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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01화 (200/556)

난 할 수 있어 201화

회사에서 잘리는 건 그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떻게 따낸 대형계약인데!

그는 자신의 기획사 대표가 얼마나 어렵사리 이 계약을 따냈는지 알고 있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했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댈 대표의 모습이 절로 그려졌다.

벌써부터 관절이 아파왔다.

하지만 그가 우려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찬이 윤이영에게 말했다.

“윤이영 씨, 죄송합니다. 바로 뜯어말렸어야 했는데.”

“아, 아뇨… 그래도 덕분에 험한 꼴은 안 당했어요.”

옥문영 상무는 안쓰러운 어머니의 표정을 지으며 윤이영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험한 꼴 벌써 당했는걸. 미안해요. 저런 새끼랑 짝꿍 맺게 해서.”

“아, 아닙니다…….”

대찬도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고는 그녀의 매니저에게 말했다.

“매니저님, 뒷일은 걱정 마시죠. 우리 회사는 윤이영 씨와의 계약은 그대로 가져갈 겁니다.”

“예? 그,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러니 걱정 붙들어 매시죠.”

대찬이 그렇게까지 얘기했지만 매니저는 믿지 못했다.

저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무슨 권한이 있겠는가.

그의 얼굴에 드리운 먹구름은 가시지 않았다.

대찬은 뒤 마려운 강아지 얼굴을 한 그를 보고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소동이 벌어지고, 원두표는 자신의 기획사 대표에게 길길이 날뛰었다.

저런 망나니 같은 회사의 광고는 도저히 찍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기획사 대표 역시 수치심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계약을 맺어달라 싹싹 빌 때는 언제고!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그는 씩씩거리면서 필래마트 마케팅팀에 분노를 쏟아냈다.

그 소식을 들은 이동수 부사장이 그의 직통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필래마트 이동수 대표입니다. 마이스터 엔터 대표님 전화 맞습니까?”

“필래마트 대표십니까? 무슨 낯으로 직접 전화를 다 하셨습니까? 사과 받아줄 생각 없습니다.”

“아,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 같은데요.”

“착오는 무슨 착오! 원두표한테 이런 모욕을 안겨주고 도대체 무슨 변명이 통하리라 생각합니까!”

“아, 아뇨. 그 착오 말고요. 대표님이 뭔가 착오가 있으신 거 같다고요.”

“…내가요?”

이동수 부사장은 시종일관 당당한 목소리였다.

기획사 대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우리 회사가 눈이 삐었었어요.”

“도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겁니까?”

“원두표 같은 파렴치한 인간을 모델로 썼다가 우리도 파렴치한 회사가 될 뻔했잖습니까?”

원두표는 자신한테 불리할 말은 대표에게 쏙 빼놓고 했다.

그러니 기획사 대표는 이동수 부사장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파렴치한 인간이라니! 파렴치한 쪽이 누군데 대체……!”

“경영을 잘하려면 일단 상황에 대해 완벽히 이해는 하고 있는 게 기본 아닙니까? 대표님은 기본이 안 됐네요.”

“이봐, 당신!”

“그렇게 함부로 감정 드러내는 것도 비즈니스 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죠. 댁은 조폭 두목이나 하는 게 딱 맞아. 계약은 우리 쪽에서 취소합니다.”

이동수 부사장은 덤덤히 쏘아붙이고는 전화를 뚝 끊었다.

영문 모르고 인신공격만 당한 기획사 대표는 전화기를 냅다 집어던졌다.

벽에 던져진 전화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필래마트 측은 마이스터 엔터테인먼트 측에 계약체결 의사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마이스터 엔터테인먼트의 대표는 길길이 날뛰었으나, 이건 지진으로 치자면 초입에 불과한 전진이었다.

본진은 지금부터였다.

대찬이 촬영한 영상이 있었다.

그걸 언론에서 터트리면 원두표는 치명상을 입을 것이다.

최소한 국민배우로 불리는 일은 없게 될 터.

하지만 언론이 이걸 터트리게 하기 전에 당사자의 동의를 구해야만 했다.

당연히 그 당사자는 원두표가 아니었다.

윤이영이었다.

이 과정에서 윤이영의 잘못은 없었지만, 여배우로서의 이미지와 커리어에 여러모로 영향이 갈 수밖에 없다.

대찬은 윤이영과 소속사 매니저를 모처에서 만났다.

대찬은 영상부터 보여주고 터놓고 말했다.

“일단 윤이영 씨에게는 사과 먼저 드릴게요. 원두표의 추행을 보자마자 제압하지 못한 점, 허락 없이 영상을 촬영한 점.”

대찬은 윤이영에게 사과했는데 화를 내는 건 매니저였다.

“지금 제정신입니까? 누굴 골로 보내려고 작정했어요?”

“아직 골로 간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제가 골로 보내려고 하는 사람은 윤이영 씨가 아니라 원두표고요.”

매니저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영상이 나가면 이영이한테도 치명상이라고요. 원두표 팬들이 얼마나 극성맞은지 몰라요?”

“알아요. 그래서 지금 터트리기 전에 상의를 드리는 거잖습니까.”

“상의할 게 뭐 있습니까? 당장 폐기하세요.”

대찬은 매니저를 무시하고 윤이영을 바라봤다.

“윤이영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폐기하겠습니다. 저희 회사야 원두표와 계약만 체결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건 없으니까요.”

“…….”

윤이영이 대답하지 않으니 매니저가 그녀를 채근했다.

“뭐 하는 거야? 얼른 말해! 폐기해달라고.”

“…폐기하면 영영 묻히는 거잖아요.”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이거 터지면 원두표만 죽는 줄 알아? 너도 죽어!”

“나는 피해잔데 내가 왜 죽어요?”

“그쪽 기획사는 덩치가 크니까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럴 힘이 없다고.”

윤이영은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어요. 그래도 그런 독사 같은 인간이 지배하는 판에서 사느니, 차라리 자폭하더라도 시원하게 터트리기라도 할래요.”

“이영아, 네 마음 나도 알겠는데 너 이러면 너만 죽는 거 아니야. 우리 회사 사람들도 다 죽어. 주변도 생각해야지. 응?”

그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려던 대찬의 입이 열렸다.

“매니저님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요?”

“뭐요?”

“윤이영 씨가 원두표에게 당할 때 입도 뻥긋 못하셨잖아요. 그런 주제에 윤이영 씨한테 주변 사람을 돌보라고 말씀하실 수 있어요?”

“말 좀 둥글게 하시죠, 조 차장님.”

“둥글게 나와야 둥글게 하죠.”

그 말을 들은 윤이영의 얼굴에 결기가 서렸다.

그녀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 차장님, 이 영상 제보해주세요.”

“야! 윤이영! 너 진짜 이럴래?”

“이게 우리 회사에 피해가 된다고 생각하시면, 그냥 저랑 계약해지하세요. 받아줄 테니까.”

“이영아, 제발…….”

윤이영의 강단을 보고 대찬은 살짝 놀랐다.

원두표에게 당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윤이영은 매니저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대찬에게만 말했다.

“조 차장님, 이거 꼭 부탁드립니다. 안 그러면 조 차장님도 직무유기예요!”

“저희 회사에서도 윤이영 씨를 적극 돕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분담하지 못하는 마음의 짐이 분명히 따를 겁니다.”

“각오는 이미 돼 있어요.”

“…알겠습니다.”

대찬과 윤이영은 굳은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중간에서 매니저는 머리만 쥐어뜯을 뿐이었다.

대찬은 최재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최재한은 대찬에게 고운 인사가 나가지 않았다.

“매정한 자식,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이게 얼마 만의 전화냐?”

“그렇게 말씀하시는 최 기자님도 저한테 연락 한 번 없으셨던 거 같은데요.”

“쌍방과실이니 여기까지만 하자.”

“자기가 먼저 열내놓고 쏙 빠져나가는 것 봐. 얄밉긴. 기자 돼서 좋은 거 많이 배웠다?”

최재한은 회피전략을 고수했다.

“용건이나 말해. 이 시간에 전화한 걸 보니 그냥 안부인사는 아닐 거고.”

“어. 너 혹시 연예기사도 다뤄? 이건 연예기자들이 전담하려나.”

“앗! 나의 실수! 누구누구의 아찔한 속옷 노출! 이런 거 던져주려고 하면 진짜 죽여버릴 거야.”

대찬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뭔데?”

“원두표.”

그 말에 최재한의 귀가 쫑긋했다.

“원두표? 내가 아는 원두표?”

“그래. 그놈이 추태를 좀 부려서.”

“원두표가 소문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어도 딱히 구설수에 오르거나 그러진 않았는데. 원두표 정도면 작은 걸로도 건수가 되지. 정확히 무슨 일인데?”

“내가 말하는 것보단 이거 보는 게 차라리 낫겠다.”

최재한의 눈이 빛났다.

“영상도 갖고 있어?”

“그럼. 증거 없으면 제대로 내주지도 않을 거잖아?”

최재한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안두홍 때는 위험 무릅쓰고 리포트 내줬잖아.”

“아, 그렇긴 하네. 어쨌든 메일로 영상 쏴줄 테니까 어떻게 할 건지 알려줘.”

“오케이.”

“아, 잠깐만.”

“응?”

“그 영상 피해자가 배우 윤이영이야.”

대찬이 여기까지만 말했는데도 최재한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알았어. 모자이크 찐하게 하고 이름도 이니셜로 내보낼게.”

“역시. 우리 참 기자.”

대찬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가 최재한에게 기사를 낼 건지 말 건지 알려달라고 했지만, 사실 들어볼 것도 없었다.

이걸 안 쓰면 대체 뭘 기사로 쓰겠는가.

대찬은 메일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원두표 파보면 더 나올 거야. 이를 테면 상습폭행이나 마약, 그 사람이 운영하는 사업체 탈세나 장부조작 같은 거. 깊게 파보는 걸 추천한다.

첫 번째 삶과 두 번째 삶의 일들은 꼭 일치하지 않았으니 대찬은 최재한에게 확정적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귀띔만 해줘도 최재한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다.

최재한은 기자로서 꽤 유능했다.

유능한 만큼 데스크에서 인정을 받았다.

인정받는 기자가 예사롭지 않은 아이템을 물고 왔으니 그날 저녁 뉴스에 바로 내보냈다.

-국민배우로 일컬어지는 영화배우 원두표 씨가 후배인 영화배우 A씨에게 성추행을 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최재한 기자가 단독 보도합니다.

앵커의 정제된 톤에서 최재한의 살짝 격앙된 톤으로 넘어갔다.

-서울의 한 스튜디오, 영화배우 원두표 씨와 후배 A씨가 광고촬영을 위해 신혼부부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원두표 씨의 손길이 점점 과감해집니다.

최재한의 모습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대찬이 직접 촬영한 영상이 화면에 나타났다.

아마추어의 솜씨로 촬영한 영상이라 화면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게 오히려 더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영상은 원두표의 질척거리는 웃음과 모자이크를 해도 느껴지는 A씨, 윤이영의 당혹한 표정, 그리고 추악한 손길을 그대로 담아냈다.

말과 글보다 동영상은 훨씬 더 파급력이 높은 매체다.

게다가 뉴스전문채널에서 시작된 단독보도는 신뢰도와 영향력이 큰 터.

극성팬과 좋은 이미지로 무장한 원두표도 버텨내지 못했다.

네티즌들의 왕성한 호기심은 원두표에게 당한 A씨가 누구인지를 캐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본격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도 전에 바로 다음 떡밥이 생겼다.

최재한은 대찬의 귀띔을 듣고, 원두표가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카페인 ‘원두표 원두향기’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재고 대보고 따져보니 확실히 심증이 있었다.

대찬이 제보한 영상으로 한 번 휘청거린 원두표에게 최재한은 바로 다음 일격을 날렸다.

-원두표 소유 커피숍 체인, 가맹점에 원두 ‘통행세’ 부과 정황… 경찰 수사 착수

원두표가 프랜차이즈 가맹점에 원두를 원가보다 비싼 값에 공급했다는 의혹이었다.

그건 원두표의 밝혀질 죄과에 비하면 아주 가볍고 사소한 문제였다.

최재한이 단독으로 2연타를 날리자, 다른 언론사의 기자들도 원두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기자는 반드시 특종을 잡을 필요는 없지만 낙종은 면해야 한다.

그들은 강물에 빠진 살진 노루에 달려드는 피라냐 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들의 무기인 펜촉으로 원두표를 난도질했다.

폭행.

성폭력.

마약.

탈세.

원두표의 밝은 미소 뒤에 숨어있던 추악한 행실들이 드러났다.

대찬은 첫 번째 삶과 전혀 달라지지 않은 원두표의 삶을 보고 쓴 입맛을 다셨다.

홀로 고고한 탑처럼 서있던 원두표는 그렇게 무너졌다.

퀭한 눈으로 기자회견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영어의 몸이 되었다.

대찬은 그 과정을 텔레비전으로 씁쓸히 지켜봤다.

사람이 밉기는 해도 죄의 무게가 첫 번째 삶보다 조금은 줄어있기를 바랐다.

대찬은 첫 번째 삶의 재방송을 보는 듯한 기시감에 한참 쓴웃음을 머금어야만 했다.

원두표가 실컷 두들겨 맞는 덕분에 A씨, 윤이영은 여론의 불합리한 비난을 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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