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할 수 있어 199화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제가 중증 니코틴 중독이라서요.”
“아, 네.”
대찬은 쌀쌀맞게 대했다.
“흐흡.”
그게 또 윤이영의 웃음주머니를 건드렸다.
싸늘한 시선이 윤이영에게로 쏠렸다.
원두표 역시 순간적으로 독한 시선을 보냈다.
윤이영은 얼른 입을 합, 다물었다.
마케팅팀의 과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해볼까요? 저희로서는 정말 기대가 됩니다. 원두표 씨, 그리고 윤이영 씨와 CF를 찍게 되다니.”
“예. 시작하시죠.”
어떻게든 회의가 시작되긴 했지만 냉랭한 분위기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회의 내용에 대찬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엎어질 기획이었다.
어영부영 회의를 마치고 각자의 행선지로 흩어지는 때가 왔다.
건성으로 인사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윤이영이 대찬을 콕 집어 인사했다.
“조 차장님, 또 뵙겠습니다.”
“예? 아, 네. 윤이영 씨도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대찬은 윤이영에게만큼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녀에게는 마음에 거슬릴 만한 일이 없었고, 반드시 제거해야 할 폭탄인 원두표에 반해 윤이영은 반드시 잡아야 할 블루칩인 까닭이었다.
대찬의 깍듯한 인사에 윤이영은 활짝 웃었다.
서먹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웃음이었다.
그녀의 웃음은 원두표 때문에 답답한 대찬에게서도 웃음을 유발해냈다.
“웃음이 많으시네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천지분간 못하고 웃었죠?”
“나쁜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에요. 보기 좋아요.”
“정말요?”
윤이영은 그 말을 듣고 더 활짝 웃었다.
대찬은 원두표로 망친 기분을 윤이영으로 다소 만회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옥문영 상무에게로 갔다.
옥문영 상무는 그가 들어오자마자 다짜고짜 물었다.
“오, 엑스?”
대찬은 팔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그치고는 적극적인 액션을 취하며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절대 안 됩니다.”
“그 정도야?”
“네, 심각합니다.”
대찬이 단정적으로 나오자 옥문영 상무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원두표 씨를 완벽히 파악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요.”
“잠깐 보고 다 파악하면 돗자리 깔아야지, 여기서 월급쟁이 할 이유가 없지.”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하잖습니까. 그렇게 단정할 근거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얘기해봐.”
대찬은 최대한 사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건조한 사실만 전달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다혈질이기로 치자면 필래그룹 최고인 옥문영 상무의 분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미친놈! 그런 놈을 우리 회사 얼굴로 삼을 수는 없지.”
“꼭 원두표 씨를 고집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쪽에 제시한 정도의 금액이면 얼마든지 같은 급의 모델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고말고. 이 건은 나한테 맡겨둬.”
“상무님께요?”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 멱살을 잡아서라도 못하게 할 테니까.”
“상무님 실력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죠.”
우람한 근육과 맹수의 눈빛을 보라.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음성을 들으라.
그 누구든 굴복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옥문영 상무는 그길로 이동수 부사장을 찾아갔다.
이동수 부사장은 옥문영 상무의 등장만으로도 살짝 긴장했다.
골프장에서야 제 패거리를 거느리고 일본 말로 이지메를 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하지만 일대일이라면?
코끼리 앞의 치타 정도였다.
옥문영 상무는 낮고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상의드릴 게 있습니다.”
“상의?”
“예. 마케팅팀에서도 따로 사장님께 보고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CF 모델? 알고 있어. 원두표랑 윤이영. 원두표는 잘 잡았는데 윤이영은 뭐야? 나는 김초희 쪽이 더 좋은데 말이야.”
“그러십니까?”
이동수 부사장은 주책맞게 쓰읍 입맛을 다시곤 말했다.
“근데 그건 왜? 간만에 마케팅팀에서 건수 올렸는데, 문제 있나?”
“네. 원두표 씨를 CF 모델로 캐스팅하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동수 부사장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왜, 왜?”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차후 트러블이 생길 염려가 있습니다. 굳이 그 많은 비용을 들여 리스크를 자초할 이유가 없습니다.”
“평판이 좋지 않다니. 그런 러프한 이유로 마케팅팀의 노력을 수포로 만들려고 그러나?”
“어쨌든 반려해주십시오.”
“어, 어쨌든이라니…….”
이동수 부사장은 옥문영 상무의 위세에 주춤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했다.
전략기획실의 업무는 경영진이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조언하고 보좌하는 것이다.
협박하고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옥문영 상무의 목소리에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옥문영 상무는 딱히 협박하거나 강제할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압도적인 풍채에서 나오는 시각효과와 웬만한 베이스는 찜 쪄 먹는 낮은 목소리는 그녀의 선천적 무기였다.
그 때문에 이동수 부사장이 느끼기에는 숫제 협박이요, 강제였다.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이동수 부사장은 마음을 다잡았다.
“구체적인 소스가 있으면 옥 상무의 조언을 귀담아듣겠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는 거절할 수 없어.”
“대표님.”
“하지만 옥 상무가 이러는 것도 이유는 있겠지. 부서에서 누군가 강력하게 반발했을 거야. 그렇지?”
옥문영 상무는 부정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누가 그렇게 떼를 썼나?”
“조 차장입니다. 조 차장의 조언이 아니었으면 저도 그대로 밀고 가자고 했을 겁니다.”
“과연.”
이동수 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증으로 점철된 대찬과의 인연이었지만, 이동수 부사장 역시 대찬의 실력만큼은 신뢰했다.
이유 없는 반대는 아닐 것이다.
괜히 대찬이 어깃장 놓은 일을 추진했다가 덤터기를 쓰고 싶지 않았다.
그가 가진 최선의 목표는 최대한 늦게 서원웅에게 자리를 넘겨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안전제일주의, 보신주의적인 면모는 필수였다.
그렇다고 대찬이 그랬다는 말에 덜컥 손 들고 항복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면이 서지 않았다.
이동수 부사장은 결론을 내렸다.
체면과 미래를 동시에 고려한 결정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고.”
“어떻게 말입니까?”
“보고서 읽어보니까 비싼 값 부른 대신 우리 쪽에서 메인모델과 세 번의 사전협의를 거칠 수 있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었다던데?”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원래 PPM(사전제작회의)에서 모델 섭외도 검토하긴 하지만, 우린 원두표 아니면 안 한다고 했으니까요.”
“원두표가 순순히 세 번씩이나 나와주겠다고 한 것도 재밌네.”
“그만큼 우리가 거액을 들였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조항도 있어요. 메인모델이 사전제작회의에 참여하지 않아도 서로 만족했다면 생략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세 번째까지 안 가도 충분히 끝낼 자신이 있다?”
“네. 실제로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원두표가 사전회의에 여러 번 참석할 것도 없이 금방 끝났다더군요.”
이동수 부사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프로는 프로군. 이번 한 번 했으니 두 번째, 세 번째가 있겠네?”
“예. 두 번째 사전협의에서는 콘티대로 합도 맞춰보기로 돼 있습니다. 세 번째는 그야말로 최종점검이고요. 아마 원두표 쪽은 세 번째에 모든 촬영을 끝내겠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동수 부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두 번째 사전협의 때, 옥 상무가 조 차장 데리고 나가봐.”
“그래서요?”
“조 차장이 아무리 난 놈이라도 새끼 차장이잖아.”
“그렇죠.”
“겨우 조 차장을 미팅에 내보내고 이 건을 엎으면 마케팅팀에서 불만이 많을 거야.”
“맞는 말씀이십니다.”
이동수 부사장은 정론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것에 딴죽을 걸 정도로 옥문영 상무도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이동수 부사장의 말이 옳았다.
물론 이동수 부사장이 원두표와의 계약을 해지하라고 밀어붙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마케팅팀의 말하지 못하는 불만과 반감이 축적될 터.
아무리 원두표가 잠재적 폭탄이라 하더라도 마케팅팀의 의중을 깡그리 무시하는 건 회사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었다.
상무급이 직접 나서는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 마케팅팀이 불만은 가질지언정 납득할 것이다.
옥문영 상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말씀이 옳습니다. 그렇게 하죠.”
“그래. 나한테 부담이 없도록, 응? 부담이 없게 잘해달라고.”
“예, 그러겠습니다.”
옥문영 상무는 이동수 부사장의 지시에 수긍하고 물러났다.
그녀에게 전해들은 대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의 말씀이 타당하네요.”
“그렇지. 너무 상심하지는 마.”
대찬은 웃음을 지었다.
“상심은요. 이런 거 가지고 상심했으면 진즉 필래 관뒀어요.”
“그래. 조 차장 멘탈이야 내가 알지. 나한테나 임원들한테 들이박는 성질머리를 내가 어떻게 몰라.”
“민망하게 왜 또 과거지사는 말씀하시고 그러십니까…….”
옥문영 상무는 대찬에게 눈을 흘겼다.
“하나도 안 민망하잖아. 내숭은.”
“내숭 아닙니다.”
“됐고, 다음번에 원두표 만나러 갈 때 조 차장은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쥐어 패는 건 아니죠?”
옥문영 상무는 방금 전보다 더 따갑게 눈총을 쐈다.
“누굴 조폭으로 알아?”
‘네…….’
마음의 소리는 마음의 소리로 끝냈다.
원두표, 그리고 윤이영과의 두 번째 사전협의 시간이 되었다.
현장에는 첫 번째와 또 다른 긴장감이 감돌았다.
옥문영 상무의 존재 때문이었다.
마케팅팀의 직원들 역시 대찬이 있을 때와는 달리 옥문영 상무의 눈치를 설설 살폈다.
조폭도 지역구가 있고 전국구가 있다.
대찬은 지역구였다.
대찬의 이름이 필래마트에서나 떠들썩하고, 전체 계열사에서는 그저 서원웅의 측근 정도로 인식했다.
하지만 옥문영 상무는 전국구였다.
그 입지전적인 경력도 있거니와 그것보다 더 이름 높은 성질머리 덕분이었다.
차장과 상무의 직급 차이에서 오는 존재감도 남달랐다.
대찬에게는 쉽게 말을 걸어오던 마케팅팀 직원들은 옥문영 상무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심지어는 옥문영 상무와 초면인 원두표 역시 본능적으로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옥문영 상무는 미팅 시간에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목표는 역시 대찬과 마찬가지로 원두표를 낙마시키는 것뿐이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옥문영 상무를 지나치게 의식하던 마케팅팀 직원들도, 옥문영 상무가 내내 침묵하자 차츰 자신들의 일에 집중했다.
“자, 그럼 콘티대로 구도를 좀 잡아봅시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원두표는 쓴웃음을 지었다.
CF를 찍어도 50편은 넘게 찍었다.
본업이 배우가 아니라 CF모델이라는 우스개까지 나돌던 판이다.
이런 프로를 모셔놓고 거추장스러운 요식행위들을 해야 하나.
원두표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하지만 이미지를 생각해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마케팅팀 직원은 사람 좋은 웃음을 걸쳤다.
고분고분 따라오지 않는 원두표가 마음에 차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를 낚기 위해 몇 날 며칠 애를 쓴 걸 생각하면 영업용 미소는 자연스레 지어졌다.
“그래도 저희와 약속하신 부분이니까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따라주세요. 오래 안 걸립니다.”
“…그러죠, 뭐.”
그런 원두표와는 다르게 윤이영은 협조적이었다.
소위 ‘급’의 차이도 있겠지만 천성의 차이이기도 했다.
필래마트의 광고 콘셉트에서 원두표와 윤이영은 부부 사이였다.
단란하게 서로 쇼핑카트를 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다.
재기발랄한 스토리를 구성하지 않은 건 비단 대행사의 기획력 부족만은 아니었다.
스토리가 재기발랄하면 모델에 대한 집중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필래마트의 목표는 자신의 ‘급’이 원두표의 ‘급’만큼 컸다는 걸 강조하는 것이었다.
오로지 원두표의 브랜드 파워만을 부각시키겠다는 의도였다.
파격적인 콘셉트를 원두표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한 것도 원인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광고대행사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대행사 내에 마련된 간이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광고대행사는 능숙하게 원두표와 윤이영에게 자세를 취하게 했다.
이 자리에서 옥문영 상무와 대찬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팔짱을 끼고 그저 구경이나 하는 것뿐이었다.
‘뭐야, 알아서 한다더니.’
대찬은 옥문영 상무를 흘끔 봤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옥문영 상무는 스스로 찔렸다.
연신 헛기침을 했다.
“조금만 기다려봐. 때를 보는 거야, 때를.”
“예. 기대할게요.”
대찬은 복잡미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다물었다.