 세워서 10원 한 푼 아쉽지 않게 받아낼 거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말고.”
“저희야말로 바라는 바입니다. 섭섭지 않게 대우해드리겠습니다.”
심형수는 두통이 오르는지 도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땅 판 돈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확 기부나 해버려?”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만, 일단 쥐고 계시죠.”
“쥐고 있으라고?”
대찬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돈을 갖고 계셔야 손자가 함부로 못하죠. 정말 뉘우치고 어르신 잘 모시기 전까지는 절대 재산 처분하지 마세요.”
“에휴…….”
“너무 걱정 마십시오. 어르신 귀한 피를 물려받았는데 그렇게 내내 삐딱하기만 하겠습니까.”
심형수는 대찬을 흘끗 보고 웃었다.
“암튼 남 똥구멍 긁는 데는 선수구만.”
“사실만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알았어. 자네 말이 다 옳아. 자네 말대로 다 따를 테니 이만 돌아가봐. 자네도 많이 피곤할 텐데.”
대찬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있었더니 다리가 저렸다.
대찬은 허벅지를 주무르며 말을 덧붙였다.
“아, 어르신,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는데.”
“조 차장 입은 지치지도 않네. 해봐.”
“기왕 재산을 기부할까 생각도 하셨으니.”
“응.”
“저기 여사님께 통 크게 재산을 떼어주시는 건 어떠실지.”
“뭐?”
그 말에 심형수뿐만 아니라 슬쩍 얘기를 엿듣고 있던 가사도우미의 눈도 커졌다.
심형수는 바깥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숙자! 혹시 조 차장한테 뽀찌 찔러줬는가?”
“아이고, 그럴 리가요!”
대찬은 그제야 가사도우미의 이름이 숙자인 걸 알았다.
심형수가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갑자기 숙자는 왜 챙기고 나서?”
“이번 일, 여사님 아니었으면 실마리도 못 잡았을 테니까요. 논공행상은 당연하죠.”
“으음…….”
“그리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30년 근속이면 기실 가족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렇기야 하지.”
“어르신이 어련히 잘 챙기시겠지만, 그래도 겸사겸사 말씀 올렸습니다.”
심형수는 대찬을 빤히 바라봤다.
대찬은 혹 주제넘은 소리를 한 건 아닐까, 이것 때문에 잘된 결정을 엎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기우였다.
심형수는 순간 병자의 칙칙한 낯빛을 지우고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이놈의 여우새끼! 날 다루는 방법을 교묘하게 간파해냈네!”
“예? 어르신을 다루는 방법이라뇨?”
심형수는 흐흐 남은 웃음을 마저 웃고 말했다.
“내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게 누구겠어? 못난 손주 놈이겠어, 아님 내 돈 보고 달려드는 쉬파리 같은 놈들이겠어?”
“아…….”
“저 양숙자 하나만 나를 손바닥 위에서 갖고 논단 말이야. 이제 보니 뽀찌를 찔러준 건 숙자가 아니라 조 차장이었네!”
대찬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런 속물적인 판단으로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뭐, 그럼 자네는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속물인 게지.”
“너무하십니다, 어르신.”
심형수는 씩 웃음을 지으며 가사도우미 양숙자에게 말했다.
“그래, 조 차장 말이 맞아. 내가 지금껏 숙자한테 무심했지. 월 200 꼬박꼬박 통장에 넣어준 게 다니까.”
“아유, 됐어요, 어르신. 다 늙은 년이 어디 가서 200씩 받겠어요. 그거면 됐어요.”
심형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자네도 즐길 거 즐기면서 살아야지. 조 차장은 골치 아프게 됐어.”
“예?”
“자네 회사가 상대해야 될 땅 주인이 2명으로 늘었으니까.”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거 자충수였군요.”
“그래! 이번에 파는 토지 지분의 3분의 1은 숙자한테 넘길 거야.”
그 말에 양숙자는 입을 가리며 놀랐다.
“어르신!”
“조 차장은 앞으로 나한테만 알랑방귀 뀔 게 아니라 숙자한테도 열심히 손바닥 비벼야 할 거야.”
대찬은 양숙자를 바라봤다.
“여사님, 잘 부탁합니다.”
“아이고야…….”
양숙자는 감당 못할 보상에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고야, 아이고야만 연발했다.
대찬은 모든 소임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다.
필래마트는 필드 업을 건축할 부지를 확보했다.
심원철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혹독하게 야단을 맞았다.
조부로부터의 모든 금전적 지원은 차단되었다.
망나니처럼 살면 동전 한 닢 물려주지 않는다는 엄포가 따랐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건실한 삶을 꾸려가야만 했다.
심원철을 뒤에서 부채질한 이미혜에게는 더 혹독한 대가가 따랐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심형수는 심원철에 대한 민사소송은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혜에 대한 민·형사소송은 취하하지 않았다.
이미혜는 울고 불며 심형수에게 싹싹 빌었다.
하지만 노인의 고집은 완고했다.
천 년을 갈 것 같던 둘의 사랑은 종언을 고했다.
재물에 좌우되는 사랑이었으니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양숙자는 심형수로부터 넘겨받은 토지를 필래마트에 매각하여 거액을 챙겼다.
심형수는 양숙자를 해고했다.
양숙자는 무급으로 일주일에 한 번 심형수의 자택을 방문하기로 하고, 일주일의 6일은 잘난 여자로 살기로 했다.
대찬은 서울의 필래그룹 사옥으로 금의환향했다.
옥문영 상무는 그를 보자마자 솥뚜껑 같은 손바닥으로 박수를 쳤다.
“역시, 조 차장이 제대로 해낼 줄 알았다니까.”
“소 뒷걸음질로 쥐 잡은 격이에요. 우연찮게 실마리가 잡혀서요.”
“뒷걸음이든 앞걸음이든 쥐 잡은 게 용한 거지.”
등소평이 주창한 흑묘백묘론에 이은 옥문영 상무의 뒷걸음앞걸음론이었다.
한태윤 과장도 웃으면서 말했다.
“조 차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 영감님, 적잖이 꼿꼿하시던데 어떻게 잘 풀어내셨네요.”
“우리 꼿꼿한 한 과장님하고 지내다보니 꼿꼿하신 분은 제가 또 잘 다루게 됐네요.”
“하하…….”
대찬도 실없는 웃음으로 장단을 맞춰주고, 옥문영 상무에게 말했다.
“이걸로 필드 업이 여기까지는 순항한 거겠죠?”
“응. 문제가 아주 없진 않지만, 일단 조 차장 덕분에 한숨 돌렸어.”
그렇게 환담을 나누고 있는데, 김산호가 사무실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그걸 보고 송희근 과장이 한마디 쏘아붙였다.
“사무실에서 정숙, 정숙 좀 합시다! 김산호 대리님!”
“아, 죄송합니다. 급하게 소식 좀 전하려다가…….”
“급하게? 뭘?”
김산호는 송희근 과장에게 한 번, 대찬에게 한 번, 마지막으로 옥문영 상무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래층에서 소란이 좀 벌어져서요.”
“소란? 무슨 소란?”
옥문영 상무가 묻자 김산호가 대답했다.
“하남에 필드 업 짓는 것 때문에 주변 지역상인들이 단체로 몰려왔어요.”
“그래. 그 양반들이야 발끈할 만하지.”
김산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근데 지금 보통 상황이 아닌 게, 서원웅 전무님이 완전히 포위됐어요.”
그 말에 전략기획실이 발칵 뒤집혔다.
웬만하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한태윤 과장과 홍은주도 순간 어깨가 움찔할 정도였다.
대찬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옥문영 상무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뭐? 서 전무님을? 가드들은 뭐 하는 거야!”
“그게, 워낙 우르르 몰려오는 통에 감당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가볼게.”
옥문영 상무는 술이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따러 가는 관운장의 위용으로 사옥 1층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머리띠를 질끈 동여맨 하남 지역의 상인들이 피켓을 들고 목청 높여 외쳤다.
“필래 땜에 등골 휜다! 필드 업 엎어라!”
“등골 휜다! 엎어라!”
“필래 땜에 등골 휜다! 필드 업 엎어라!”
“등골 휜다! 엎어라! 엎어라! 엎어라!”
상인들은 북을 치고 주먹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필래그룹 사옥에 그들의 외침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김산호의 전언대로 그들은 서원웅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몇 안 되는 사옥의 경비인력은 결사항전하는 상인들을 쉽게 몰아내지 못했다.
서원웅의 왜소한 덩치가 인파에 둘러싸여 더 왜소하게 보였다.
옥문영 상무는 벌써 씩씩거리며 아래로 내렸다.
대찬은 그 판에 직접 끼어들지 않았다.
2층에서 현장을 내려다봤다.
경비인력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들 중 최선임이 바쁘게 지시를 내렸다.
“빨리 해산시켜! 서원웅 전무님 안 다치시게! 경찰 부르고!”
보안요원들은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이런 쪽에 전문가였지만,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했다.
하남지역 상인들은 작정이라도 한 듯 머릿수가 엄청났다.
이례적인 일에 보안요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찬이 그들의 뒤를 살피니 카메라를 든 기자들이 있었다.
‘아, 강제진압은 모양새가 안 좋은데.’
대찬이 줄기차게 외쳤던 윤리경영은 이럴 때 맹점을 드러냈다.
입으로 윤리경영을 실컷 외치던 필래그룹이 경비인력을 동원해 상인들을 강제로 해산시킨다?
이것보다 좋은 기자들의 먹잇감은 없었다.
보안요원 중에는 필래에 직접 고용된 마강국도 있었다.
그는 우악스러운 손아귀로 상인들을 강제로 해산하려고 했다.
‘안 좋아.’
대찬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데 그때 서원웅이 뒤를 돌아 마강국을 포함한 보안요원들을 바라봤다.
“잠깐, 이분들한테 손대지 마세요.”
“저, 전무님!”
서원웅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손대지 마세요. 뒤로 물러나세요, 괜찮으니까.”
당사자가 접근하지 말라니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난간을 붙들고 아래를 내려다보던 대찬의 동공도 살짝 커졌다.
보안요원 사이를 헤치고 서원웅에게 향하던 옥문영 상무도 어김없이 단호한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상무님, 괜찮습니다.”
뜻밖의 조치에 들불처럼 타오르던 상인들의 기세도 잠깐 멈칫했다.
서원웅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상인 여러분의 고충과 요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 역시 저희의 책임을 최선을 다해 이행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지 마! 내가 너희 수법을 모를 줄 알아!”
개중 한 사람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자, 나머지 상인들도 일제히 아우성을 쳤다.
한 몸에 쏟아지는 비난을 듣고도 서원웅은 동요하지 않았다.
정제된 목소리로 계속 제 할 말을 했다.
“이미 상당부분 진행된 사업을 전면 백지화할 수 없다는 걸 여러분도 모르지 않으실 겁니다. 현실적인 방안을 논의하고 싶습니다.”
“백지화를 왜 못해! 상인들 생계를 걱정한다면 까짓것 백지화를 왜 못하냐고!”
서원웅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가 필래마트 대표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 책임과 권한을 지닌 임원으로서 여러분의 대표와 교섭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
“여러분 중 대표 3인을 뽑아 제 사무실로 오십시오. 여러분의 말씀을 충분히 경청하고, 합리적인 보상안을 도출하겠습니다.”
서원웅은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 보안요원들에게 말했다.
“물러나세요. 이분들 막지 마세요.”
“하지만 전무님…….”
서원웅의 당부에도 마강국이 주춤거리자 서원웅이 웃으면서 눈짓을 했다.
“괜찮아. 물러나있어.”
“…알겠습니다.”
대찬은 서원웅의 조치가 놀라웠다.
자신이 이전에 알던 서원웅이라면 어쩔 줄 몰라 하며 경호인력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단독으로 상황을 조율하고 주도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저놈들 쫓아내라고 경호인력을 닦달했을 텐데, 도리어 그들을 제어했다.
반란 내지 혁명은 항상 압제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다.
용수철처럼 누르는 힘이 있어야 튀어 오른다.
누르는 힘이 없으면 맥이 빠지고 명분이 안 선다.
서원웅은 저들에게 명분을 주지 않았다.
마강국을 위시한 보안요원들은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필래그룹 사옥에 불이라도 지를 기세였던 상인들도 난동을 부리기에 민망해졌다.
뒤에서 플래시를 터트리던 기자들도 김샜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상인들은 서원웅의 요구를 따랐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
가장 성질이 더러운 사람.
가장 가방끈이 긴 사람.
그렇게 세 사람이 대표로 뽑혔다.
그 사람들은 서원웅의 안내를 받아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서원웅은 그러면서 대찬을 올려다보고 손짓을 했다.
“응?”
‘같이 들어오라고.’
서원웅은 입모양으로만 말했고, 그것만으로도 대찬은 알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