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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할 수 있어-200화 (199/556)

난 할 수 있어 200화

그래도 원두표가 프로는 프로였다.

광고대행사 직원의 말을 쉽게 이해하고, 의도대로 연기했다.

윤이영 역시 타고난 연기력이 있으니 원두표의 짝꿍으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자기의 의중대로 그림을 만들어주는 둘을 보고 대행사 직원은 더 신이 났다.

“자, 조금만 더 정답게 해주시고요. 카트는 조금 천천히 미시고. 진열대가 있다고 가정하고, 남편은 맥주 고르고, 아내는 눈빛 쏘고. 네, 좋습니다.”

대행사 직원의 말대로 척척 해내면서 원두표는 자신감에 가득 차서 말했다.

“거봐요, 사전협의니 뭐니 필요 없다니까요. 피차 귀찮기만 하고. 아마추어도 아니고, 참.”

오만에 가까운 목소리에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원두표의 능력은 출중했다.

옥문영 상무 역시 자신이 여기에 온 목적을 잊고 감탄했다.

“이야, 괜히 톱스타 소리 듣는 게 아니네.”

“상무님!”

대찬이 쏘자 옥문영 상무는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어, 알았어. 때를 보고 있다니까, 때를?”

대찬은 꽁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봤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그때부터였다.

원두표는 이제 대행사 직원의 참견 없이도 알아서 그림을 만들어냈다.

그걸 보고 대행사 직원은 관망세로 돌아섰다.

‘뭐야, 저거.’

대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휘자 없이 자기가 알아서 꾸려가는 원두표였다.

경력이나 능력이나 그에 비해 부족한 윤이영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원두표는 윤이영을 바라보며 진득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봐도 상냥한 남편을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치한이라면 모를까.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건 대찬뿐만이 아닌 듯했다.

마케팅팀과 대행사 직원들도 어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두표는 윤이영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순간 윤이영의 어깨가 움찔했다.

원두표의 팔 근육이 살짝 도드라졌다.

갖다 댄 게 아니라 힘을 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대찬의 미간에 단단히 주름이 잡혔다.

원두표는 흐흐 웃으면서 대행사 직원에게 말했다.

“조금 더 다정하게?”

“예?”

“그죠? 부부니까.”

“아…….”

대행사 직원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원두표는 윤이영의 목덜미에 코를 살짝 묻었다.

윤이영의 동공이 커졌다.

‘추행이다.’

저건 추행이다.

대찬은 입술을 악물었다.

원두표의 매니저는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원두표에게 건성으로 손짓을 했다.

적당히 하라는 표시였다.

그래도 원두표는 눈을 찡긋했다.

“왜? 다정하잖아. 응? 아니야?”

“에헤이, 그래도. 부부가 아니라 불륜 같아.”

“내 나이 서른 겨우 넘었다. 이영이는 한창 꽃띤데 불륜은 너무하잖아. 그치, 이영아?”

원두표는 윤이영에게 웃음을 흘리면서 물었다.

윤이영은 원두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이영이도 내 말이 맞다잖아.”

윤이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건 유약한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윤이영의 매니저도 저런 일에 제대로 항변하지 못했다.

공룡 앞에서는 몸을 바들바들 떠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군소 기획사의 숙명이었다.

이 건도 윤이영의 기획사 대표가 원두표의 기획사 대표에게 혼신의 로비를 펼친 결과였다.

윤이영 몸값의 일부를 그쪽에 커미션으로 떼어주기까지 했다.

그걸 기꺼이 감내할 정도로 군소 기획사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기회.

단순한 몇 번의 손장난에 버럭 소리를 질러 깨버릴 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원두표는 매니저의 가벼운 제지에도 사심 채우는 짓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매니저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추한 꼴을 멈추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이 못 보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매니저는 필래마트 측 직원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지금은 대행사 쪽과 합을 맞춰보는 것뿐이니까, 필래 직원분들은 잠깐 나가서 쉬고 계시죠. 대행사분들도 많이 계실 필요가 있나요. 한 분만 남고 나가서 좀 쉬세요.”

대행사 직원 1명쯤이야 자기가 얼마든지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케팅팀 직원들은 순순히 매니저의 말을 들었다.

괜히 원두표 쪽의 심기를 건드려 애써 잡은 대어를 놓치고 싶지 않은 까닭이었다.

윤이영이야 안 하겠다고 해도 그 정도 급은 대타를 구하기 쉬웠다.

하지만 대찬은 그의 말을 선선히 들어줄 용의가 없었다.

옥문영 상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마케팅팀이 나가고도 대찬과 옥문영 상무가 버티고 있으니 매니저가 이제는 짜증마저 냈다.

“거기 두 분은 안 나가요?”

짜증이라면 한 짜증 하는 대찬도 짜증으로 맞불을 놨다.

“왜 나가요? 합이 잘 맞는지 필래 쪽에서도 확인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아, 저번에 지각했네, 어쩌네 시비 걸었던 분이시네. 여기 시비 걸러 왔어요?”

“이게 단순히 시비 거는 걸로 보이시면 성격에 문제 있는 건데. 혹시 인성검사 받아보실 생각 없나요?”

“아, 진짜, 저게 꼭지 돌게 하네.”

“그쪽 꼭지는 너무 늦게 도네요. 내 꼭지는 이미 팝핀댄스 추고 있는데.”

“뭐야?”

매니저가 받아칠 말을 찾지 못하는 와중에, 대찬은 바로 옆의 옥문영 상무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닥거렸다.

“상무님, 혹시 쟤네들 이목 좀 끌어주시겠어요? 소란 좀 피우셔서.”

“소란은 내 전문이지. 뭐, 생각 있어?”

“네. 짧고 굵게 소란 피우시고 못 이기는 척 매니저 끌고 밖으로 나가주시면 돼요.”

“오케이.”

옥문영 상무는 대찬의 뜻을 따랐다.

결정을 한 순간 옥문영 상무는 돌변했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서있기만 하던 모아이 석상에서, 손에 잡히는 건 있는 대로 파괴하는 판타지소설의 골렘으로 변신했다.

“야, 이 새끼야!”

“뭐, 뭐야!”

스튜디오를 무너뜨릴 듯한 사자후에 원두표의 매니저는 당황했다.

“감히 우리 필래를 뭐로 보고 네까짓 게 나가라 마라 행패야! 엉!”

“이, 이 여자가 미쳤나!”

“미쳤다, 왜! 너 오늘 한번 나한테 죽어볼래!”

“아니, 제발 광고 한 편만 찍자고 사정사정하는 걸 들어줬더니, 이게 어디서 적반하장이야!”

옥문영 상무의 폭주는 여기까지였다.

그녀는 매니저의 지적에 아차 하는 연기를 했다.

“아, 그, 그렇네?”

“물불 못 가리고 달려드네, 이 여자가.”

주도권을 잡았다고 생각한 매니저는 기세가 올라 옥문영 상무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옥문영 상무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린 사이, 대찬은 스튜디오 밖으로 나갔다가 쪽문으로 다시 들어왔다.

간이 세트 때문에 몸이 가려져 누구도 대찬의 잠입을 눈치채지 못했다.

매니저는 옥문영 상무를 거칠게 몰아 스튜디오 밖으로 쫓아냈다.

잡상인을 쫓아낸 듯 매니저는 손을 탁탁 털며 불쾌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돌아왔다.

그러고는 대행사 직원에게 으르렁거렸다.

“하던 거 계속하시죠!”

“아, 네…….”

이제 이 공간에는 힘없는 대행사 직원 하나와 원두표, 그의 매니저, 그리고 윤이영뿐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그들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대찬까지.

이제는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원두표는 친절한 웃음을 대행사 직원에게 보였다.

“잠깐 소란이 있었네요. 저 다음 스케줄도 있으니 얼른 진행하시죠.”

“저, 선배님, 스케줄이 바쁘면 오늘은 이만…….”

윤이영이 입을 뗐지만 원두표는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프론데 약속은 지켜야지. 그렇지?”

“…….”

원두표의 몸짓은 더 과감해졌다.

그걸 대찬의 휴대폰 카메라는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당하는 윤이영을 생각하면 당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럼에도 대찬은 그녀의 수치심을 즉시 제거해주지 못했다.

흡사 굶주림에 쓰러진 여자 아이를 독수리가 노리는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기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 기자는 사진을 찍은 즉시 아이를 구했지만, 세간의 비난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했다.

대찬은 그것과 꼭 같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유사한 심정이었다.

‘이 정도면 됐어.’

윤이영의 등을 쓸던 원두표의 손이 주섬주섬 아래로 향하자 대찬은 더 참지 못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원두표! 너 뭐 하는 거야!”

“……!”

원두표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매니저 역시 당황했다.

옥문영 상무를 해치우고 자기 일처리가 제법 싹싹했다며 속으로 으쓱하던 그였다.

갑작스러운 대찬의 등장에 그는 순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원두표는 얼른 윤이영에게서 손을 뗐다.

“…뭡니까?”

원두표는 애써 덤덤한 척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대찬은 그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일하러 왔으면 일만 해. 추잡하게 굴지 말고.”

“얻다 대고 반말이지?”

“이 와중에 반말, 존댓말 따지는 걸 보니 너도 인성이 안 돼도 한참 안 됐네.”

“이봐요, 나는 당신 이름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이게 뭐 하는 수작이냐고.”

“내 이름은 알 거 없고. 수작? 수작은 도대체 누가 부렸는지.”

“하, 어처구니가 없네. 쓸데없는 영웅심 부리지 마. 이러다 너희 회사 광고 망가지면 어쩌려고 그래.”

“망가지는 건 네 신세겠지.”

대찬이 꼬박꼬박 받아치자 평정을 유지하려던 원두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가 폭발하려는 기미를 감지한 매니저가 그를 뒤로 물렸다.

“야, 두표야, 일단 참아. 내가 해결할 테니까.”

“아니, 저 새끼가 천지분간 못하고 날뛰잖아.”

“그래, 내가 해결할게, 응? 잠깐 저리 가있어.”

매니저는 가까스로 원두표를 뒤로 물리고 대찬에게는 고리눈을 부릅떴다.

“보아하니 신입사원이나 대리쯤 되는 거 같은데, 아직 사회공부를 덜하신 거 같습니다?”

사회공부를 했으면 너보다 곱절은 더 했다.

대찬은 매니저를 비웃었다.

아무 말 없는 대찬을 향해 매니저는 옥문영 상무 때와 마찬가지로 기세가 올랐다.

“자꾸 이러면 우리 계약 캔슬할 거예요. 아직 가계약 상태인 거 알죠?”

“마케팅팀이 그거 하난 잘해놨더군요. 사전협의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아무 조건 없이 계약을 철회할 수 있다.”

“잘해놨다고? 어떻게 된 게 필래는 대기업씩이나 돼서 이런 놈을 직원이랍시고 뽑아놨지?”

“그러게. 대기업씩이나 돼서 저런 변태새끼를 광고 모델로 떡하니 뽑아놨을까. 대기업 체면이 말이 아니네.”

“아니, 근데 이게 진짜……!”

“네놈 새끼는 변태새끼 똥이나 치우는 졸개고. 시정잡배만도 못한 게 어디서 맞먹으려고 들어?”

“아, 넌 안 되겠다. 오늘 좀 맞자.”

매니저가 팔목을 걷어붙이며 달려들려고 했다.

대찬도 쉽게 물러나줄 용의는 없었다.

그렇게 남자 둘이 맞붙으려는 찰나,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옥문영 상무가 둘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그녀는 매니저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장판파의 장비가 환생한다면 저 모습이리라.

“야! 지금 얻다가 주먹을 뻗쳐!”

“아, 아줌마는 빠져!”

“내 새끼한테 손대려는데 어떻게 빠지냐? 이 건방진 새끼야.”

“저 새끼가 아줌마 아들이야? 아, 진짜 여자 안 때리려고 하는데 자꾸 성질 돋우네, 진짜.”

옥문영 상무는 피식 웃었다.

“때릴 수 있으면 쳐봐, 졸개 새끼야.”

“이 아줌마가……!”

매니저는 순간 이성의 끈을 놓고 주먹을 뻗었다.

제법 쌈박질 좀 해본 모양새였는데, 옥문영 상무는 그의 손목을 한 손으로 가볍게 턱, 붙잡았다.

“…어?”

매니저는 있는 힘껏 그 아귀힘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지만 꼼짝도 안 했다.

옥문영 상무는 실실 웃었다.

“쳐보라니까? 왜 가만히 있어?”

“이익……!”

“이익은 무슨. 너한테 손해지, 이 새끼야!”

옥문영 상무는 순간적으로 그의 손목을 비틀었다.

“으아악!”

매니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일순 제압되었다.

이렇게 되니 대찬의 모양새가 어정쩡해졌다.

옥문영 상무는 마왕을 물리친 왕자님처럼 웃었다.

그리고 대찬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대찬은 어정쩡하게 웃었다.

‘잘하긴 하셨는데, 이래버리면…….’

대찬의 모양새는 숫제 연약한 공주님이었다.

원두표는 그들에게 눈빛을 쏘며 외쳤다.

“이 광고 취소야. 당신들 책임이야. 알아? 회사에서 짤려봐야 정신을 차리지.”

“응. 잘 가라, 변태새끼야.”

옥문영 상무는 그를 더 상대해주지 않았다.

이 상황이 가장 절망적인 건 윤이영의 매니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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