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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03화 (202/556)

난 할 수 있어 203화

대찬은 바로 만몽거사를 찾아갔다.

사정을 설명하니 만몽이 픽 웃었다.

“아니, 네 숙제를 왜 나한테 떠넘겨? 이 시러베 잡것아!”

“거사님은 하루에도 열 몇 개씩 이름 지으시잖아요. 이거 하나 못해주세요?”

그러자 만몽은 눈을 부라렸다.

“야, 이 쌍놈아! 네놈 누님이 작명소에서 이름 받아올 돈도 없어서 너한테 부탁했겠냐? 알고 보니 팍팍 늙은 할배가 이름 지었다고 하면 퍽이나 좋아하겠어!”

“그건 그렇네요.”

대찬이 순순히 인정하니 만몽의 기세가 더 올랐다.

“아유, 그걸 말해줘야 아냐? 등신, 상등신!”

“그래도 힌트라도 좀 줘요. 평생 이름이라고는 옛날에 죽은 바둑이 하나뿐인데요.”

“그냥 정성을 다해서 지어. 네가 뭐 음양오행을 따져서 지을 것이냐, 어쩔 거냐?”

“알았어요.”

“기왕 왔으니 술이나 먹고 가!”

“내일 출근해야 되는데요.”

“나는 출근 안 하냐? 말숙이! 우리 오랜만에 족발시켜먹을까?”

‘괜히 왔어…….’

대찬은 괜히 와서 술만 잔뜩 마시고 돌아갔다.

“화진, 서화진?”

조수진은 대찬이 갖고 온 이름을 보고 여러 번 발음했다.

대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서화진.”

“너무 여자 이름 아니야?”

“꼭 그렇지도 않아. 나 학교 다닐 때 교양수업 교수님 성함도 화진이었어. 배불뚝이 아저씨였거든.”

“설마 그 양반 생각하면서 지은 건 아니지?”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그럼?”

“일단 발음하기가 좋잖아. 성인 ‘서’의 모음 ‘ㅓ’는 음성모음, 중간 ‘화’의 ‘ㅘ’는 양성모음, 마지막 ‘진’의 ‘ㅣ’는 중성모음. 음양, 천지인이 세 글자에 다 들어있어서 균형이 맞아.”

“그런가.”

“그리고 ‘화’는 꼭 넣어야 했어. 서씨 항렬자거든.”

“왜? 우리 남편도 그렇고 그 항렬 서씨들은 항렬자 안 쓰잖아. 서승학, 서원웅, 서인태. 다 다른데?”

대찬이 항렬자를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지근거리에 있는 서씨들은 모두 서인태 차장의 말마따나 ‘내놓은 자식’들이었다.

서원웅이야 서청수 회장의 아픈 손가락이긴 했지만 결국 서자였다.

서인태 차장도 본인이 그렇다고 할 만큼 서씨의 핵심은 아니고 방계일 뿐이었다.

대찬은 자신의 조카마저 가문의 괄시를 받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항렬자를 고집했다.

이름에서부터 빼도 박도 못하는 서씨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다.

대찬이 부드러운 말 속에 그런 강한 의지를 담아 설명하니 조수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은 무슨 뜻이야?”

“진은 먼지, 속세 진 자야.”

그러자 조수진은 얼굴을 찡그렸다.

“애 이름에 먼지를 붙이라고?”

“한 글자만 보면 좋지만은 않지만, 앞 글자 화랑 붙이면 좋은 뜻이야.”

“맘엔 안 들지만 일단 들어보긴 할게. 화랑 붙이면 좋다구? 화는 어울릴 화(和) 쓸 거지?”

“응.”

“화진(和塵), 먼지랑 어울린다?”

“응. 먼지 뒤집어쓰고 일하는 사람들, 먼지처럼 떠돌아다니는 사람들, 먼지 치우면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진(塵)에는 속세라는 뜻도 있으니까. 속세의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려 살라고.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 사람의 9할은 되니까.”

조수진은 씩 웃었다.

“앞 글자 ‘화’는 재벌가의 항렬자, 뒷 글자 ‘진’은 서민들의 항렬자네.”

“그렇지.”

“마음에 드는데? 따지고 보면 딱 이 아이 출생하고도 맞아떨어지잖아. 재벌의 아들 서인태, 서민의 딸 조수진.”

대찬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그렇게 되네. 당당한 재벌가의 손주로 살되 건방지게 굴지 말고, 유난 떨지 말고 살라구.”

“그래. 꼭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가.”

조수진은 울지도 않고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대찬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이 이름은, 화광동진(和光同塵) 네 글자를 줄인 거야.”

“화광동진?”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인데… 빛을 감추고 속세와 어울린다는 뜻이래.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 않고 도리어 감춘다.”

“좋은 말이네.”

“그리고 이런 뜻도 있어.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본색을 감추고 인간계에 나타남.”

조수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살짝 사라지고 대찬을 바라봤다.

대찬의 얼굴에는 웃음이 여전했다.

“언제까지 빛을 감추지 않을 거야. 언제까지 본색을 감추지 않을 거야. 재벌의 항렬자가 먼지를 뒤집어쓸 날이…….”

“너…….”

“올지도 모르겠지?”

대찬은 웃으면서 말을 맺었다.

조수진은 대찬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아들, 서화진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렇게 서청수 회장의 조카손자이자 대찬의 조카이며, 서원웅의 5촌 조카의 이름은 서화진으로 결정되었다.

윤이영을 메인모델로 선택하고 뜻밖의 성공을 거두었다.

필래마트의 점포 수도 서서히 늘어나 어느새 94번째 점포를 열기도 했다.

필래 인 마켓 역시 쥐가 번식하듯 매우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있었다.

도심지역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웬만한 지방의 재래시장에는 모두 필래 인 마켓이 들어섰다.

대찬이 제안하고 김태준 사장이 밀어붙인 인터넷 쇼핑몰 필래#도 경쟁력을 갖춰나가고 있었다.

KD테크와의 제휴로 개발한 필래페이가 본 궤도에 오르면 대형할인점 체인 중 가장 높은 온라인 매출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PB브랜드인 필 초이스의 압도적인 성장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이쯤 되니 이동수 부사장은 욕심이 생겼다.

자기가 딱히 한 건 없지만 자기 대에 열매를 거두니 꼭 자신이 잘한 것만 같았다.

‘이거 나 의외로 경영에 소질이 있는지도……?’

그렇게 자리나 지키다가 서원웅에게 넘겨주려던 이동수 부사장의 경영철학이 조금은 바뀌었다.

그는 임원회의에서 말했다.

“우리 필래마트가 아주 견실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대표로서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

임원들은 저 양반이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저런 말을 하는지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현실의 성공에만 안주하면 안 됩니다. 더군다나 대형할인점 체인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렇습니다.”

“…….”

“그래서, 우리도 더욱 성장할 수 있는 혁신을 해내야만 합니다.”

그러자 옥문영 상무가 말했다.

“대표님, 하지만 새벽배송처럼 비용이 많이 투입되는 장기 사업이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아, 그건 그거고.”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하면 하는 거야!”

이동수 부사장은 벌떡 일어나 종이 위에 볼펜으로 휘갈겨 썼다.

I CAN DO IT!

이동수 부사장은 온갖 똥폼을 다 잡으며 그걸 쓱 밀어 임원들에게 보여주었다.

“아이 캔 두 잇! 이게 이동수호 필래마트의 슬로건이야!”

그걸 보고 옥문영 상무는 똥 씹은 표정을 했다.

‘지랄,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대표의 지시였으니 따라야 했다.

특히 이 지시는 전략기획실이 주축이 되어야만 했다.

이동수 부사장은 전략기획실에 필래마트의 신성장 동력으로 삼을 만한 사업을 발굴하라고 지시했다.

옥문영 상무는 이동수 부사장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어디서 그렇게 헛바람이 드셔갖고…….”

마뜩찮은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그녀와는 달리 대찬의 얼굴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송희근 과장이 대찬에게 슬쩍 물었다.

“조 차장님이 제일 분개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째 안 그런 표정이신데?”

“네? 제가요? 왜요?”

송희근 과장 대신 한태윤 과장이 말했다.

“무리해서 신사업을 추진하면 나중에 서원웅 전무님이 대표가 되면 부담을 다 떠안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그 반대이기도 해요.”

“반대라뇨?”

한태윤 과장이 의아한 빛을 띠자 대찬이 말했다.

“얼마 전에 김태준 사장님이 전화하셨거든요.”

“그룹 본사로 가시고서도 조 차장님께는 자주 연락하시는군요.”

“자주는 아니지만요.”

김태준 사장은 대찬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이동수가 있을 때 굵직한 거 하나 추진해야 하지 않겠어?”

“굵직한 거요?”

“그래. 비용이 많이 소요되고 투자도 많이 받아야 되는 걸로.”

“그런 굵직한 건 서원웅 전무가 대표 됐을 때 하는 게 좋지 않나요? 치적도 되고.”

“모르는 소리. 자네, 88올림픽 알지?”

“올림픽요? 네.”

“전두환이 죽을 똥 싸면서 유치해고 준비해서 개막식에는 노태우가 얼굴 디밀었잖아.”

“아, 그렇죠.”

그 얘기를 하니 대찬도 대충 감을 잡았다.

“그런 굵직한 사업은 추진하자마자 성과가 나오는 게 아니야. 이동수가 전두환이 하고 서원웅이 노태우 시키자고.”

“사장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래. 회장님도 마트가 잘 크니까 밀어주실 마음이 있으셔. 제대로 된 건수만 잡으면 투자도 적극 유치해주실 거야. 한번 기회를 엿보고 있어.”

“예, 알겠습니다.”

“안 바쁘면 나중에 한잔하자고.”

“제가 아무리 바빠 봤자 사장님만 하겠습니까. 불러만 주십시오.”

“예의 바른 척은.”

“제가 예의 안 바르면 도대체 누가 바르답니까?”

“이봐, 지금 또 고개 쳐드는 거. 암튼!”

김태준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대찬은 김태준 사장과 얘기한 것을 전략기획실 사람들과 공유했다.

그러자 전략기획실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여 공감했다.

옥문영 상무가 대찬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조 차장은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

대찬은 미래의 경험을 떠올리며 말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단순히 쇼핑서비스만을 제공하는 대형마트는 쇠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라인 쇼핑몰에 잡아먹히고 말 겁니다.”

“마트 가서 장 보는 게 고작인데 뭐 어떡하라는 건가?”

“단순히 쇼핑만 하는 게 아니라, 낮부터 밤까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오프라인에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낮부터 밤까지 여가를 즐긴다고?”

“네. 쇼핑과 여가를 한곳에서 해결할 수 있는 복합공간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한태윤 과장이 나섰다.

“소비자에게 주말시간을 쏟게 만들려면 경쟁해야 할 선택지들이 너무 많습니다.”

“네, 그렇겠죠. 놀이동산, 카페, 레스토랑, 공원, 스포츠 공간, 극장 등등요.”

한태윤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것들을 제쳐놓고 우리가 마련한 공간을 방문하도록 유도하는 건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해결책은 간단합니다. 그걸 모두 때려박으면 돼요.”

‘때려박는다’는 말은 회의시간에 쓰기에 적절하지 않았지만, 직관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그 말에 김산호의 동공이 커졌다.

“그럼 덩치가 엄청 커져야 하는데요. 웬만한 쇼핑몰 부지 정도로는 어림도 없겠어요. 놀이동산까지…….”

“놀이기구까지 들일 공간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그래도 극장, 레스토랑, 카페, 스포츠 공간, 공원 정도는 한 번에 묶어낼 수 있지.”

송희근 과장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럼 서울에 들어서기는 어렵겠는데요. 땅값이…….”

“네. 비교적 지가가 저렴한 수도권의 신도시 지역을 노려야 해요. 아무래도 20대부터 40대까지가 주 고객층이 될 테니까요.”

옥문영 상무는 우려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걸 실험적으로 한 군데 설립한다고만 해도 엄청난 재원이 투입될 거야.”

“네. 지금까지 시도했던 사업들보다는 확실히 리스크가 크죠.”

“으음… 생각해둔 부지는 있어?”

“근방의 인구를 모두 빨아들일 만한 요지에 있어야 합니다. 서울까지요. 교통도 편하고, 인구도 제법 밀집되어 있어야 하고, 거주인구가 젊은 곳이어야만 합니다.”

송희근 과장이 툭 던졌다.

“일산 정도가 좋겠군.”

그러자 허운이 반대의견을 던졌다.

“일산은 1기 신도시라 점점 나이 들어가고 있어요. 게다가 유사한 포맷의 단일 쇼핑몰이 두 군데 있죠.”

오다혜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강남에서도 너무 멀어요. 한국 소비중심은 누가 뭐래도 강남이니까요. 강남에서도 가까워야 해요.”

옥문영 상무가 말했다.

“중요한 사업이니만큼 보고서를 치밀하게 잘 짜보자고. 일단 개념 자체는 난 긍정적으로 평가해.”

“알겠습니다.”

직원들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찬의 제안은 실은 도둑질에 가까웠다.

첫 번째 삶에서, 필래의 경쟁업체인 새천년그룹은 쇼핑 테마파크를 추진했다.

대찬이 말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사업이었다.

2016년 개장한 이 쇼핑몰은 2013년에 착공했다.

그렇다면 준비는 더 오래전에 시작됐다는 것.

그런데 대찬이 이런 제안을 하는 이 시점까지도 새천년그룹은 관련된 사업에 대해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교외지역에 거대한 쇼핑몰을 짓기는커녕 위마트의 점포 확장에 치중했다.

‘왜지?’

대찬은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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