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04화
이를 한태윤 과장과 얘기를 나누다가 깨달았다.
“왜 새천년이 위마트 점포 확장에만 치중하냐고요?”
“네. 사업을 다변화하지 않고 점포만 무작정 늘리는 게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아서요.”
한태윤 과장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거든요, 그쪽이.”
“겨를이 없다뇨?”
“우리 때문에요. 다른 데 신경 쓰기에는 우리가 너무 컸거든요.”
“아…….”
“다른 데 손 벌리다가 우리한테 업계 1위를 뺏길 수도 있잖아요.”
두 번째 삶의 대형할인점 업계는 첫 번째 삶의 업계와 판이하게 달랐다.
첫 번째 삶의 필래마트는 사람들이 그 존재 자체도 모를 정도로 영세했다.
첫 번째 삶의 2013년에 필래마트는 달랑 하나 남은 점포도 유지하지 못하고 폐업 수순에 들어간다.
하지만 두 번째 삶의 필래마트는 완전히 달랐다.
이미 경쟁업체인 샬롯마그넷을 속된 말로 골로 보냈다.
샬롯마그넷의 모그룹인 샬롯그룹은 대형할인점 시장에서 철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씨랜드그룹이 크라즈망을 인수해 만든 업하우스 역시 필래마트에 매출이 역전된 신세였다.
첫 번째 삶에서의 새천년그룹은 필래마트를 대신해 월드몰을 꿀꺽 삼키고 무소불위의 업계 1위를 고수했다.
하지만 두 번째 삶의 새천년그룹은 그 정도로 맹위를 떨치지는 못했다.
월드몰과 크라즈망을 모두 놓쳤고, 강력한 경쟁자가 대두했다.
필래마트는 급속도로 점포를 늘려 새천년그룹의 위마트를 맹추격했고, 거기에 더해 SSM사업과 PB브랜드 영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순항 중이었다.
이런 판국이니 한태윤 과장이 새천년그룹에게 겨를이 없다고 한 것이었다.
“오히려 업계 1위가 불안해지면 사업다변화에 박차를 가해야 맞지 않나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말을 신봉하면 그렇게 되겠죠. 반대로 방어가 방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고요.”
“하기야 선택은 경영진의 몫이지만요.”
대찬은 기분이 묘했다.
필래마트가 이렇듯 불쑥 솟아오른 건, 전부는 아니라도 자신의 기여가 상당했다.
지금까지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은 같은 것도 있었고 다른 것도 있었다.
같거나 다르거나 그건 대찬의 손에서 이뤄진 일은 아니었다.
그저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달라지는 확률의 문제.
하지만 새천년그룹의 변화는 달랐다.
대찬의 손에 의해 흐름이 바뀌었다.
그건 이 세상에서 대찬만이 느낄 수 있는 전율이었다.
‘재밌는 일인데…….’
대찬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생각을 옥문영 상무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런 이상 최소한 전략기획실 내에서는 논의가 급물살을 탔다.
옥문영 상무는 우선 이동수 부사장에게 간단한 골자만 설명했다.
이동수 부사장은 무릎을 탁 쳤다.
“바로 그거야! 옥 상무, 바로 그거라고!”
그는 입을 헤벌쭉 벌리고 기뻐했다.
정치인들은 대규모 토건사업을 좋아한다.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나의 말 한마디로 인해 저 거대한 사업이 진행된다는 걸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또 주변에 떠벌릴 수 있다.
이동수 부사장은 그 정도의 중증은 아니었지만 치적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나중에 은퇴해서도 저 고래 등 같은 쇼핑몰을 바라보며 친구들에게 ‘저거 내가 지은 거야!’, 목에 핏대 좀 세울 수 있어야 했다.
그러던 차에 대찬이 제안하고 옥문영 상무가 대표에게 건의한 아이디어는 이동수 부사장의 마음에 꼭 들었다.
“적극, 적극 추진해봐.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표님. 지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알짜 아이디어를 생각해주니 내가 더 고맙지.”
이동수 부사장은 싱글벙글 웃는 낯을 단속하지 못했다.
대찬은 논의를 지속하면서 판을 더 키웠다.
이 사업은 필래마트 단독으로 추진하지 않는다.
필래 대부분의 계열사가 참여해야 한다는 게 대찬의 주장이었다.
극장이 들어와야 하니 필래 컬처인더스트리가 참여해야 한다.
식음료사업은 당연히 필래푸드 쪽에서도 손을 뻗쳐야 한다.
위락시설은 필래호텔에서 맡아줘야 한다.
전체적인 설비는 필래건설과 그 산하의 필래설비와 필래정보기술 등에서 수고해야 한다.
필래의 계열사들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견해 속에서 대찬은 딱 한 군데의 계열사만 배제했다.
‘필래유통은 어림도 없지.’
대찬은 어떻게든 필래유통이 숟가락을 올리는 사태만큼은 막고 싶었다.
만일 필래유통의 입김이 차단되고, 그들의 몫을 필래마트가 맡아서 한다면 이는 필래마트의 격을 한 단계 높이는 일이었다.
‘단순히 구멍가게 주인이 아니라, 복합쇼핑몰을 보유해서 백화점을 주력으로 하는 필래유통의 턱 밑에 칼을 들이대는 거야.’
만약 대찬의 생각이 맞아떨어진다면, 필래유통이 그룹 내에서 독보적으로 확보한 영역을 흔들 수 있다.
서청수 회장 역시 이 생각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걸 시작으로 필래마트가 필래유통의 영역을 서서히 잠식한다면, 그것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서청수 회장에게 후계문제는 미래의 문제였다.
아직 서승학이냐, 서원웅이냐도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서청규 필래유통 사장과의 경쟁은 당면과제.
여태 서청규 사장을 쳐내지 못한 것도 그가 그룹 내에서 보유하고 있는 독보적인 위신 덕분이었다.
그런 서청규 사장을 기둥뿌리부터 갉아먹을 수 있다면?
서청수 회장에겐 그것만큼 통쾌한 일이 또 없었다.
그건 비단 대찬만의 망상이 아니었다.
김태준 사장은 논의 초기단계의 개괄적인 내용만 이동수 부사장으로부터 귀띔을 받았다.
그는 서청수 회장과 따로 독대하는 자리에서 이를 말했다.
그러자 서청수 회장의 얼굴도 어둡지 않았다.
“괜찮은데?”
“예. 충분히 시도해볼 만합니다.”
“이 정도 건수라면 군침을 흘릴 투자사들도 많을 거야.”
“기획이 구체화되고 회장님께서 승낙해주시면 바로 착수하겠습니다.”
“음… 좋아. 서청규한테도 유효타가 되겠어.”
김태준 사장은 웃으며 말했다.
“잘만 되면 유효타가 아니라 치명타도 될 겁니다.”
필드 업(Feeld Up).
대찬이 제안한 복합쇼핑공간의 이름이 ‘필드 업’으로 정해졌다.
의미야 붙이기 나름이었다.
오감(Feel)을 충족시키는 공간(Field)이라 필드(Feeld).
아무것도 없던 들판(Field) 위에(Up) 세워진 공간이라 필드 업.
지금의 시설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발전하고 강화해나간다는 뜻의 ‘빌드 업(Build Up)’도 노린 작명이었다.
슬로건은 FEEL.
풀어서 Feel & Enjoy Entirely Life.
한국어로 하면 ‘인생을 완전히 느끼고 즐기세요.’
이런 껍데기를 지어내는 데는 분명한 소질이 있는 오다혜의 작품이었다.
사내공모전을 실시한 결과인 까닭으로 오다혜에게는 소정의 상금이 돌아가기도 했다.
필드 업에는 여러 가지 위락시설이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쇼핑공간으로서의 정체성도 잃지 않았다.
필래마트를 포함해서 재래시장에만 입점했던 필래 in 마켓이 이례적으로 필드 업에만 매장을 냈다.
거기에 PB브랜드인 필 초이스만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매장도 들어섰다.
하지만 필래그룹의 여러 쇼핑브랜드 중 필래백화점만은 입점하지 못했다.
서청수 회장은 필래백화점이 입점하는 대신, 유명한 국내외 명품들을 비롯한 각종 브랜드의 매장을 개별적으로 입점시켰다.
서청규 사장을 적극적으로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사업을 시작한다고 턱 도깨비방망이처럼 일순 이뤄지는 건 아니다.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필드 업은 기존의 필래마트나 필래 in 마켓하고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주변의 소비자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것이다.
당연히 반대의 목소리 역시 높을 수밖에 없었다.
소상공인들, 그리고 그들의 표심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지역 정치인들이 나설 공산이 컸다.
그거야 대관업무팀의 소관이니 대찬이 관계할 일은 아니었다.
그런 반발을 용케 무마한다 해도 다른 문제들은 여전히 산적했다.
특히 부지매입의 문제가 있다.
워낙 큰 규모의 시설이 들어서다보니 그만큼의 용지가 필요했다.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 그 큰 덩어리의 대지를 덜컥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구할 수 있다 하더라도 최대한 싼값에 확보해야 한다.
필드 업의 첫 번째 매장은 경기도 하남시 일대로 정해졌다.
하남 자체가 청년층이 모이는 주거밀집지역이었다.
게다가 강남의 유동인구를 쉽게 빨아들일 수 있었다.
남양주·구리 등 경기도 동북부와 성남·광주 등 동남부를 동시에 타깃으로 삼아 충분한 고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새천년그룹에서 만들었던 쇼핑몰도 하남에 세워졌었는데…….’
필래의 판단도 첫 번째 삶의 새천년과 다르지 않았다.
옥문영 상무가 대찬에게 말했다.
“하남에 아주 괜찮은 땅이 있거든?”
“그래요?”
“응. 대지 대부분은 쉽게 취득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문제가 하나 있어.”
“뭡니까?”
“필지 여러 곳을 한 사람이 단독으로 소유하고 있는데, 하남 토박이 할아버지란 말이야.”
여기까지 듣고 대찬은 대충 전말을 예상했다.
“죽어도 안 파신다고 그러시죠?”
“응. 고집도 여간 고집이 아니시래.”
“그런 분들이야 재산에 애착이 크시니까요.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당신 지나온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하시니.”
“그렇기야 한데, 너무 군침이 나온단 말이야.”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고집을 어떻게 꺾으시려고요? 다른 곳 찾아보는 게 빠를 거예요.”
“조 차장이 직접 가서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입지가 최고라니까.”
“그 정도예요?”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우리랑 조인한 필래건설 쪽에서도 그 부지가 입지도 좋고 지가도 제일 합리적이라고 했어.”
“그래요? 전문가들 안목도 일치한단 말이죠.”
“그래. 조 차장도 이번에 가서 두 눈으로 직접 봐. 그리고 겸사겸사 그 영감쟁이도 만나보라고.”
“제가 만나본다고 뭐 특별히 다르겠어요?”
“지금까지 특별히 달랐잖아.”
그 말에 옥문영 상무가 눈을 찡긋했다.
‘윙크는 좀…….’
대찬은 뜨악했다.
“알겠습니다.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혼자 가면 폼이 안 사니까 김산호 데리고 가.”
“네, 그럴게요. 안 그래도 김산호가 제 출장 메이트였거든요.”
옥문영 상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찬은 곧장 김산호를 대동하고 하남으로 갔다.
대찬이 운전석으로 가려고 하니 김산호가 차키를 빼앗았다.
“이제 저도 운전쯤은 한다고요.”
“우리 김 대리 많이 컸다?”
“저도 회사 짬밥 꽤 먹었잖아요.”
대찬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순순히 차키를 넘겨주었다.
하남으로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김산호는 문득 김산하의 얘기를 꺼냈다.
“누나는 요르단에서 고생은 하는데 버틸 만한가 봐요.”
“…그래?”
“연락은 잘 안 하시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러는 편이 서로한테 좋으니까.”
“당사자들 마음이야 오죽하겠어요. 저도 이렇게 아쉬운데. 괜히 말 꺼내서 죄송해요.”
“아니야. 너도 답답하겠지. 중간에 껴서 불편하기도 하고.”
“제가 불편할 거야 뭐 있나요.”
둘은 쓴웃음을 짓고 대화를 종결했다.
이후 하남까지 가는 길은 고요했다.
하남에 도착해 부지로 짚은 땅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옥 상무님이 괜히 그러셨던 게 아니네.”
“그러게요. 딱 좋아요, 딱.”
김산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목이 없는 사람이 봐도 여기는 쇼핑몰 만들라고 하늘이 점지한 땅이었다.
사방팔방 도로가 뻗어있어 교통도 시원하고, 인근 거주민들이 접근하기에도 좋았다.
대찬은 김산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빈손으로 가기는 뭐하니까 주변에서 선물이나 하나 사가자. 마침 저기 업하우스 매장 있네.”
“지금 필래마트 직원이시면서 업하우스 매출 올려주시겠다는 거예요?”
“아이구, 언제부터 그렇게 애사심이 투철하셨나? 저기서 한우세트 하나 팔아준다고 구렁텅이에 빠진 업하우스가 잘될 거 같아?”
“그래도요.”
“어차피 저기 필드 업 들어서면 여긴 금방 폐업이야. 적선하는 셈치고 팔아주자고.”
대찬이 그렇게 말하니 김산호는 차를 업하우스 하남점으로 몰았다.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니 만차였다.
그걸 보고 대찬이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너무 잘되는데? 괜히 팔아주러 왔나.”
“거봐요.”
“그래도 필드 업 들어서면 이 많은 고객들이 다 우리 고객님이란 거 아냐.”
“조 차장님은 어쩔 땐 참 쓸데없이 긍정적이에요.”
대찬은 김산호의 말을 묵살하고 정면을 가리켰다.
“야, 저기 차 나온다. 다른 차 오기 전에 얼른 대.”
대찬의 말에 김산호가 빈자리에 머리부터 들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