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05화
대찬은 흡족하게 웃었다.
마침 다른 차가 그 자리를 노리고 있던 터였다.
그 차는 항의하듯 한참 헤드라이트로 대찬과 김산호의 차를 노리다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대찬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갑시다.”
대찬과 김산호가 매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음?”
대찬과 김산호는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방금 전과 흡사한 상황이었다.
차량 하나가 주차 칸을 차지했고, 나머지 하나는 빼앗긴 주차 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주차 칸을 차지한 차량을 유심히 보니 대찬이 차지한 자리를 노리던 차량이었다.
“여기다 대면 어떡해요?”
“뭐! 여기다 대면 뭐!”
“장애인주차구역이잖아요! 당신, 장애인이에요?”
그 말에 대찬은 무의식적으로 차량이 들어간 주차 칸을 바라봤다.
말마따나 장애인주차구역이었다.
항의를 하는 쪽은 척 봐도 몸이 불편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그리고 항의를 받는 쪽은 척 봐도 건장한 청년.
“갈 길 바빠요. 얼른 가요.”
김산호는 그렇게 말했지만, 대찬은 그쪽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미안. 오지랖 좀 부리자.”
“아이고, 이 형님 또 시작이시네.”
김산호는 이마를 탁 짚었다.
대찬은 소란이 인 쪽으로 걸어갔다.
다리를 절면서 키가 작은 중년 남성은 거의 울상이었다.
대찬은 그를 흘끗 보고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기, 여기 장애인주차구역 같은데 이분이 쓰도록 배려해주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야?”
‘싸가지 보게. 반말이 바로 튀어나오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반말하지 마시고요. 장애인 스티커도 안 붙이신 거 봐서는 멀쩡하신 거 같은데.”
“나 그쪽하고 말싸움할 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요? 과태료 알아서 물 테니까 갈 길 가세요. 짜증나게 하지 말고.”
“하하, 나도 그쪽 구린내 나는 아가리랑 1초도 더 마주하고 싶지 않아요. 과태료는 꼭 무시고요.”
“뭐? 구린내?”
대찬은 청년의 말은 묵살하고 중년 남성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제가 주차한 곳에 주차하시죠. 매장 입구하고 조금 거리는 멀지만.”
“그, 그래도 될까요?”
“저희 어차피 잠깐만 있으려고 했어요. 김 대리, 차 빼고 밖에서 한 바퀴만 돌아. 얼른 사갖고 나올 테니까.”
“예예, 알겠습니다, 차장님.”
대찬은 청년 쪽으로는 한 줌 시선도 주지 않고 갈 길을 갔다.
청년은 이를 갈며 툴툴거렸다.
“개미 똥만 한 회사 다니면서 차장 소리 듣고 다니니 저렇게 싸가지가 없지.”
“오빠, 뭘 저런 거한테 신경을 써. 얼른 들어가자. 우리 캠핑할 거 사야지. 고기하고 술하고 이것저것.”
조수석에서 여자가 나오며 청년을 채근했다.
청년은 적개심 어린 시선을 대찬의 뒤통수에 한 번 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고, 이거 뭐라고 감사를 해야 할지…….”
“주차 칸 하나 갖고 감사는요. 되레 민망해요. 얼른 차 대시고요. 저런 싸가지한테 물려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대찬은 꾸벅 인사를 올리고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김산호가 업하우스 매장을 공연히 한 바퀴 도는 동안, 대찬은 법인카드로 값나가는 한우세트를 샀다.
제 시간에 딱 도착한 차를 타고 다시 그 고집불통이라는 할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그 고집불통 할아버지의 이름은 심형수라고 했다.
그와 접촉했던 직원들이 남긴 보고서를 훑어보던 대찬은 감탄했다.
“이야, 끗발 좀 날리는 양반이네.”
“왜요?”
“시의원도 두 번이나 하고, 라이온스클럽 회원이고, 무슨 봉사단체에 산악회에 많이도 거느렸다.”
“전형적인 지역 유지네요.”
“하남에서는 방구깨나 뀌는 양반인가 봐.”
“이런 분들 몇 번 상대해봤는데 진짜 쉽지 않아요. 자존심하고 고집이 엄청 세다고요.”
대찬은 김산호를 보며 웃었다.
“그러니까 여태 우리 직원들도 물먹은 거겠지.”
“옥 상무님도 그렇지, 무슨 조 차장님만 보내면 뚝딱 다 해결될 줄 아시나 봐요.”
“밑져야 본전이니까. 빈손으로 돌아가도 성의는 보여야지. 자, 들어가자.”
대찬은 심형수의 사무실 겸 자택으로 알려진 허름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가진 부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했으니, 그의 짠 내 나는 성품이 벌써부터 드러났다.
“아, 진짜 이렇게 귀찮게 할 거야!”
늙은이의 쇳소리가 튀었다.
한우세트는 건네지지 못한 채 여전히 김산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심형수는 꼬장꼬장한 눈빛으로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희 회사에서 여러 번 찾아뵌 건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왜 또 오고 지랄이야, 지랄이!”
“그래도 소상히 설명을 드리고…….”
“소상한 설명은 무슨 설명! 이미 들을 만큼 들었어! 귀에서 피가 나올 지경이야! 이제는 내 귀에서 고름 나오게 하는 게 자네 임무인가? 그래서 나 뒤져버리면 어떻게 해보려고?”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선생님.”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아무리 현란한 혓바닥을 지녔다 한들 아예 듣지 않으려는 사람을 상대로는 도리가 없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다.
대찬도 싫다는 사람 붙들고 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냉수 한 잔 대접받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래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정치권을 움직이든, 웃돈을 얹어주든 어떻든.
그게 대찬의 몫은 아니었다.
대찬은 심형수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거듭 민폐 끼쳐드렸습니다. 선물은 사양하지 마시고…….”
“아, 안 받는다고!”
심형수가 꽥 소리를 지르는 통에 한우마저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그렇게 민망하게 물러나오려는 찰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구면이었다.
그것도 방금 전에 안면을 튼.
“야, 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왔냐?”
“이렇게 금방 쇼핑 끝내실 거 그 난리법석을 떨었습니까? 성질 한번 요란하십니다.”
그 청년이었다.
대찬이 그의 심사를 비틀자, 그는 심형수에게 대뜸 물었다.
거친 목소리였다.
“할아버지, 이거 뭔데 여기 와 있어요?”
“뭐야, 아는 사람이냐?”
“아까 마트 갔다가 저 새끼가 시비 걸었거든요.”
“시비를 걸어……?”
심형수는 대찬을 흘끗 올려다봤다.
청년은 너 잘 걸렸다는 마음으로 할아버지 심형수에게 일러바쳤다.
“바빠 죽겠는데 뜬금없이 시비를 걸잖아요. 황당해서, 진짜.”
“그걸 시비로 생각하셨다니, 대단한 인성이십니다.”
“이게 끝까지 진짜……!”
청년이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걸 심형수가 막았다.
그러고는 대찬에게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립니까? 남의 귀한 손자한테 시비를 걸어요?”
“시간을 주시면 설명 올리겠습니다.”
“해봐요.”
청년은 대찬이 봉변당할 일만 예상하고 흐뭇하게 웃었다.
대찬은 차분히 설명했다.
“손주분이 장애인주차구역에 주차를 했습니다. 거기 주차하시려던 장애인분이 항의하시더군요.”
“음.”
“항의에도 제 갈 길 가시려고 하기에 말 한마디 보탰습니다. 끝끝내 양보 안 하셔서 제 자리 양보했고요.”
“으음…….”
“선생님도 이게 시비라고 생각하시면 저도 더 드릴 말씀 없습니다.”
대찬의 말을 들은 심형수는 손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원철아, 이게 진짜냐?”
손자의 이름은 심원철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진짜냐, 아니냐. 그것만 말해!”
심형수의 목소리가 짐짓 엄해졌다.
그러자 손자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꾸했다.
“진짜는 진짜죠.”
“너! 언제까지 행실 그따위로 할 테냐! 언제까지 할애비 얼굴에 먹칠할래!”
“아, 할아버지 드릴 고기 좀 사오느라고 그랬어요! 빨리 사다드리려고!”
“고기? 웬 뜬금없이 고기냐?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
그러자 냄새를 맡은 대찬이 끼어들었다.
“할아버님 사드리는 김에 캠핑에서 먹을 고기 사신 거예요, 아님 캠핑 가느라 겸사겸사 할아버님 드실 고기 사드린 거예요?”
“야, 너 진짜……!”
심형수는 대찬과 심원철을 번갈아봤다.
“캠핑?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아까 어떤 여자분이랑 같이 들어가면서 그렇게 얘기하시던데요?”
심원철은 당혹감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대찬이 자리를 뜨고 나왔던 얘기였다.
대찬은 걸음을 옮기면서 다 엿듣고 있었다.
심원철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달아올랐다면, 심형수의 얼굴은 분노로 달아올랐다.
“너 또 그 계집년이랑 어울리는 거냐! 만나지 말라고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아, 그게 아니고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썩 나가!”
“그, 그러면 용돈 20만 원만 주시면…….”
“이놈이 그래도!”
“에이, 씨…….”
심원철은 대찬에게 눈을 확 흘기고 자리를 떴다.
당장이라도 찢어발길 듯한 눈빛이었다.
암만 그래도 대찬이 저런 나부랭이의 눈빛에 위축되지는 않았다.
잠깐의 소란이 끝나고 다시 실내가 고요해졌다.
심형수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아까 일은 내 대신 사과함세. 손주 놈이 영 배워 처먹지 못해서.”
“선생님이 사과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대찬이 인사를 올리고 물러나려는데, 심형수의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잠깐.”
“네, 선생님.”
“오늘 말고 다음에 다시 찾아와주겠나? 오늘은 내가 혈압이 좀 올라서 말이 곱게 안 나올 거 같은데.”
대찬은 웃음이 번지려는 걸 억지로 참고 평정을 유지했다.
“예, 그러겠습니다.”
“아들 일찍 보내고 손자라고 하나 있는 게 저 모양이라, 싸가지 있는 놈을 좋아해, 내가.”
“그러십니까.”
“자네 말을 들어보니 붙임성도 있고 인성이 좀 된 사람 같군.”
대찬은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어디 가서 손가락질 받을 짓은 잘 안 합니다.”
“그렇다고 당장 땅 팔겠다는 소리는 아니야. 들어만 보겠다는 거야, 들어만.”
“물론입니다. 그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한우는 받아주시죠.”
“…잘 먹음세. 곧 연락을 주지. 명함 하나 남겨놓고 가게.”
대찬은 예의바르게 인사를 올리고 심형수의 앞에서 물러났다.
다시 서울로 돌아오면서 김산호가 입맛을 쩝 다셨다.
“아까워요.”
“뭐가?”
“한우요. 어차피 안 될 양반한테 갖다 바친 게 너무 아깝잖아요.”
“그럼 법카로 산 걸 홀라당 먹어버리려고 했어?”
김산호는 웃으며 장난 식으로 대꾸했다.
“이놈의 회사, 제대로 대우해주는 것도 없는데 못 그럴 것도 없죠.”
“참 나, 나더러 업하우스에서 물건 산다고 난리 피우던 사람 맞아?”
“그래도 아까운 걸 어떡해요? 저 심술궂은 노인네 배만 채워주고.”
대찬은 웃으면서 대꾸했다.
“일단 받아먹은 그 순간부터 반은 성공한 거야. 저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맨입으로 받을 거 같아?”
“그럼 자신 있어요?”
“자신까진 아니고, 물고기 입에 후크는 건 거지. 이제부턴 열심히 파이팅 해야지.”
김산호도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그래도 그 막돼먹은 손자 놈 덕분에 물꼬는 텄네요?”
“그러니까 나보고 오지랖이네, 어쩌네 욕하지 말라고. 일단 착하게 살고 봐야 하는 거야.”
“아이고,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대찬은 김산호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이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어올라!”
“이제 매형도 아닌데 뭐 어때요!”
“…….”
“…….”
김산호가 엉겁결에 뱉은 그 말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는 길은 조용했다.
하지만 곧 연락을 준다던 심형수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대찬은 어차피 자기 영역의 업무가 아니라며 잊고 살려고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잊히지가 않았다.
‘심형수 같은 사람은 이런 약속을 허투루 안 하는데…….’
미심쩍었다.
이런 식으로 잠수를 탈 요량이었으면 계속 대찬을 냉대했을 것이지, 연락을 주겠다며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대찬은 달력을 흘끗 봤다.
이미 보름이 지났다.
‘조금 더 지체하면 나를 진짜 까먹어버리겠는데.’
어차피 밑져야 본전.
대찬은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송희근 과장에게 말했다.
“송 과장님, 저 외근 다녀올게요.”
“외근요? 어디로요?”
“하남이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대찬은 한달음에 하남으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