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07화
주소를 찾아가니 볕 잘 드는 테라스가 있는 카페였다.
심원철은 이미혜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선글라스도 멋들어지게 낀 채로.
대찬은 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갔다.
“심원철 씨.”
대찬의 부름에 심원철의 표정이 단박에 구겨졌다.
“너 나 좋아하냐?”
“그럴 리가요.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심원철 씨 같은 사람을 좋아하겠어요.”
“아 씨, 진짜 재수 없게. 근데 왜 말 걸고 난리야? 가던 길 가.”
이미혜 역시 대찬에게 적대적인 시선을 보냈다.
대찬은 멋대로 의자를 빼서 앉고는 다리를 꼬았다.
“할아버님 병구완은 못 해드릴망정 이건 아니죠.”
“내가 뭘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꺼져.”
“상관이 왜 없어요. 심원철 씨 덕분에 업무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졌는데.”
“뭐라는 거야, 이 새끼.”
“심원철 씨가 멋대로 할아버지 소유 토지랑 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그쪽하고 여기 이미혜 씨한테 이전해놨죠?”
심원철은 기가 막힌 듯 선글라스를 벗어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나 우리 할아버지 대리인이야. 할아버지가 모든 권리를 나한테 이전하셨다고. 대리인이 알아서 처리했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주인이 어르신인데 일언반구 상의 없이 이러는 건 아니죠.”
그러자 이미혜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듣자듣자 하니까 기가 막혀서……. 당신이 뭔데 훼방이야?”
“그쪽도 떡고물 좀 만질 기회라서 화나는 건 알겠는데요,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아니든 말든 당신이…….”
“어르신 천수 누리시면 다 그쪽들한테 넘어갈 텐데, 뭐가 그렇게 급했어요?”
이미혜는 짜증이 극에 달했는지 앉은 채로 발을 동동 굴렀다.
“아으, 진짜! 근데 네가 뭔 상관이냐고!”
“네, 두 분 참 잘 어울리십니다. 심원철 씨, 기회를 드릴게요.”
“기회? 뭔 기회? 네가 뭔데 기회를 준다, 만다야?”
대찬은 짐짓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원상복구 해놓으세요. 그럼 저도 더 말 안 하겠습니다.”
“네가 부동산 주인이야? 아님 우리 할아버지 대리인이야? 변호사야? 차장 나부랭이가 어디서 해라, 마라야!”
“할아버지가 알게 되시면 충격이 크실 거예요. 그 전에 되돌려놓자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미혜가 심원철의 손을 턱 잡았다.
“오빠, 더 상대해주지 마. 그냥 일어나자.”
“아오, 진짜 저거 팰 수도 없고.”
“됐어. 그냥 가.”
둘은 일어나서 차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대찬이 앉은 채로 그들을 돌아봤다.
“진짜 원상복구 안 할 거예요?”
“어, 안 해. 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저 땅 절반이 내 거인 거 알지? 허튼짓하면 너희한테 절대 안 팔 거니까.”
“허튼짓 안 하면 파실 거고요?”
심원철은 선글라스를 다시 끼며 대찬을 보고 픽 웃었다.
“내 가랑이 기어서 왕복 50번 하면 생각해보고.”
“내가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다리가 많이 짧으셔서.”
“미친 새끼.”
심원철은 침을 탁 뱉고 갈 길을 갔다.
혼자 남은 대찬은 햇볕 쨍한 하늘을 살짝 올려다보다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법무팀장님. 많이 바쁘신가요?”
“내가 아무리 바빠봐야 조 차장만 하겠어요?”
“하하, 무슨 말씀을……. 저 몇 가지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
대찬은 제법 품을 들여 법무팀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전화를 끊은 대찬의 얼굴에는 결의가 비쳤다.
대찬은 심형수를 찾아갔다.
그의 건강을 생각해 심원철과 적당히 결론을 내려고 했지만, 저렇듯 비협조적이니 어쩔 수 없었다.
대찬을 본 심형수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떴다.
“여태 안 갔어?”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왜, 또 일 얘기 안 하고 빈손으로 가려니 억울하던가?”
“그런 건 아니고요.”
심형수는 미지근한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말했다.
“그럼 왜 여태 비비고 있어?”
“어르신, 제가 좀 충격적인 일을 말씀드리려고 하는데요.”
“뭐? 충격?”
“네. 근데 다 잘 해결될 수 있으니까, 지레 노하셔서 건강 더 상하지 않게 하세요.”
“…알았어. 해봐.”
대찬은 차근차근 신중하게 단어를 선택하며 심형수에게 설명했다.
다 잘 해결될 수 있다는 전제가 없었다면 심형수는 혈압이 올라 그 자리에서 쓰러졌을 것이다.
그의 눈에 실핏줄이 번졌다.
“이, 이 천하의 막돼먹은 놈이……!”
“회사 법무팀에 문의하니 대리인 신분이고, 또 어르신 인감을 도용했다 하더라도 민사 소송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고얀, 고얀 놈이 어차피 나 죽으면 다 자기 게 될 텐데 이런 고얀 짓을 해……!”
대찬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손주께서 당장의 즐거움에 눈이 멀었나 봅니다. 환수하시고 따끔하게 혼을 내시죠.”
심형수의 눈두덩에 눈물이 어른어른 고였다.
“내가 저를 어찌 길렀는데, 내가 저를……. 불편한 거 하나 없이, 남 눈치 볼 거 하나 없이 그렇게 키웠는데…….”
그를 가까이서 보는 대찬의 마음도 불편했다.
대찬은 심형수의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을 꼭 붙잡았다.
“누구에게나 한때의 방황은 있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잘 단속하시면 심원철 씨도 반성하고 개심할 겁니다.”
“나중에 개심해도 지금 괘씸한 걸 어떡하느냔 말이야. 어떻게 나한테 이래, 응? 나한테만 유일한 피붙이가 아니잖아. 걔한테도 내가 유일한 피붙이야.”
“마음 굳게 잡수십시오. 따끔하게 가르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르신부터 강해지셔야죠.”
그 말에 심형수는 입술을 악물었다.
“그럼, 그렇고말고. 내가 단단히 혼쭐을 내줄 거야. 어딜, 어딜……. 크흠!”
“네. 저도 도울 수 있는 부분은 힘써 돕겠습니다.”
심형수는 대찬을 흘끗 봤다.
“이봐, 차장 양반.”
“네, 어르신.”
“내 부탁 하나 함세.”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시죠.”
“내 나중에 삯은 섭섭지 않게 치를 테니 나 대신 소송 준비 좀 도와줘.”
“네, 그러겠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워낙 쟁쟁하신 분들이 많지 않습니까?”
심형수는 타구에 카악, 가래침을 뱉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놈들이 얼마나 남 뒷공론하기를 좋아하는 줄 알아? 내가 손주를 고소한다고 하면 그치들이 신이 나서 얼마나 떠들어대겠어?”
“…그렇군요.”
심형수는 라이온스클럽이며 뭐며 이런저런 단체의 늙은 우두머리 수사자로 군림했다.
늙은 우두머리 수사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체면과 권위.
한번 치부를 들키면 무수한 도전과 반항이 따른다.
결국 그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끌어 모은 인망과 인맥은 단순한 자위행위였을 뿐, 유사시의 자위수단은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 비밀리에 그의 상처를 치료해줄 유일한 구세주는 대찬뿐이었다.
이는 대찬에게도 기회였다.
기회를 단순한 인정으로 날려버릴 정도로 대찬의 아량이 좋지 못했다.
“그럼 저희 법무팀에서 움직여도 괜찮겠습니까?”
“…으음, 그래주면 고맙겠군.”
필래마트의 법무팀이 개입하는 순간 이는 회사의 업무가 된다.
대찬이 단순한 호의를 베풀었다면 심형수는 조대찬 개인에게 빚을 진 셈이지만, 필래마트 법무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때부터는 필래마트 법인에게 빚을 지게 된다.
그 간단한 이치를 심형수가 모를 리 없었다.
이에 속 끓는 신음을 내면서도 심형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법정까지 가지 않고 공포탄만으로도 심원철 씨가 굴복할 겁니다.”
“…….”
대찬의 예상은 적중했다.
애초에 심원철이 구상한 방법은 얼치기 법학도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얼치기는 다름 아닌 연인인 이미혜였다.
필래마트는 세상을 허술하게 아는 얼치기 커플에게 인생은 실전이란 걸 일러주었다.
이때부터 대찬이 할 일이라곤 심형수의 옆에 꼭 붙어있는 것이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한량없는 헌신과 정성을 보여주는 것뿐이었다.
그럼으로써 심형수가 자신과 필래마트의 은혜를 잊지 않게 했다.
법무팀장은 법조인 특유의 메마르고 사무적인 톤으로 심원철에게 민사소송을 걸 것이라고 전달했다.
심원철은 이미혜로부터 들은 빈약한 법률지식으로 항변했다.
내가 대리인이다.
할아버지의 인감도장을 통해 다 합법적으로 처리된 일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대지 말고 빠져라!
그 처절한 반박은 법무팀장의 간단한 몇 마디로 제압되었다.
“누구한테 그런 당나라 법률을 배웠습니까?”
“…내 애인이 지금 법대 4학년이야!”
“아, 그러세요. 6학년까지 다니셔야겠네. 아는 변호사한테 몇 마디만 물어보고 오세요.”
법무팀장은 그렇게 말하고 뚝 전화를 끊었다.
심원철이 네발로 기어 할아버지 앞에 대령한 건 그로부터 딱 2시간 후였다.
자신이 무단으로 증여한 몫은 이미 취소하겠다고 한 상태였다.
심원철은 심형수의 앞에 철퍼덕 엎드렸다.
“하, 할아버지…….”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마! 이 썩을 놈의 새끼.”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라. 더 해줄 말 없어. 당장 나가!”
“…….”
심원철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심형수의 손자로 30년 넘게 살아온 결과, 이 분노는 어떤 말과 행동으로도 잠재울 수 없는 대노였다.
심원철은 으득,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시선이 심형수의 옆에서 얄미운 표정을 짓고 있는 대찬으로 향했다.
대찬의 얼굴은 평온 그 자체였는데, 그게 심원철의 눈에는 얄밉기 짝이 없었다.
심형수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았으니, 이제 그의 혀는 만만한 대찬을 향했다.
“할아버지, 지금 저 밑도 끝도 없이 찾아온 놈에게 휘둘리고 계신 거예요.”
“뭐야?”
“저놈 속내야 시커먼 거 다 아시잖아요. 땅 사러 온 거잖아요. 손주 말은 하나도 안 들으시고 저 자식 말은 들어주시는 건 아니죠.”
하지만 그건 심원철의 오판이었다.
심형수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손에 잡히는 물건부터 그에게 던졌다.
심원철에겐 불행하게도 재떨이였다.
“이 천하의 불효막심한 놈아!”
“악!”
크리스털 재떨이가 심원철의 이마에 적중했다.
둔중한 충격에 심원철은 반사적으로 이마를 싸쥐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마, 이놈아! 조 차장 속이 시커멓다고?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네놈이 그런 말 할 자격이 되냐, 이놈아!”
“할아버지…….”
“저놈 속이 새카말지는 몰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어르신, 어르신 한다. 이번에도 귀찮은 뒤치다꺼리 다 해줬다고, 이놈아.”
“…….”
“근데 네놈은 겉도 까맣고 속도 까마니 누가 누굴 욕하는 거야?”
“…….”
심원철은 유구무언이었다.
심형수는 손자의 얼굴을 보면 볼수록 열이 올라서 휙 돌아앉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나가!”
심원철은 오만상을 지으며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가사도우미는 그런 심원철의 뒷모습을 보면서 깨소금 맛이라는 듯 입을 가리고 큭큭 웃었다.
심원철은 종로에서 뺨 맞고 청량리에서 화풀이했다.
“아줌마, 웃겨요?”
“그럼 안 웃기니? 넌 좀 더 혼나야 돼, 새꺄.”
완전히 몰락한 심원철을 가사도우미가 두려워할 까닭이 없었다.
“에이, 썅!”
심원철도 받아칠 말이 없어 애꿎은 쓰레기통만 걷어차고 물러났다.
가사도우미는 웃음소리를 더 높여 부러 심원철의 속을 뒤집어놨다.
심형수는 심원철이 돌아간 자리를 쏘아보며 에잉, 에잉, 앓는 소리를 냈다.
“저놈은 내가 아주 물고를 낼 거야! 조 차장, 나 절대 소 취하 안 할 거니까 그런 줄 알라고.”
“형사처벌은 불가하다고 들었습니다. 친족상도례 때문에요.”
“친족상도례? 그게 뭐야?”
“8촌 내 혈족, 4촌 내 인척, 배우자는 형사처벌 할 수가 없다고 하네요.”
그 말에 심형수는 인상을 팍 구겼다.
“그런 개뼉다구 같은 법이 다 있담.”
“어쩌겠어요. 나라법이 그러니 따라야죠.”
“형사가 안 되면 민사로라도 조져야지.”
대찬이 차분한 어조로 심형수에게 말했다.
“꼭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있겠습니까. 이번에 심원철 씨도 반성 많이 했을 테니 이쯤에서 관두시죠.”
“관두긴 뭘 관둬! 저런 놈은 쓴맛 한번 제대로 봐야 해! 내 손주 새끼 홀린 고년, 고년도 콩밥을 제대로 먹여야지.”
“저야 특별히 권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르신 뜻대로 하겠습니다.”
심형수는 허공을 바라보며 히유, 허무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이런 꼴을 당하려고 여태 악착같이 돈을 긁어모았나봐.”
“너무 그러실 거 없습니다. 미운 오리새끼가 백조 될 겁니다.”
“내가 여태 자네 회사 상대로 강짜를 부린 것도, 여기 목이 좋아서 근사한 상가건물 하나 세워서 고놈 배나 채워주려는 심산이었단 말이야.”
“예. 손주 위하는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심형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아. 필래한테 넘길 테니까 필드 업인지 패대긴지 잘 지어보라고.”
대찬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