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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06화 (205/556)

난 할 수 있어 206화

하남에 도착한 대찬은 심형수의 사무실 겸 자택으로 들어갔다.

그를 맨 먼저 반긴 건 튀어 오르는 듯한 심원철의 목소리였다.

“아, 아줌마! 이상한 데다 돈 쓰지 말라니까요!”

“아니… 그래도 이게 기운 차리는 데는 기똥차다니까…….”

“기똥찬 거 아줌마 돈으로 아줌마나 실컷 사드시고요. 우리 돈 함부로 쓰지 말라고요. 알아요?”

“내, 내가 먹을라구 샀나… 다 그쪽 할아버님 위해서 그런 거지.”

“암튼! 사지 마요, 사지 마!”

“…알았어.”

“하던 대로 똥기저귀나 잘 가시라고요.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아오, 진짜!”

심원철은 그렇게 말하고 쿵쾅쿵쾅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러다 좁은 현관에서 대찬과 마주쳤다.

“아씨, 너 또 왔냐?”

“반말도 세 번째 들으니까 정겹네요. 심원철 씨 보러 온 건 아니고요. 가던 길 가세요.”

심원철은 피식 웃었다.

“땅 사보겠다고 지랄염병을 떠는 거 같은데, 해봐라. 네 맘대로 되나.”

심원철은 대찬의 어깨를 툭 밀치고 나갔다.

‘저 새끼가 진짜…….’

대찬은 입술을 꽉 물고 분을 삭였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자 심형수의 가사도우미가 반겼다.

올해로 30년째 심형수의 집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아이고, 오셨어요?”

“네. 잘 지내셨죠? 어르신이 연락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여태 말씀이 없으셔서 안부차 뵈러 왔습니다.”

“어르신이 지금 다른 분들 만날 상황이 안 되셔서요.”

“상황이 안 되시다뇨?”

대찬이 그렇게 묻는데, 방에서 심형수의 힘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왔어?”

“저번에 그 필래마트 젊은 차장님이에요.”

“아아, 그렇지. 한우만 날름 처먹고 묵묵부답이니까 혼내주러 왔구만.”

그 말에 대찬은 난감한 듯 웃었다.

“아닙니다, 어르신. 안부 여쭈러 온 거예요.”

“콜록콜록, 안으로 들어오게.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가사도우미가 대찬에게 속삭이며 귀띔했다.

“며칠 사이 기력이 많이 쇠하셨어요.”

“아, 아까 손주분이랑 말씀 나누시던 게…….”

“약도 특별히 차도가 없어서 자라라도 좀 고아드리려는데,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아니, 본인이 사다 바쳐도 모자랄 판에 그런단 말이에요?”

가사도우미는 한숨을 푹 쉬었다.

“글쎄, 내 말이.”

“아, 뭐 해? 안 들어와?”

“아, 들어갑니다, 어르신.”

대찬은 가사도우미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병자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심형수는 며칠 사이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대찬은 그가 안쓰러웠다.

“어르신, 몸은 좀 어떠십니까?”

“보이는 대로지, 뭘 또 묻나.”

“얼른 기운을 차리셔야죠.”

“아, 그렇지. 그래야 자네한테 땅을 팔지?”

대찬은 미소를 지었다.

“예. 땅도 팔고 맛있는 것도 드시고, 제가 술도 한잔 대접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에휴, 자네가 핏줄보다 낫네그려. 다분히 비즈니스적인 목적이 있겠지만 말이야.”

“처음엔 일 때문에 어르신을 뵙긴 했지만, 강건하시던 분이 갑자기 약한 말씀을 하시니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심형수는 기침 섞인 웃음을 지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본 대찬을 핏줄보다 낫다고 한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찬은 방금 전 심원철의 말을 떠올리고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

자라 1마리에 빽빽 소리를 지르는 행태가 할아버지의 눈에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심형수는 삶의 무게가 내려앉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뜨며 말했다.

“내가 땅 안 팔겠다고 강짜를 부린 것도 다 원철이 그 녀석 때문이야. 거기에 상가건물 올려서 평생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그러셨군요.”

“그런데 저 핏덩이 시절부터 여태 키워준 나를 이렇게 괄시하고, 아파 드러누우니 빨리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는 판이니…….”

“고사를 지내다뇨?”

심형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지금 드러누운 게 열흘짼데 코빼기도 안 비쳐. 웬일로 용돈 달란 소리도 안 한단 말이야.”

“…그렇군요.”

“그래. 죽어야지. 늙으면 죽어야지.”

노인이 말하는 늙으면 죽어야지.

흔히 말하는 사람들의 3대 거짓말 중 하나다.

실상은 섭섭함의 최상급 표현.

대찬 역시 심형수가 손자에게 섭섭함을 느끼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대찬은 그런 그에게 일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몸도 마음도 상처가 가득한 그에게 평당 얼마 운운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얘기가 지금의 그에게 잘 들릴 리도 만무.

대찬은 다친 심형수의 마음만 어루만졌다.

“미안하네. 일 얘기 하러 온 사람한테 넋두리만 실컷 했으니.”

“아유, 저도 지금 그런 시시콜콜한 소리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돈보다 건강이 우선이죠. 얼른 기운 차리십시오. 그래야 저도 어르신께 맘 놓고 조를 거 아닙니까.”

“허허… 고맙네.”

“또 뵈러 오겠습니다. 그때는 기운 좀 차리십시오. 그래야 제가 돈 얘기 꺼낼 체면이 되죠.”

심형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찬은 그의 앞에서 물러나오면서 심형수의 가사도우미에게 슬쩍 사비로 30만 원가량을 찔러주었다.

“이걸로 자라든 장어든 보약이든 어르신 체질에 맞게 잘 해드리세요.”

“아이구, 이런 걸 받아도 될는지.”

“얼른 기운 차리셔야 저도 돈 얘기 하러 오죠. 큰돈도 아닌데요, 뭐.”

“아이고, 고맙습니다. 우리 차장님은 사람이 됐네, 됐어.”

“부끄럽습니다. 엄청 속물적인 이유로 이러는 거예요.”

“난 사업이고 나발이고 몰라. 그냥 잘하면 잘하는 거지.”

가사도우미는 오랜만에 깔깔 웃고는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대찬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근데 말이야.”

“네?”

“요새 원철이 걔가 좀 수상해.”

“수상하다뇨?”

대찬의 귀가 쫑긋 섰다.

“그 애가 원래 이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거든? 쩐이 할아버지 주머니에서 나오니까. 속은 몰라도 겉으로는 꾸벅 고개도 잘 숙이고 그랬단 말이야.”

“네, 그런데요?”

“근데 어르신이 저렇게 몸져누우시고 한 사나흘 되었나? 그때부터 태도가 싹 변하는 거야.”

“찜찜한데요.”

“그렇지? 왜 그러는지 몰라. 게다가 내가 이것저것 어르신 얼른 나으시라고 보양식 해드리는데, 나 볼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그러데?”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우리 차장님이 좀 알아봐줘봐. 나는 이상하다는 거 말고는 모르겠으니까.”

“네. 귀띔해주셔서 감사해요. 어르신을 진심으로 생각하시는 거 같네요.”

“아유, 그럼. 30년인데? 거짓부렁도 진심으로 되는 시간이지.”

대찬은 잠깐 생각을 정리하다가 말했다.

“그, 심원철 씨랑 교제하는 여성분 있죠?”

“아, 있지.”

“어르신이 굉장히 반대하시는 거 같던데.”

가사도우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마. 여자가 좀 그래.”

“그래도 청춘들 연애사업에 간섭하시는 건 좀…….”

대찬은 은근히 뒷말을 유도했다.

“모르는 소리! 고것이 얼마나 여운데?”

“어떻게 여운데요?”

“원철이가 원래는 저 지경이 아니었는데 걔 만나고서부터 싹 변했다니까? 이간질하는 게 분명해. 물욕은 또 어찌나 심한지!”

“그래요?”

“저번에는 어르신 몰래 500만 원짜리 목걸이 사줬다가 원철이 맞아죽을 뻔했어, 어르신한테.”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해요.”

“다음번엔 연락 좀 하고 와. 어르신 드리는 김에 우리 차장님 드실 음식도 좀 해놓게.”

“말씀만으로도 이미 배부르네요.”

“빈말 아니다, 이거?”

대찬과 가사도우미는 그렇게 웃으면서 헤어졌다.

하남을 떠나는 대찬의 표정은 지난번처럼 밝지 않았다.

‘심원철이 심형수한테 굽실거리던 건 순전히 돈 때문인데, 심형수가 앓아누운 뒤로는 그런 연극마저도 하지 않는다……?’

대찬은 곰곰이 따졌다.

‘심형수가 당장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벌써 마각을 드러낼 이유가 없는데…….’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로 압축된다.

‘심형수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재산이 있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2가지.’

빨간불이 들어오자 대찬은 정지선 뒤에 차를 세웠다.

‘첫째, 로또를 맞았든 주식이 대박이 났든, 아니면 뭐든 심원철의 재산이 확 늘어났다.’

확률은 희박했다.

‘둘째, 심형수의 재산을 빼돌려 자기 몫으로 삼았다.’

심증은 후자가 확실했다.

대찬은 바로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홍 주임님.”

“아, 차장님, 무슨 일이세요?”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홍은주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밑밥 안 깔아도 뒤에서 차장님 욕 안 해요. 시키실 일 있으면 시키세요. 그게 제가 할 일이에요.”

“나 등기부등본 하나만 떼서 톡으로 보내줄래요?”

“네. 주소가 어떻게 되는데요?”

“경기도 하남시…….”

대찬이 주소를 알려주자 홍은주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드릴게요.”

“고마워요, 주임님.”

홍은주의 일처리 속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얼마 되지 않아 심형수가 소유한 토지에 대한 등기부등본이 대찬의 휴대폰으로 전송되었다.

대찬은 인근에 차를 세우고 등기부등본을 확인했다.

그걸 확인한 대찬의 동공이 커졌다.

“이 미친 새끼…….”

심형수가 소유한 토지에 소유권 이전에 대한 항목이 명시돼있었다.

토지에 대한 지분의 절반이 심원철 소유로 이전돼 있었다.

“이 또라이 같은 놈…….”

심원철이 저렇게 할아버지를 백안시하려면 당장에 소득이 발생해야만 한다.

하지만 토지에서는 별다른 소득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 설마 건물에도 이 자식이?”

대찬은 서울로 향하는 외곽순환고속도로에 진입하려다가 급히 차를 돌렸다.

다시 하남으로 향했다.

‘이걸 어르신한테 바로 말했다간 쇼크로 돌아가실지도 몰라.’

대찬은 가사도우미에게 전화를 걸어 잠깐 밖으로 나오라고 귀띔했다.

가사도우미는 웃으면서 나왔다.

“왜 가다가 도로 왔어? 뭐 놓고 간 거 있어?”

“아뇨, 그건 아닌데…….”

대찬은 그녀에게 전말을 일러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 일처럼 분노했다.

“그놈이, 그놈이 기어이 사고를 쳤네!”

“심원철 씨가 평소 어르신의 인감도장 같은 걸 취급했나요?”

“이런저런 일처리를 원철이가 도맡아했지. 할아버지도 연세가 많이 드셨고, 나도 복잡한 건 잘 모르고 그러니까.”

“…그렇군요.”

가사도우미는 패닉에 빠졌다.

“어쩌면 좋아? 이 일을 어째!”

“일단 어르신한텐 말씀드리지 마시고요.”

“그래야지. 어르신 돌아가시면 나 백수 돼.”

“일단 어르신 소유의 건물하고 토지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 해서요.”

“응. 그건 어르신이 어디 적어놓으셨는데, 잠깐만…….”

대찬과 가사도우미는 쿵짝이 잘 맞았다.

그녀는 대찬의 의도대로 행동했다.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면 그럴 기세였다.

‘이러니 꼭 사기 치는 기분이네.’

대찬은 가사도우미가 가져다준 메모를 홍은주에게 보냈다.

홍은주는 건물 두 곳과 토지 세 곳의 등기부등본을 떼어 대찬에게 전송했다.

그걸 본 대찬은 기운이 쭉 빠졌다.

“대단하구만, 대단해.”

심형수의 사무실이자 자택이 있는 건물 역시 심원철이 절반의 지분을 양도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다.

더 기가 막힌 건 하남 모처에 있다는 5층짜리 상가건물이었다.

그곳은 심원철에게 3분의 1의 지분이 양도되었고, 또 누군가에게 3분의 1의 지분이 양도되었다.

대찬은 그 누군가를 충분히 짐작하면서도 확인차 가사도우미에게 물었다.

“이미혜가 누구예요?”

“이, 이미혜? 그년 아니야! 원철이 애인 년!”

“역시.”

이 모든 과정이 심형수가 병에 걸린 지 사흘째 되는 날 이뤄졌다.

대찬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원철은 사랑의 징표로 이미혜에게 지분을 넘겨줬겠지만, 제3자가 봤을 때는 패륜에 불과했다.

대찬은 찝찝한 표정으로 가사도우미에게 물었다.

“혹시 심원철 씨 전화번호 알고 계세요?”

“알지. 알려줄게.”

“아니다. 어차피 제가 전화해서 만나자고 해도 보려고 안 할 테니까요. 여사님이 급하게 전할 게 있다고, 어디 있느냐고만 알아내주시겠어요?”

“그래, 그럴게.”

가사도우미는 당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찬의 조언을 이행했다.

“지금 시내 카페에 있다는데? 여기래, 주소가.”

“알겠습니다. 여사님은 일단 가만히 계세요. 제가 해결해볼게요.”

“그래, 고마워, 젊은 차장님.”

“이게 해결이 돼야 저희도 일 얘기를 할 수 있으니까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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