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202화
옥문영 상무는 이 상황이 적잖이 만족스러웠다.
“잘됐어. 윤이영이 괜히 여기에 휩쓸렸으면 윤이영 씨를 모델로 기용하는 데 주저하셨을 거야, 대표님이.”
“네, 동감입니다. 잘됐어요.”
대찬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옥문영 상무가 대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 차장은 윤이영 씨랑 장기계약 맺기를 희망하는 거지?”
“네, 맞습니다.”
“얼마나?”
“최소 4년은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윤이영이랑 썸싱 있어?”
옥문영 상무는 그렇게 말하다가 아차, 했다.
김산하와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대찬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제가 연예 쪽에 안목이 있는 편은 아니지만, 주변의 평판이 좋아서요. 원두표 때와 비슷하게.”
“그래. 조 차장 말 안 듣고 원두표랑 손잡았으면 회사가 돈은 돈대로 쓰고 욕은 욕대로 먹을 뻔했지. 거참, 주변에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족집게 같으니 무시할 수도 없고.”
“척 봐도 윤이영 씨, 좋잖아요. 연기 잘하고 마스크 선하고.”
옥문영 상무의 표정은 개운하지 않았다.
“우리가 왜 원두표를 물어왔는데. 윤이영은 급이 안 맞잖아.”
“오히려 윤이영 씨하고 우리는 너무 급이 잘 맞아서 문제죠.”
옥문영 상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우리는 우리보다 급이 높은 배우를 잡아야 되는데.”
“급을 따지는 것도 좋지만, 이미지 그 자체를 보는 것도 좋아요. 상무님 말마따나 윤이영 씨 나중에 급 높아지면 이번 원두표처럼 고생해서 잡아야 한다니까요?”
“으음…….”
옥문영 상무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옥문영 상무는 이동수 부사장에게 윤이영을 메인모델로 기용하는 안을 건의했다.
이동수 부사장은 생각보다도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난 애초에 비싼 놈 모델로 쓰는 거 별로야. 내실로 승부를 봐야지, 이름값으로 뻥튀기하는 거 오래 못 간다니까.”
그의 구두쇠 기질 덕분이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으니, 이번에는 대찬과 이동수 부사장의 생각이 일치했다.
윤이영은 필래마트의 정식 홍보모델이 되었다.
계약기간은 4년 6개월.
모델료 역시 높으신 분들이 귀에 인이 박이도록 운운하는 그녀의 ‘급’보다 높게 책정되었다.
대찬은 필래마트 홈페이지의 메인을 장식한 윤이영의 환한 미소를 보고 그와 비슷한 미소를 머금었다.
원두표의 낙마로 윤이영마저 도미노로 무너질까 염려했던 기획사 대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윤이영을 회사로 보내 인사를 시켰다.
굳이 대표까지 나와서 보지 않아도 되는데, 이동수 부사장은 슬그머니 윤이영을 보러 나왔다.
“나 이동수 대표예요. 잘 부탁합니다, 이영 씨.”
성을 떼고 이름만 부르는 능글맞은 목소리에, 곁에서 보던 대찬은 살짝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이동수 부사장은 윤이영에게 은인이었다.
그녀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부디 필래마트가 번성하는 데 제가 벽돌 한 장이라도 기여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획사 대표에게 지시를 받은 듯 정제된 멘트에도 이동수 부사장은 으허허 웃었다.
“아이고, 젊은 아가씨가 똑 부러지기도 하지. 고마워요. 역시 조 차장이 보는 눈이 있어.”
“조 차장이요? 조대찬 차장님 말씀이세요?”
이동수 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구면인가?”
“네, 조 차장님하고는 몇 번 뵀어요.”
“이야, 이렇게 보니까 또 선남선녀야. 잘 어울려.”
주책을 떠는 이동수 부사장을 보고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반응이 영 시원치 않자 이동수 부사장도 어색한 웃음을 걸치며 슬슬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동수 부사장이 빠지고 조금 편한 자리가 되자, 윤이영의 기획사 대표가 대찬에게 살살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얘기 다 들었습니다. 조 차장님이 힘 많이 써주셨다고.”
“별말씀을요. 윤이영 씨가 저희 회사에서 추구하는 모델 상에 부합해서 추천했을 뿐이에요.”
“그래도 조 차장님 아니었으면 꿈도 못 꿨죠.”
“아이고, 그저 추천이라니까요. 감사는 이동수 대표님께 드려야죠.”
“예. 물론 이 대표님께도 그렇긴 하지만, 하하……. 앞으로도 모쪼록 잘 좀 부탁드립니다.”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요식행위 격인 인사를 마치고 슬슬 해산하는 분위기였다.
대표도 슬쩍 시계를 보며 다음 일정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옥문영 상무도 꾸벅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대찬도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윤이영이 말했다.
“조 차장님.”
“네?”
대찬이 뒤돌아보며 답했다.
윤이영은 웃음기를 띠며 말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아니, 대표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막 힘쓴 것도 아닌…….”
“원두표한테서 구해줘서 감사해요.”
“그것도…….”
“영상 제보해주셔서 감사해요.”
“…….”
“다 감사해요. 고마워요.”
윤이영은 대찬이 뭐라고 대답할 여유도 주지 않고 연거푸 감사인사를 전했다.
처음에는 당황했던 대찬도 편안하게 웃으면서 역시 고개를 숙였다.
윤이영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의 뜻으로 식사 대접이라도 하고 싶은데, 시간 안 되세요?”
“아, 괜찮습니다.”
“비싼 거 아니에요. 부담 안 가지셔도 돼요.”
대찬은 웃으면서 거듭 사양했다.
그러자 윤이영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제가 너무 부담스럽게 해드렸나요?”
“그건 아니구요. 제가 마다할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평생 연예인하고 악수도 못해봤는데, 떠오르는 여배우와의 식사자리를 왜 마다하겠어요.”
“근데 왜 마다하시는데요?”
“윤이영 씨 이번에 저희 홍보모델 되셨잖아요. 괜히 외간남자랑 밥 먹다가 사진이라도 찍히면 골치 아파지잖아요.”
“아주 비즈니스적인 이유로 거절하시는 거군요?”
대찬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비즈니스맨은 비즈니스부터 걱정해야죠. 윤이영 씨 본인한테도 좋은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래도 조 차장님은 좋으신 분 같아서 꼭 밥 한 끼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마음만이라도 이미 차고 넘칩니다.”
“마음만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윤이영은 그렇게 말하고 대찬의 손에 들린 서류를 뺏었다.
그러고는 가슴 주머니에서 펜을 뽑아 사각사각 종이에 뭔가를 썼다.
열한 자리의 숫자였다.
010으로 시작하는.
“제 번호예요. 제가 싫어서 피하시는 게 아니면, 제가 식사 대접해도 괜찮을 때 연락주세요.”
“아,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고마워서 그렇다니까요, 고마워서.”
윤이영은 가타부타 대찬의 대답을 듣지 않고 다시 예의를 차려 인사하고 돌아갔다.
대찬은 휘갈겨 쓴 열한 자리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생긴 거답지 않게 악필이네.’
윤이영은 결과적으로 잘된 선택이었다.
대찬은 몇 년 후, 그녀가 스타덤에 올랐을 때를 고려해 추천했다.
하지만 그녀를 선택한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세간에서는 필래마트의 윤리경영과 공정거래라는 경영철학과 윤이영의 깨끗한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평가했다.
윤이영을 적극 추천했던 대찬에게도 기꺼운 일이었다.
대찬은 윤이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윤이영 씨, 저희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희 필래마트와의 인연을 소중히 유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도 윤이영 씨의 위신에 해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찬이 문자를 보낸 지 2분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누가 되지 않아 다행이에요. 근데 밥은 언제 얻어 드실 거예요?
-언젠가는 꼭 그러겠습니다.
“구체적인 날짜를 얘기하라구, 날짜를.”
윤이영은 침대에 누워 대찬의 답장을 읽고 툴툴거렸다.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짓고는 이내 잠이 들었다.
그즈음, 대찬의 집안에 좋은 일이 생겼다.
서씨 집안에도 좋은 일이었다.
대찬의 누나인 조수진과, 서청수의 조카이자 대찬의 자형인 서인태 사이에서 새 생명이 탄생했다.
건강한 아들이었다.
서인태가 필래 컬처인더스트리 과장에서 차장으로 진급한 지 불과 두 달 후의 일이었다.
겹경사에 집안이 들썩였다.
대찬 역시 일을 제쳐놓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누나인 조수진이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대찬을 맞았다.
“왔냐?”
“누나, 진짜 고생 많았어.”
“그래. 지금까지 살면서 너보다 고생했던 적이 없는데, 오늘은 아주 당당히 말할 수 있어.”
“그럼, 당연하지.”
대찬은 싱글벙글 웃으면서 조카를 바라봤다.
첫 번째 삶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첫 번째 삶의 조수진은 결혼을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했다.
웬 건달 같은 녀석에게 푹 빠져서는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혼식을 올렸다.
건달은 금방 마음이 식었고, 밖으로 나돌았다.
조수진도 결혼을 후회하고 이혼해달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기를 여러 날이었다.
그 여러 날 가운데 건달의 기분이 더러운 날이면 뺨을 맞고, 훨씬 더 더러운 날에는 발로 걷어차였다.
그러니 그들 사이에서 생명이 잉태할 수가 없었다.
대찬은 그런 불쾌한 기억을 잠깐 떠올렸다가 일순 지워버렸다.
그러고는 손을 꼼지락거리는 핏덩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런 대찬을 또 누나인 조수진이 흐뭇하게 바라봤다.
대찬은 조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누나에게 말했다.
“정말 고생 많았어. 애가 건강하네. 저런 애를 어떻게 열 달이나 품고 있었대?”
“만삭이나 돼야 저렇게 크지, 열 달 내내 저렇게 컸겠어?”
“공치사를 하면 그냥 들으면 되지, 꼭 그렇게 따져야 직성이 풀리겠어?”
“그게 또 우리 마누라 장점 아니겠어?”
서인태 차장의 목소리였다.
대찬은 그쪽을 돌아보며 반갑게 웃었다.
“매형.”
“이렇게가 아니면 얼굴 보기 힘드네.”
서인태 차장은 대찬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찬은 얼른 손을 맞잡았다.
그러고는 안쓰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 차장으로 진급하신 것도 제대로 축하 못 해드렸어요.”
“그거야 피차일반인데, 뭐. 서로 바쁜 것도 잘 알고.”
“회장님한테 덜 부려먹으시라고 민원 좀 넣어주세요.”
서인태 차장은 피식 웃었다.
“그건 처남이 가서 말하는 게 약발이 더 잘 먹힐 거 같은데?”
“네? 에이, 그럴 리가요.”
“나야 뭐,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고, 처남한테는 회장님이 빚진 게 워낙 많으니까.”
“말씀을 왜 그렇게 하세요.”
대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정작 서인태 차장은 별로 심각한 표정도 아니었다.
“사실인걸, 뭐.”
“아무리 그래도 저는 조씨고 매형은 서씨예요. 출신성분이 달라요. 아무튼, 우리 예쁜 조카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수고야 처남 누나가 다 했는걸. 여보, 다시 한 번 수고 많았어.”
“그 말 지금 열 번째인 거 알아요?”
“백 번 해도 부족해.”
대찬은 누나 부부의 여전한 금슬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보면 외부 압력에 의해 급살로 치러진 결혼이다.
서청수 회장의 간섭을 피하려고 혈육에게 떠넘긴 셈이었다.
만일 이 결혼이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면 억장이 무너졌으리라.
그런 대찬의 노파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둘은 누구나 콩깍지가 끼는 신혼을 지나고서도 깨가 와르르 쏟아졌다.
대찬에게는 그저 감사한 일이었다.
대찬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조수진이 그를 보면서 말했다.
“너한테 임무를 하나 주겠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임무씩이나?”
“네 예쁜 조카.”
“응.”
“예쁜 조카한테 예쁜 이름 하나 지어줘라.”
대찬은 당혹했다.
이름을 지을 거면 작명소를 가거나 집안의 까마득한 어른한테 부탁하면 될 일이다.
그도 아니면 양가 부모님 중 이런 쪽에 욕심을 내는 분께 청하면 그만이다.
“왜 하필 나야?”
“너한테 책임이 있으니까.”
“무슨 책임?”
“이 결혼, 어쨌건 너 아니었으면 꿈에도 못 꿨을 거 아니야.”
대찬은 그 말엔 부정하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수진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2세도 없었을 거고. 어떻게 보면 네 덕에 우리 애가 생긴 거잖아.”
“그렇게 따지면 서청수 회장님께 지어달라고 해야지.”
“그런 바쁘신 분한테 우리가 어떻게 그러니?”
“나는 안 바쁜 줄 알아?”
서인태 차장은 남매의 탁구경기 같은 신경전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암튼 조씨 가족들 기 센 거는 진짜…….”
조수진은 가벼운 눈빛으로 서인태 차장을 제압하고 대찬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아무튼 지어와. 숙제야.”
“내가 개똥이로 지으면 진짜 개똥이로 호적에 올릴 거야?”
“조카손주 이름을 개똥이로 지어놓으면 회장님이 참 좋아하시겠다. 그지? 회사생활 참 편하겠다. 그지?”
대찬은 꽁한 얼굴로 최후의 발악을 했다.
“새파란 놈이 이름 지어도 괜찮다고 양가 부모님들도 허락하셨어?”
“당연하지. 우리가 그렇게 경우 없는 줄 알아?”
“…….”
대찬은 결국 조수진으로부터 숙제를 떠안고 병원을 떠났다.
그래도 하나밖에 없는 조카 이름을 무턱대고 지을 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